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24/08/02 10:07:37수정됨
Name   집에 가는 제로스
Subject   머리에 새똥을 맞아가지고.
어제는 출근하다가 머리에 새똥을 맞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참 행복하다는 사실을 알았죠.

어제 아내는 휴가를 내고 아들과 함께 미술관에 가려고 했었습니다.

저는 쌓인 일이 좀 있어서 휴가를 안내고 그냥 출근하려고 했죠.

그런데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윗층 할머니가 재활용쓰레기가
너무 무거운데 좀 내려줄 수 있겠냐고 부탁하셨고 약간 늦게 나와서
간당간당한 출근길이어서 내심은 그리 내키지 않았지만 네 뭐..하고
쓰레기를 내려주고 (무겁네) 기분전환할겸 지하철로 가는 경로를
평소랑 다르게 저 나무 많은 뒷길로 갈까? 하고 오래된 아파트 단지의
울창한 숲길에 들어선 순간.

투두둑.

무언가 머리와 왼쪽 손등에 떨어진 겁니다.

그래서 왼쪽 손등을 들어보니 어뭐 이게 뭐야 제기랄

왼손을 세차게 휘둘러 떨어뜨리고나니
손을 머리에 가져다 댈 엄두가 안나더군요.

그 와중에도 새똥치고는 묽지 않고 덩어리졌네 라는 생각도 잠시

이렇게 된거 오전 째자. 무사한 오른손으로 오늘 오전 반차낸다고
회사에 문자보내고 집으로 돌아가니 아내가 ? 왜 돌아와? 지갑두고갔어?

아니 새똥맞았어

뭐-! 아빠도? ㅋㅋㅋㅋㅋ (딸이 집근처에서 새똥맞은 적 있음)
아니 어떻게 그런 일이 두번 생겨? (두번 일어난 일은 세번도 일어난다..)

아무튼.. 나 등에 새똥 안묻었어?
등에는 없는데?
그럼 그냥 벗어도 되겠네 (바닥에 벗어던져도 새똥묻히지 않는다는 뜻)
나 그냥 오전에 안가려고 같이 가자 씻고 나올게

그렇게 샤워하고 아들과 아내와 나와서
전시회 보고 바로 그 앞에 있는 전시회기념 인생네컷(?)찍고
맛있는 점심먹고 바이바이하고 출근했습니다.

그런데 간만에 소설(웹소설이지만)읽다 보니까 문득 이 에피소드가
지금 내가 굉장히 행복하구나 라는 실감을 주는 에피소드라는 생각이 든거에요.

만약에 내가 혼자살고 출근길에 급하고 중요미팅 있어서 풀메컵하고 급히 나가던 신참 영업사원이었다면
머리에 새똥을 맞는다는 세상 누구의 잘못도 아니면서
왠지 이 사실같지 않은 변명같기도 한 이 해프닝에서
반차를 낼 수 없는 상황이거나 지각에 대해 허리와 자존심을
구부려야 하는 그런 입장이었다면
뭔가 울음이 터지고 머리에 새똥 닦으러 들어가면서
엉엉 서럽게 울어버리면서 무너지는 주인공의 장면을
연출할 장치가 될 수도 있는 해프닝이겠다

같은 생각을 한거에요.

결국 머리에 새똥을 맞은 일로
누가 내 머리에 똥 쌌어? 같은 드립을 칠 수 있는건
이 해프닝이 저를 크게 곤란하게 만들지 않는 처지에 있기 때문이죠.

사건 자체의 내용이 중요한게 아니라 이 사건의 처리에
관한 통제력이 나에게 있는가 없는가

그게 피식 웃고 까마귀인가 까치인가 요새 많이 보인 물까치인가
별일이 다있네 하고 생각할 여유가 있는지

세상이 날 억까하네 시부럴 하게 될 것인지를 가를거란 말이죠.

그래서 어제는 아 지금 내가 참 행복하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머리에 새똥을 맞아가지고.

* Cascade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4-08-13 08:03)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35
  • 내가 더 행복하게 해줄게 (오태식ver.)
  • 아재로스
  • 러... 럭키비키?!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183 일상/생각농촌생활) 3월 중순 - 4월 초 18 천하대장군 22/04/08 3577 22
1179 일상/생각농촌생활) 봄봄봄 봄이왔습니다 22 천하대장군 22/03/21 3682 29
1175 일상/생각농촌생활)봄에는 굼벵이도 석 자씩 뛴다 16 천하대장군 22/03/07 3759 23
129 일상/생각늦깎이 사이버대학생의 마지막 시험. 22 천무덕 15/12/13 5999 4
622 기타나는 비 오는 아침의 엄마 12 짹짹 18/04/23 5695 42
1405 일상/생각머리에 새똥을 맞아가지고. 12 집에 가는 제로스 24/08/02 1596 35
1195 정치/사회검경수사권 조정- 국가수사총량은 얼마나 증발하였나 36 집에 가는 제로스 22/05/02 5006 44
1185 기타왜 범행일이 아니라 판결일로 집행유예 처벌이 달라져요? 6 집에 가는 제로스 22/04/15 3946 26
960 일상/생각웃음이 나오는 맛 13 지옥길은친절만땅 20/05/17 4561 11
736 기타이야기의 마무리 44 지금여기 18/11/27 6419 50
168 창작[SF단편] 펭귄 밀크 11 중년의 럴커 16/03/11 7104 5
362 일상/생각엄마. 16 줄리엣 17/02/09 5263 27
215 경제베어링스 은행 파산사건과 금융에 관한 이야기. 11 줄리 16/06/10 9496 23
1071 정치/사회우간다의 동성애에 대한 인식과 난민사유, 그리고 알려는 노력. 19 주식하는 제로스 21/03/17 5252 32
1061 정치/사회일용근로자 월가동일수 기준 축소에 반대한다 7 주식하는 제로스 21/02/16 4831 19
1240 체육/스포츠북한산 의상능선 간략소개 9 주식못하는옴닉 22/09/25 4095 16
817 과학0.999...=1? 26 주문파괴자 19/06/14 6744 19
775 과학수학적 엄밀함에 대한 잡설 29 주문파괴자 19/03/05 9202 18
667 여행서울 호우캉스 호텔 결정 로직 43 졸려졸려 18/07/25 7736 15
225 요리/음식아빠요리 만들기 - 스테이크를 맛있게 굽기 위해 필요한 도구 24 졸려졸려 16/06/29 7532 5
263 게임[삼국지 영걸전] 1599 클리어 기념 팁 + 후기와 기타 등등 이야기 37 조홍 16/09/09 14594 8
37 게임독수리의 눈으로 입문자를 노리는 HOMM3 소개 (1) 기초 14 조홍 15/06/22 19219 0
1170 정치/사회러시아와 우크라이나, 3개월의 기록들 4 조기 22/02/25 3765 14
824 일상/생각20년전 운동권의 추억 36 제로스 19/06/27 7067 23
760 정치/사회국가유공자등록거부처분취소 소송의 경험 3 제로스 19/01/18 5508 19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