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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4/07/14 17:21:19수정됨
Name   meson
Link #1   https://cafe.naver.com/bloodbird/75311
Subject   [눈마새] 나가 사회가 위기를 억제해 온 방법
“정확해. 그런 식으로밖에 생각할 수 없지. 위기라고 할 수 있는 겨울이 왔을 때 나무는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을 확장하는 대신 자신의 일부를 죽이는 선택을 하지. 그런데 믿기 어렵겠지만 이것은 모든 사람들의 집단에게도 통용되는 말이야. 사람들의 집단은 위기 상황에서 자신의 일부를 죽일 수밖에 없어. 다른 모든 구성원들을 살리기 위해 죽어야 하는 이 개인은 놀랍게도 모욕과 혐오, 심지어 폭력의 대상이 되지. 왜 그런가 하면, 집단의 구성원들이 위기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서로 공격하기 시작하면 그 집단이 와해되기 때문이야. 그래서 그들은 서로 공격하는 대신 만장일치하에 한 명을 공격하지. 이것을 희생양이라고 부르지. 다시 나무로 돌아가볼까. 겨울이 왔을 때 뿌리와 줄기와 가지와 잎이 서로 공격한다면 나무는 죽고 말 거야. 그래서 뿌리와 줄기와 가지는 만장일치하에 잎을 공격해서 떨어뜨리는 거야. 잎의 희생으로 나무는 살아 남게 되지. 사람들의 집단도 마찬가지야. 희생양이 죽었을 때 집단의 다른 구성원들은 더 이상 서로에 대해 공포와 증오를 가지지 않아. 그 공포와 증오는 희생양이 죽었을 때 같이 죽었으니까.”
(눈물을 마시는 새, 2권 558쪽. 강조는 인용자.)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 사실상 거의 처음으로 등장하는 철학적인 논변인 위의 대사는, 기본적으로는 '왕'에 대해 설명하는 한 과정이지만, 또한 그 자체로 사회의 설립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작품에 '인간'과는 다른 종족 - 예컨대 나가 - 의 사회가 등장한다는 것을 염두에 둘 때 우리는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위기'에 대응하고 사회를 형성하였는지를 탐구함으로써 작품에 대한 이해를 제고할 수 있습니다.


위기: 홉스의 '명예심'

무정부 상태의 사람들이 서로 증오하고 갈등하여 '전쟁 상태'에 빠지게 된다고 주장한 대표적인 학자는 홉스(Thomas Hobbes)입니다. 그에 따르면 사람들 개개인의 육체적 능력에는 '압도적인' 차이가 없으며 누구나 타인을 죽이거나 제압할 수 있습니다.[1] 또 사람들의 지적 능력 역시 대동소이하므로, 사람들은 서로 비슷한 목표를 기대하고 희망하게 됩니다.[2] 그리고 이러한 지적 능력의 유사성으로 인해 사람들은 보통 타인을 자신보다 낮게 평가하면서도 자신은 타인으로부터 높이 평가받고 싶어하는데, 이러한 감정을 '명예심(공명심)'이라고 합니다.[3]

그런데 홉스에 따르면, 명예심은 타인과의 비교에 의한 우월감인 탓에 타인과의 공유가 원리상 불가능합니다.[4]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재화가 풍족할 때조차 명예를 위해서는 타인과 경쟁하게 됩니다. 또한 이 욕망이 과할 경우 사람들은 자신의 우월성을 과시하거나 남으로부터 높이 평가받기 위해 타인을 공격하는데,[5] 이러한 사람은 언제든 소수나마 존재합니다.[6] 그리고 이렇게 일단 폭력이 발생하고 나면, 다른 사람들 역시 서로 불신하며 스스로의 방어를 위해 선제공격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7] 육체적 능력이 서로 유사하다면 선제공격을 하는 쪽이 싸움에서 유리하기 때문이죠.

따라서 사람들은 명예심의 존재로 인해 언제든 상호 공격의 위기에 빠질 수 있는 것입니다.


