-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23/12/17 21:31:50
Name   골든햄스
File #1   TZVInsmRVsZ64WrRgibIY_HyCEUTmkO7_xNvVD5l0A9l7JJGMSJvSyH0Srb9ZIbhsqB3bFnHhZCGQdwIQnt7lA.webp (42.0 KB), Download : 5
Subject   빙산 같은 슬픔


그냥 문득 생각나서 일기처럼 쓴 글이라 별로 읽으실 가치는 없습니다.

올해 1년을 안식년으로 쉬었습니다. 남들은 상상도 못할 만한 사치인지도 모릅니다. 아니지, 사실이 그렇습니다. 그동안 주로 먹고 쉬고 운동하고 짬짬이 공부하는 것 외에는 별일이 없었습니다.

이제 와 언급조차도 새삼스러운 제 과거를 살펴보면, 참으로 운이 나빴다 싶은 일들이 가득합니다. 홍차넷에조차, 결혼을 약속한 남자친구에게조차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수치심에 삼켜야 하는 과거들도 많습니다. 짧게 말하면 가정폭력으로 인해 이뤄진 부정적인 연쇄작용입니다만, 그 안의 하루하루는 고통으로 차 있습니다. 가끔 사람들이 작은 말 한마디나 표정 하나에 서운해하고, 서로 위로해주고 받는 광경을 보다보면 기분이 아득해지기도 합니다. '그럼 내 20년은?' 이란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이런 생각 탓에 저는 쉽사리 다정해지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하루에도 수많은 가설을 썼다 지워 내려갔습니다. 하필 운이 나빠서, 못된 사람들이 있었어서, 그때 그 자리에 있었어서, 가족주의 이데올로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이 가려져서, 내가 서툴렀어서, 내가 대처를 잘 못했어서, 부정적인 악순환에 들어갔어서, 이렇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 결국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알 수 없고, 설사 답을 알게 되더라도 과거는 고칠 수 없고 그 과거로 인해 남아있는 현재의 부작용도 고칠 수 없다. 순응하고 살 수밖에는.' 이라는 결론만 나옵니다.

꾸준히 관련 책도 읽고 심리상담과 치료도 받아온 결과 저 자신에게 남아있는 부정적인 영향들에 대해서는 꽤 객관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가령 사람을 만났을 때 느끼는 불안감, 밝게 웃으며 인사 못하는 태도 저변에 깔린 과거로 인한 인간에 대한 불신, 가끔 급격히 자신을 방어하고자 나오는 경계심 어린 태도, 이런 것들이 쌓여 인간관계에 부작용을 일으키는 되먹임 구조. 스스로에 대한 끝없는 채찍질, 평온함을 버티지 못하는 마음, 그로 인해 쌓이는 불행과 기분 부진, 슬픔. 공감대를 공유하는 또래 집단에 속해본 적이 없고 속할 일 없는 점에서 나오는 미숙함, 열등감, 태도. 인생에 대한 불신, 혐오, 환멸. 아버지와 어머니가 주입한 '안 좋은' 사고들...

어느 날, 참 좋은 분과 이야기를 나누고 버스로 돌아가는 길에 눈물이 났습니다.
남들에게는 평온이 일상이었을 것이란 것이 이제야 느껴져서였습니다.
길거리에는 아이를 데리고 나온 젊은 엄마들과, 일을 다니는 사람들, 조용히 침묵을 누리고 있는 행인들이 가득했습니다.

문득 깨닫고 보니 세상 사람들은 참 사랑과 호의와 온기 속에서 살고 있었고,
저는 그런 줄도 모르고 그늘에서 살고 있었던 거 같았습니다.

너무도 힘들었던 변호사시험을 보는 해, 이상하게 마음 속에서 '엄마! 아빠' 라고 소리치는 소리가 멈추지 않아 괴로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결국 시험을 포기하고, 존경하던 어른 분들께 꾸중도 듣고, 심기일전하며 다시 셋팅을 갖추었지만 또다시 그런 심리상태가 될까봐 두려웠습니다.

'엄마! 아빠! 왜 날 버렸어. 난 엄마, 아빠가 필요한데.' 그때 그토록 마음 속에서 울렸던 소리는 그런 뜻이었던 것임을 요즘 알게 됐습니다. 하지만 이제 나이도 들었고, 새 가족도 꾸렸고, 더 이상은 엄마 아빠 탓을 하고 살 수 없는 나이란 걸 압니다. 더욱이 부모가 최악의 살인자라든지, 자식에게 눈에 띄는 흉악한 행동을 해서 뉴스에 나온 경우도 아닌, 폭력은 있었지만 저와 같이 복잡한 학대를 당한 경우에는 이제 어디를 가서 호소할 여력도 없습니다.

