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20/07/28 04:12:51
Name   아침커피
Link #1   https://crmn.tistory.com/116
Subject   사랑하는 법
고등학생 때 국어 선생님이 그 달의 필독 도서였던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에 대해 설명하시면서 여기서의 기술은 아트(art)이지 절대로 테크닉이 아니라고 강조하셨던 적이 있었습니다. The Art of Loving이라는 원제에서 영단어 art가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 표현하는 한국어 단어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기술로 번역되었다는 설명과 함께였습니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제 머릿속 한 구석에는 art를 정확히 표현해주는 한국어 단어를 찾고자 하는 욕구가 항상 자리잡고 있게 되었습니다.

첫 후보 단어를 찾아낸 것은 그로부터 약 십 년 정도 후였습니다. 장자에 나오는 포정이 문혜군 앞에서 소를 잡는 이야기가 실마리가 되었습니다. 짧은 이야기 중에서도 앞 부분만 간단히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포정이 문혜군(文惠君)을 위해 소를 잡은 일이 있었다. 그가 소에 손을 대고 어깨를 기울이고, 발로 짓누르고, 무릎을 구부려 칼을 움직이는 동작이 모두 음률에 맞았다. 문혜군은 그 모습을 보고 감탄하여 "어찌하면 기술이 이런 경지에 이를 수가 있느냐?"라고 물었다. 포정은 칼을 놓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가 반기는 것은 '도(道)'입니다. 손끝의 재주 따위보다야 우월합니다. 제가 처음 소를 잡을 때는 소만 보여 손을 댈 수 없었으나, 3년이 지나자 어느새 소의 온 모습은 눈에 띄지 않게 되었습니다. 요즘 저는 정신으로 소를 대하지 눈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눈의 작용이 멎으니 정신의 자연스런 작용만 남습니다. (후략)"

이 이야기를 읽으며 기술이 기술 자체로 궁극의 경지에 다다르는 순간 예술의 문턱을 넘게 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예술의 경지에 오른 기술이 art이지 않을까, 그러면 기술이 예술을 만나는 지점이니 기예(技藝)라고 번역하면 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그렇게 한동안 The Art of Loving을 저 혼자서는 '기예(技藝)로서의 사랑' 정도로 번역하며 몇 년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중 얼마 전에 갑자기 번뜩 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Art를 어떻게 번역할지를 고민할 것이 아니라 영어권 화자들이 동아시아의 어떤 단어를 art로 번역해갔는지를 보면 확실하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이건 정말 제대로다 하는 생각이 들어서 흥분된 마음으로 동아시아 문학 중 영어로 번역된 제목에 art가 들어간 글을 찾기 시작했고, 의외로 매우 쉽게 그런 책을 찾았습니다. 손자병법, The Art of War.

손자병법은 단순히 전쟁 잘 하는 기술을 적어놓은 책이 아니라 전쟁과 평화를 바라보는 관점과 사상을 전달함으로써 독자의 정신을 고양하는 책입니다. 이러한 부류의 글을 한자 문화권에서는 간단하게 법(法)이라고 불렀던 것이고, 손자(孫子)가 쓴 전쟁(兵)에 대한 법(法)을 영어권에서는 The Art of War로 옮겨갔던 것입니다.

그러니 에리히 프롬의 The Art of Loving은 사랑의 기술이니 기예로서의 사랑이니 할 필요 없이 간단명료하게 '사랑하는 법', 아니면 더 줄여서 '사랑법' 이라고 하면 될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거의 20년에 걸친 고민이 드디어 끝이 났습니다.

* Cascade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0-08-11 18:32)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36
  • 방향과 목적에 다르는 서사가 명확한 고민.
  • 오오오..저도 명쾌해졌습니다.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327 문학트라우마는 어떻게 삶을 파고드는가 - 폴 콘티 골든햄스 23/09/14 1534 19
1297 문학82년생 이미상 5 알료사 23/04/29 3136 22
1295 문학과격한 영리함, 「그랜드 피날레」 - 아베 가즈시게 6 심해냉장고 23/04/24 1851 16
1211 문학달의 뒷편으로 간 사람 [마이클 콜린스] 12 사이공 독거 노총각 22/06/08 2806 16
1184 문학[그림책] 누가 진짜 엄마야? 3 늘쩡 22/04/13 2777 12
1111 문학영원한 인쉐옌 永遠的尹雪艷 下 7 celestine 21/08/01 3038 6
1064 문학지난 두달동안 읽은 책들 간단리뷰 5 샨르우르파 21/02/28 4513 22
1058 문학오늘부터 5월까지 덕수궁미술관에서는 20 순수한글닉 21/02/04 4211 24
1012 문학토마 피케티 - 자본과 이데올로기 리뷰(아이티 혁명을 중심으로) 9 에피타 20/10/03 4439 21
991 문학사랑하는 법 26 아침커피 20/07/28 4788 36
923 문학일독김용(一讀金庸): 김용 전집 리뷰 40 기아트윈스 20/02/16 6926 27
884 문학셜록 홈즈에 대한 책을 냈습니다. 앞으로 더 낼 것 같고요. 61 트린 19/11/08 6844 61
877 문학[자랑글] 구글독스 기반 독서관리 시트를 만들었읍니다 7 환경스페셜 19/10/20 5231 15
873 문학홍차넷 유저들의 도서 추천 22 안유진 19/10/07 7067 26
801 문학고속도로로서의 템즈강: 18세기 템즈강 상류지역의 운항과 수송에 관한 연구 34 기아트윈스 19/05/11 5729 16
799 문학[단편] 어느 게임 마니아의 일상생활 18 트린 19/04/29 6371 14
792 문학제2회 한국과학문학상 수상작품집 9 임아란 19/04/13 5587 12
774 문학번역본에는 문체라는 개념을 쓰면 안되는가 19 알료사 19/03/01 5777 8
761 문학서평 -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 김영하 3 메아리 19/01/13 5418 11
723 문학추위를 싫어한 펭귄 줄거리입니다. 23 로즈니스 18/11/07 5498 16
708 문학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_ 조지 오웰 8 nickyo 18/10/01 6154 11
702 문학[서평] 세대 게임 - 전상진, 2018 3 化神 18/09/17 5437 10
688 문학책 읽기의 장점 2 化神 18/08/27 6926 13
686 문학시집 책갈피 10 새벽유성 18/08/20 5528 16
660 문학왜 일본 만화 속 학교엔 특활부 이야기만 가득한가 - 토마스 라마르 31 기아트윈스 18/07/09 7322 30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