위기: 스피노자의 '야심'

한편 '감정모방'이라는 개념을 통해 상호 공격의 가능성을 제시한 학자도 있는데, 바로 스피노자(Baruch Spinoza)입니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우리와 유사한 것'이 어떤 감정을 느낀다고 상상할 때 그것만으로도(ipsofacto) 그와 동일한 감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8] 즉 사람들은 타인이 기뻐하는 것을 보면 같이 기뻐하고, 슬퍼하는 것을 보면 함께 슬퍼하게 됩니다.[9] 그런데 만일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타인이 싫어하거나, 우리가 싫어하는 것을 타인은 좋아한다면, 우리는 좋아해야 할지 싫어해야 할지 혼란스러워하며 '영혼의 동요'를 겪고 말 것입니다.[10]

이 때문에 스피노자는 '각자는 본성상 남들이 자기 기질에 따라 살아가기를 바란다'(『윤리학』 3부, 정리 31의 주석)라고 말하면서, 이 욕망이 곧 '야심(ambitio)'이라고 지적합니다.[11] 사람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이나 미워하는 것을 남들이 인정하도록 강요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죠.[12] 문제는 사람들의 정서나 호오는 저마다 기질상 상이하며, 우연에 의해 유발되기도 하고, 심지어 한 개인 안에서도 때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점입니다.[13]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이 서로에게 각자의 기질(ingenium)을 받아들일 것을 강요하게 되면, 개인들은 상호 갈등과 불화에 빠지고 말겠지요.[14]

따라서 사람들은 '남들로부터 높이 평가받으려는 욕망(명예심)'과 함께 '남들에게 자기 기질을 강요하려는 욕망(야심)' 또한 가지고 있으며, 이들로 인해 상호 공격의 위기에 빠지게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위기: 지라르와 '시기심'

그런데 이뿐만이 아닙니다. 다시 스피노자에 따르면, '감정모방'으로 인해 사람들은 남이 무언가를 향유한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그것을 욕망하게 됩니다.[15]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자신이 욕망하는 것을 타인 역시 욕망한다고 상상할 때 보다 강한 욕망을 가집니다.[16] 즉 타인의 인정이 우리의 감정을 강화시킨다는 것이죠.[17] 그러나 일단 타인의 욕망을 모방하고 나면, 우리는 '그가 이 동일한 사물을 향유한다는 사실이 이 기쁨에 장애가 된다고 상상'합니다(『윤리학』 3부, 정리 32의 증명).

이렇게 하여 사람들은 이율배반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어떤 대상에 대한 욕망을 모방하거나 강화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것에 대한 타인의 욕망이 전제되어야 하지만, 우리는 대상에 대한 자신의 독점적 향유를 이미 상상하며, 그래서 타인 또한 대상을 독점적으로 향유하고자 할 것이라고 상상하므로, 이제는 타인이 그 대상을 욕망하지 않기를 바라게 됩니다.[18] 이것은 '우리 연인의 장점을 소리 높여 자랑하면서도 타인이 이 말을 그대로 믿어 우리의 경쟁자가 되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것'과도 같지요(『윤리학』 3부, 정리 31의 따름 정리). 스피노자는 이러한 정서를 '시기심'이라고 부릅니다.[19]

그리고 이러한 태도가 상호 공격의 위기를 발생시킨다고 이야기한 학자가 있으니, 바로 지라르(René Girard)입니다. 그의 '모방이론'에서 주체가 중개자를 모방함으로써 욕망을 추구한다는 것,[20] 그리고 주체가 중개자와 경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중개자를 더욱 모방하게 된다는 것[21]은 스피노자가 앞서 지적한 바와 유사하기도 하지요. 다만 지라르는 여기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이러한 '욕망의 경쟁 관계'가 점차 가열되면서 주변으로도 급속히 전파되는 속성이 있다고 말합니다.[22] 그래서 집단 전체가 '모방의 회오리'에 휩싸여 상호 모방과 갈등에 빠지게 되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폭력의 위기가 닥치게 된다는 것이죠.[23]