종교를 믿으면서 용서하려고도 해봤고, 법적으로 주소열람제한 등 최대한의 구제책을 꾸리려고도 해봤고, 별의별 노력을 다 했지만 솔직히 말해 인정해야 할 점은 이 점일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저는 평생 이로 인한 정서적 장애를 몸과 마음에 지고 살아갈 거란 점입니다.
대신 그냥, 그 모습 그대로 살아가도 된다고 이번 한 해 쉬면서 만난 많은 홍차넷 분들이 용기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억지로 평범한 척, 부모가 있는 척, 행복한 척 노력하지 않는 채 이 모습 그대로 미움도 사랑도 받으며 살아가보려 합니다.
가끔은 공황도 생기고, 관계에서 실수도 하고, 오랜 병마로 공백기도 있는 그냥 그 모습 그대로 좋지도 나쁘지도 않게...

빙산 같은 슬픔이 잘각거리면서 몸 안에 가득찬 게 그 버스로 집에 돌아가는 날 느껴져, 집에 가자마자 울었습니다.
하지만 희망적인 점이 있다면 이제는 이 슬픔을 슬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살아갈 수 있단 겁니다.
적어도 옛날옛적 친구에게 '심장이 가슴 안에서 썩어가는 거 같다'고 호소하며 정체 모를 고통을 느낄 때보다는, 이제는 확연히 제 슬픔을 직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언젠가 이 빙산도 녹을 것이고, 녹지 않더라도, 그 위에서 때로는 즐겁게 썰매를 타고 추우면 모닥불을 피우며 살아갈 수도 있을 겁니다. 남들보다 더 추운 인생을 살다 가겠지만, 그것도 인생인 것을요.

이렇게 제 안식년을 천천히 마무리해봅니다. 내년부터는 다시, 사회에서 멋지게 뛸 수 있기를.



* Cascade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4-01-03 06:35)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36
  • 토닥토닥
  • 꼭 안아드리고 싶어요
  • 이 글은 지지받고 위로받아야 할 글이다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557 정치/사회온라인 공간과 인간의 상호작용(상) 84 호라타래 17/12/06 7264 39
830 정치/사회사회가 감내할 수 있는 적정비용을 찾아서 41 Fate 19/07/10 7010 38
366 기타홍차상자 이야기 :) 54 새벽3시 17/02/15 7139 38
363 일상/생각살아온 이야기 26 기쁨평안 17/02/11 5232 38
1383 정치/사회의대 증원과 사회보험, 지대에 대하여...(펌) 45 cummings 24/04/04 7520 37
1361 일상/생각전세보증금 분쟁부터 임차권 등기명령 해제까지 (4, 完) 6 양라곱(양라곱) 24/01/31 3079 37
1232 역사홍콩의 기묘한 도로명의 유래 11 아침커피 22/08/27 3857 37
1212 일상/생각나머지는 운이니까 16 카르스 22/06/05 3971 37
1214 일상/생각아이들을 돕는 단체 "얀코"에 2차로 자원봉사 다녀왔습니다. 17 트린 22/06/16 2898 37
1166 꿀팁/강좌학습과 뇌: 스스로를 위해 공부합시다 11 소요 22/02/06 5303 37
970 의료/건강조혈모세포 기증 후기 6 아목 20/06/14 4798 37
909 일상/생각습관 만들기 - 2달째 후기 47 카야 20/01/14 5468 37
819 과학과학적 연구의 동기부여는 시대를 어떻게 대변하는가? 30 다시갑시다 19/06/18 5785 37
802 일상/생각30대 기획자. 직장인. 애 아빠의 현재 상황. 15 아재 19/05/12 5583 37
750 일상/생각2018년의 사회진화론 21 구밀복검 18/12/28 7214 37
795 의료/건강오늘 받은 정관수술 후기 21 미스터주 19/04/17 13051 37
558 IT/컴퓨터'옵션 열기'의 정체 16 Toby 17/12/07 10980 37
1347 일상/생각빙산 같은 슬픔 10 골든햄스 23/12/17 1583 36
1040 일상/생각아이들을 싫어했던 나... 32 whenyouinRome... 20/12/15 4614 36
1011 문화/예술여백이 없는 나라 13 아침커피 20/09/29 5545 36
991 문학사랑하는 법 26 아침커피 20/07/28 4888 36
812 일상/생각이방인 노숙자 7 멍청똑똑이 19/06/02 5562 36
582 과학국뽕론 44 기아트윈스 18/01/25 7164 36
539 일상/생각아주 작은 할아버지 20 소라게 17/11/03 6127 36
465 정치/사회홍차넷 20000플 업적달성 전기 89 파란아게하 17/07/04 7261 36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