이때 공동체에 닥친 사회·문화적 위기는 곧 '전면적인 무차별화'의 위기입니다.[24] 구성원들 간의 모방 경쟁이 극에 달해 그들 간의 차이가 소멸해 버린다면, 사람들은 서로 닮았다는 이유만으로도 상대에게 폭력을 행사할 것이기 때문이지요.[25] 다른 공동체 구성원들과 '제대로 차이가 나지 않는', 다시 말해 그 공동체의 '차이 체계'를 교란하고 무너뜨릴 위험이 있는 소수자들이 곧잘 희생양으로 지목당하는 것 역시 그들이 지닌 '무차별화'의 징후에서 연유합니다.[26] 결국 지라르에게 있어 상호 모방으로 인한 차이의 소멸은 폭력 사태를 야기하며, 공동체를 붕괴시킬 위험을 담지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명예심'으로 인해 남을 이기려 하고, '야심'으로 인해 남을 강제하려 하며, '시기심'으로 인해 남을 모방하면서도 증오하게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정서들은 집단 전체에 상호 공격의 위기를 불러옵니다. 『눈마새』에서는 이것이 '피를 마시는 새'라는 우화를 통해 표상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요.

그렇다면, 나가들은 어떻게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고 폭력을 억제하며 공동체를 유지해 온 것일까요?


대책: 루소의 '숲'

그리고 너희 나가들의 경우도 레콘만큼이나 인상적인 극단이지. 너희들은 너희들 중의 일부를 죽이는 대신 모든 구성원이 한번씩 죽음을 경험하지.
(눈물을 마시는 새, 2권 558-559쪽. 강조는 인용자.)

나가들이 집단을 유지하는 방식에 대해 케이건이 남긴 설명은 사뭇 단출합니다. '모든 구성원이 한번씩 죽음을 경험한다'는 것이 사실상 전부인데, 심장 적출을 비유한 표현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심장 적출은 어떻게 나가 사회에서 상호 공격의 위기를 저지하는 것일까요.

우선 주목할 만한 것은 심장 적출이 나가들에게 선사하는 준-불사성입니다. 예컨대 심장을 적출한 나가를 죽이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므로, 개인 상호간의 두려움과 선제 공격 의지는 상당 부분 감소할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습니다.

“잡아먹을 정도로 증오한다고 해서 잡아먹는다면, 그걸 가리켜 언행일치라고 말하기보다는 정신 착란이라고 말할 것 같습니다만?”
“글쎄. 이유가 있긴 해. 자네도 알 테지만 심장이 없는 나가는 죽이기가 여간 어렵지 않잖아.
(눈물을 마시는 새, 1권 47쪽. 강조는 인용자.)

‘화리트와 달리 카린돌에겐 심장이 없으니까. 전설 속의 나가 살육자처럼 꽁꽁 얼려서 깨어버리는 방법이 아니라면, 도대체 어떻게 죽이지?
비아스는 침묵했다. 그러나 그 침묵은 길지 않았고, 잠시 후 그녀는 자신의 내부를 향해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심장이 없는 나가를 어떻게 죽이지?
(눈물을 마시는 새, 1권 259쪽. 강조는 인용자.)

심장이 없는 생물을 죽이기 위해 동원되어야 하는 수단이 초현실적인 것이어야 함은 분명하다.
(눈물을 마시는 새, 3권 66쪽. 강조는 인용자.)

또한 나가들은 '심장을 뽑은' 뒤에는 자신의 힘만으로도 먹고살 수 있게 됩니다(혹은 대부분의 나가들이 그렇게 생각합니다).

륜은 어차피 살 수가 없어. 심장을 가진 나가가 키보렌에서 어떻게 살아간단 니름이야?
(눈물을 마시는 새, 1권 176쪽. 강조는 인용자.)

‘키보렌에서 나가가 굶어죽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지만, 사냥에 충분히 능숙해지기 전까지는 그런 황당하고 수치스럽기까지 한 사망의 가능성도 있다. 심장을 뽑은 나가는 사고로 죽지는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고 언제나 과감하게 행동하라.
(눈물을 마시는 새, 1권 132쪽. 강조는 인용자.)

키보렌은 나가에 의해 조성된 나가를 위한 땅이며, 난생 처음 야외로 나온 나가조차도 키보렌에서는 충분히 살아갈 수 있었다.
(눈물을 마시는 새, 1권 205쪽. 강조는 인용자.)

게다가 심장 적출이 부여하는 강력한 재생력은 질병에 대한 저항력까지 포함하므로, 나가들은 건강상의 문제로 타인의 도움을 구할 필요도 거의 없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심장을 뽑아낸 나가는 사고로는 죽지 않는다. 질병에도 걸리지 않으며 몸의 일부가 잘려도 빠르게 재생한다.
(눈물을 마시는 새, 1권 137쪽. 강조는 인용자.)

이렇게 보았을 때 키보렌은 루소​(Jean-Jacques Rousseau)​가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제시한 '숲'에 해당하는, '자연인의 모든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공간이 될 수 있습니다. '숲'에서 자연인들은 열매로 배를 채우고 시냇물로 목을 축이는 등 자연이 제공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삶을 영위하며,[27] 타인과의 교류는 심지어 모자관계조차 극도로 축소됩니다.[28] 게다가 이들은 '문명인'보다 신체적으로 강인하여 질병과 같은 건강상의 위협도 거의 받지 않지요.[29] 그리고 루소는 자연인이 공격적인 존재가 아니며, 자신과 타인 모두에게 선하고 평화로운 태도를 가질 것이라고 보았습니다.[30]

그렇다면 나가들이 '모든 구성원이 한번씩 죽음을 경험'한 대가로 자급자족 능력을 획득하여, 루소의 '숲'과 같은 키보렌에서 선량하고 고립된 개인들로 살아갈 경우, '피를 마시는 새'의 면모는 출현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심장 적출의 '준-불사성'에서 착안되는 위기 해소의 방책입니다.


대책: 스피노자의 '이성'

다만, 나가들은 루소의 '자연인'과 달리 이미 문명을 이룩한 종족이라는 것은 간과하기 어렵습니다. 나가 사회의 주류는 엄연히 도시에 거주하는 나가들이며, 그들은 모두 타인과 폭넓게 교류하며 삶을 살아가지요. 이것을 고려한다면 준-불사성만으로는 명예심과 야심과 시기심에 의한 상호 공격을 억제하기에 불충분할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준-불사성'뿐 아니라 심장 적출의 다른 효과에도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사실 케이건은 흥미로운 언급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른바 '심장이 없으면 진심도 없다'는 재담인데요.

“네 아버지는 진심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심장이 없는 나가가 진심이라고 말하는 것은 우습다는 것이 요스비의 설명이었지.”
륜이 당황하여 얼굴을 일그러뜨렸을 때 케이건은 덧붙이듯 말했다.
“하지만 심장을 가진 네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어색할 것이 없는 것 같군.”
(눈물을 마시는 새, 1권 255쪽. 강조는 인용자.)

이것은 일견 말장난처럼 보이지만, '나가는 이성적'이라는 인식과 결부지어 보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습니다. 심장을 적출한 나가들은 어째서인지 '이성'을 유독 숭상하는 모습을 보이며, '비이성적'인 - 즉, 감정적인 - 태도를 배격합니다.

“너희들이 오기라는 것이 뭔지 알기는 하냐?”
“지기 싫어하는 마음이죠. 그래서 이미 진 다음에도 그것을 깨달을 수 없도록 눈을 가려버리는 감정이지요. 결국 그게 더 크게 지게 되는 일이라는 것도 모르게 되죠. 지성인이라면 그런 감정 따위를 자신에게 허락할 필요가 없어요.
“정말이지 피가 차가운 짐승들하곤 이야기를 못 하겠군.”
주퀘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눈물을 마시는 새, 2권 125쪽. 강조는 인용자.)

하지만 나가는 현실주의자이며 비이성적 태도를 거부한다. 심장 적출에 의해 획득한 불사의 육체는 다른 자들의 육체보다 훨씬 소중하며,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도 없는 일에 목숨을 걸고 도전하는 레콘과 같은 태도는 현실적인 나가에겐 도저히 불가능하다.
(눈물을 마시는 새, 2권 597-598쪽. 강조는 인용자.)

이것은 '냉혈한이라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보다는, '감정을 느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휘둘리지 않으려 한다'는 쪽에 더 가까운 종족적 성향입니다. 예컨대 나가들은 감정이 분출할 때에도 '이성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놓지 않는 듯 보입니다.

나가들은 거의 울지 않는다. 패배에 서러워하며 우는 나가의 모습이란 비현실적이다.
(눈물을 마시는 새, 3권 66쪽. 강조는 인용자.)

‘남자들’이라는 말을 들은 순간 비아스는 다른 말들을 모두 잊어버렸다. 비아스는 애써 관심 없는 듯이 닐렀다.
〈몇 명입니까?〉
“다섯 명입니다. 유사시에 스바치를 제압할 정도의 인원이어야 하니까요.”
기쁨에 몸이 떨릴 정도였지만 비아스는 냉철한 이성을 잃지 않았다.
(눈물을 마시는 새, 1권 563쪽. 강조는 인용자.)

이처럼 '냉철한' 이성중심주의적 태도는 부분적으로는 '피가 차갑다'는 특성에서, 또 어느 정도는 불사성이 주는 심리적인 안정감에서 기인할 것입니다. 어떻게 보든 이러한 면모가 '모든 구성원이 한번씩 죽음을 경험한다'는 나가의 습속과 관련이 있는 것은 분명한데, 이렇게 '감정에 대한 이성의 지도'를 중시하는 나가 사회의 분위기는 흥미롭게도 스피노자의 주장과 맞닿아 있습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우리는 어떤 정서의 원인에 대해 명석판명하게 이해할 때 '능동적'이며, 그렇지 못하고 원인에 대해 부분적으로만 파악할 때 '수동적'입니다.[31] 다시 말해 수동과 능동은 정서 자체의 차이가 아니라, 정서에 대한 인식 수준의 차이인 것입니다.[32] 그리고 사람들은 '수동적' 상태일 때 감정에 쉽게 종속되므로,[33] 명예심이나 야심이나 시기심에 의해 상호 공격의 위기가 발생할 가능성도 커집니다.

그리고 스피노자는 수동적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성'의 인도에 따라야 한다고 말합니다.[34] 왜냐하면 이성을 통해 어떤 정서의 참된 원인을 점차 파악해 갈수록, 사람들은 그 정서에 대해 점점 더 능동적으로 변화하기 때문입니다.[35] 그리고 능동적 상태에서 우리는 그 정서를 약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이해하고 그러한 환경을 조성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정서들을 제어해 나갈 수 있게 됩니다.[36] 예컨대 우리는 '이성의 명령에 따르는' 올바른 생활규칙을 정립함으로써 긍정적인 정서를 강화하여 부정적인 정서를 몰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37]

그러므로 이렇게 볼 경우, 감정에 휘둘리는 것을 불명예스럽게 여기는 나가들의 습속은 '냉철하고 이성적인' 나가들이 축적해 온 사회 유지의 방법일 수 있게 됩니다. 


결과: '살균된' 사회

그러나 비록 이러한 관습이 나가들을 상호 공격의 위기로부터 보호해 주는 효과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일체의 감정적인 태도를 배격함으로써 얻어지는 평온이란 (첫 번째 종족의 것과 같은) '완전성'을 담보한다고 하기에는 다소 자기비하적입니다. 그래서인지 나가들이 '비이성'의 선고를 내린 관념들의 범위는 다른 선민 종족들의 그것보다 사뭇 넓으며, 가족 관계의 형성이나 친구 사이의 우정조차도 (나가들의 관점에서는) '합리적'으로, 혹은 (다른 선민 종족들의 관점에서는) '삭막하게' 다루어지기 일쑤입니다.

〈아버지라는 니름. 취소해. 앞으로 다시는 그런 단어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그런 미신에 사로잡히면 올바른 생각을 할 수 없어.​〉
(눈물을 마시는 새, 1권 119쪽. 강조는 인용자.)

감수성 예민한 얼간이들이 그 행동을 가리켜 고귀한 자비심이나 위대한 희생 정신이라고 환호를 보내었다면 그것은 요스비를 화나게 했을 것이다. 요스비가 왼팔을 자르기로 결정한 것은 지극히 논리적인 관점에서였다. 세 가지 이유에서 그는 그렇게 했다. 그가 오른손잡이였고, 두 다리는 걷기 위해 필요했고, 나가의 팔은 언젠가는 재생된다는 것. 요스비에겐 그것으로 충분했고 그래서 주저없이 왼팔을 잘랐다. 요스비는 그런 사람이었다. 내 팔이 재생된다 하더라도 내가 그럴 수 있을지 의문스럽군.”
(눈물을 마시는 새, 1권 249-250쪽. 강조는 인용자.)

그러므로 이러한 이성중심주의적 태도가 때때로 '도구적 이성'의 중시에 불과해 보인다는 점을 별론으로 두더라도, 나가들의 사회가 구성원 개개인에게 어떤 '희생'을 강요함으로써 유지된다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전제할 때 나가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한번씩 죽음을 경험'한다는 예의 언급은 한층 다의적인 의미를 지니겠지요.

“심장 적출?”
“맞았어. 그래서 너희들에게는 왕이 필요없어. 나무로 친다면 뿌리와 줄기와 가지와 잎뿐만 아니라 심지어 꽃까지도 조금씩 희생하여 겨울에도 꽃이 만발한 나무로 남아 있을 수 있게 된 것과 비슷하지.”
(눈물을 마시는 새, 2권 559쪽. 강조는 인용자.)

다시 말해, 나가들은 '겨울에도 꽃을 피우기 위해 모두가 자신의 일부를 포기하는' 사회를 가지고 있었던 셈입니다.


[1] 윤삼석, 「홉스 자연법 이론에서 신의계약의 문제」, 『철학연구』 56, 2017, 111쪽.
[2] 박종준, 「자연상태는 죄수의 딜레마 상황인가?」, 『철학』 110, 2012, 294쪽.
[3] 권경휘, 「홉스의 자연상태 이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 공공선택이론과 행동경제학의 관점에서」, 『동아법학』 93, 2021, 257쪽.
[4] 김은주, 「홉스의 『리바이어던』에서 명예심(glory)의 지위」, 『철학』 117, 2013, 117-118쪽.
[5] 최영준, 「홉스의 『리바이어던』에서 정념과 정치의 관계 - 현대적 비판과 수정 -」, 『연세 공공거버넌스와 법』 12(1), 2021, 60쪽.
[6] 김은주, 「홉스의 『리바이어던』에서 명예심(glory)의 지위」, 『철학』 117, 2013, 124쪽.
[7] 김은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 스피노자의 감정모방 이론」, 『철학연구회 학술발표논문집』, 2019.6, 34쪽; 김은주, 「홉스의 『리바이어던』에서 명예심(glory)의 지위」, 『철학』 117, 2013, 121쪽.
[8] 김은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 스피노자의 감정모방 이론」, 『철학연구회 학술발표논문집』, 2019.6, 35쪽.
[9] 김상현, 「스피노자의 윤리적 자아와 다중의 공동성에 관한 연구」, 『순천향 인문과학논총』 42(2), 2023, 69.​
[10] 정선우, 「스피노자의 정서 이론에서 사회성과 반사회성」, 『근대철학』 15, 2020, 68쪽.
[11] 김은주, 「스피노자의 감정 모방 원리와 인간 공동체의 코나투스 :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체의 복합성과 코나투스 (2)」, 『현대유럽철학연구』 54, 2019, 130쪽.​​
[12] 김은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 스피노자의 감정모방 이론」, 『철학연구회 학술발표논문집』, 2019.6, 40쪽.
[13] 김은형, 『스피노자의 국가형성론에 대한 검토 : 그의 인간본성론을 중심으로』,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3, 36쪽.
[14] 정선우, 「스피노자의 정서 이론에서 사회성과 반사회성」, 『근대철학』 15, 2020, 69쪽.
[15] 김은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 스피노자의 감정모방 이론」, 『철학연구회 학술발표논문집』, 2019.6, 42쪽.
[16] 김원철, 「“욕망은 인간의 본질 그 자체이다” (cupiditas est ipsa hominis essentia) - 『에티카』 3부 부록을 통해 살펴본 스피노자의 인간학 -」, 『범한철학』 55, 2009, 183쪽.​
[17] 김은형, 『스피노자의 국가형성론에 대한 검토 : 그의 인간본성론을 중심으로』,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3, 35쪽.
[18] 김은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 스피노자의 감정모방 이론」, 『철학연구회 학술발표논문집』, 2019.6, 43쪽.
[19] 김은주, 「스피노자의 감정 모방 원리와 인간 공동체의 코나투스 :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체의 복합성과 코나투스 (2)」, 『현대유럽철학연구』 54, 2019, 134쪽.
[20] 박재영, 「<설국열차>와 르네 지라르: 희생 제의에 대한 담론」, 『문학과 영상』 14(4), 2013, 997쪽.
[21] 박성준, 박치완, 「영화 ≪디스트릭트 9≫에 나타난 폭력의 메커니즘 - 르네 지라르의 『폭력과 성스러움』, 『희생양』을 중심으로」, 『동서철학연구』 81, 2016, 564쪽.
[22] 백형수, 「르네 지라르(René Girard)의 희생양 메커니즘에 관한 연구」, 『종교문화학보』 14, 2017, 110쪽.
[23] 박재영, 「<설국열차>와 르네 지라르: 희생 제의에 대한 담론」, 『문학과 영상』 14(4), 2013, 994쪽.
[24] 오세정, 「폭력의 문화, 희생양의 신화」, 『인문학연구』 15, 2011, 85쪽.
[25] 박성준, 박치완, 「영화 ≪디스트릭트 9≫에 나타난 폭력의 메커니즘 - 르네 지라르의 『폭력과 성스러움』, 『희생양』을 중심으로」, 『동서철학연구』 81, 2016, 564쪽.
[26] 신아현, 「황순원 소설에 나타난 희생양 메커니즘 연구」, 『현대문학이론연구』 69, 2017, 222쪽.
[27] 김계주, 「Les Deux Premiers Discours에 나타난 Rousseau의 자연 사상과 인간 행복의 추구」, 『명지영어영문학』 1, 1996, 72쪽.
[28] 장 자크 루소 저, 이충훈 역, 『인간 불평등 기원론』, 서울: 도서출판 b, 2020, 70쪽.
[29] 김계주, 「Les Deux Premiers Discours에 나타난 Rousseau의 자연 사상과 인간 행복의 추구」, 『명지영어영문학』 1, 1996, 74쪽.
[30] 이충한, 「루소의 자유개념과 도덕교육」, 『초등교육연구논총』 39(4), 2023, 289-290쪽.
[31] 홍영미, 「스피노자철학에서의 정서와 자유의 문제」, 『철학』 89, 2006, 62-63쪽.
[32] 김은형, 『스피노자의 국가형성론에 대한 검토 : 그의 인간본성론을 중심으로』,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3, 39쪽.
[33] 김상현, 「이성의 지도와 욕망: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중심으로」, 『순천향 인문과학논총』, 41(3), 2022, 97쪽.
[34] 정미라, 「스피노자 철학에 있어 자기보존 욕망과 이성」, 『철학논총』, 78, 2014, 546쪽.
[35] 홍영미, 「스피노자철학에서의 정서와 자유의 문제」, 『철학』 89, 2006, 74-75쪽.
[36] 박기순, 「스피노자의 '자유로운 인간' : 데카르트의 이원론에 대한 비판을 중심으로」, 『인문학연구』 41, 2008, 70쪽.
[37] 성회경, 「스피노자의 '깨달음'의 윤리학 : 돈점(頓漸)의 관점에서」, 『철학논총』 92, 2018, 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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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은 불타는 이단옆차기!
  • 간만에 너무나도 즐거운 글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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