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16/11/08 20:17:18
Name   기아트윈스
Subject   시국 단상: 박대통령과 골룸
1.

유학와서 놀랐던 것 중 하나는 공부에 대한 영국 학생들의 태도가 저와 사뭇 다르다는 거였어요. 전 그저 좋은 학교로, 더 높은 단계로 가기 위해 아득바득 기어올라가고 있는데 얘들은 그 옆에서 팔자 좋게 [...란 무엇일까] 같은 열라 추상적이고 학구적인 문제의식을 하나씩 품고 해답을 얻기 위해 책을 뒤지고 있더라구요. 연구능력 자체는 빡세게 굴러온 제가 좀 더 높을지 모르지만 태도만 놓고 보면 그들은 도인이요 저는 속물 같았어요.

연구를 통한 진리탐구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 그저 위로 올라가는 게 목표였기에, 저는 한 단계가 끝나면 풀썩 주저앉아 버리고 말아요. 일단 올라가고 나면 목표를 달성했다는 느낌에 맥이 탁 풀려버리거든요.

이러한 태도를 압축해서 표현하자면 목적/수단의 전도상태라고 할 수 있어요. 학위를 얻는 건 진리탐구를 위한 수단일 뿐이어야하는데, 역으로 학위를 목표로 진리탐구를 수단삼고 있는 셈이니 이거 단단히 잘못된 거예요.



2.

박대통령에게서도 비슷한 모습을 볼 수 있어요. 대통령이 되어서 이러이러한 저러저러한 걸 하겠다라는 목적의식이 없거나, 혹은 희박해요. "대통령이 되고야 말겠다"라는 그 일념이 굉장했던 것과 좋은 대조를 이루지요. 어떤 걸인의 "은전 한 닢" 같달까요. 골룸의 "절대반지" 같달까요. 그걸 얻는 게 중요할 뿐 얻고 나서 그걸로 뭘 어떻게 할 지에 대해선 깜깜한 거예요.

목적과 수단이 도치된 이들이 이렇게 목적화된 수단(당선/학위취득)을 달성해버리면, 제가 그랬 듯, 일종의 공황 상태에 빠져요. 대통령 당선/학위 취득 등을 정점으로 대단원의 막이 내려가고 극이 끝나야 하는데, 다시 막이 올라가더니 액트 5(Act 5)가 시작되버린 거예요. 배우 입장에선 속이 콱 막히지요. "액트4로 끝나는 거 아니었어? 이거 왜이래? 대본도 본 적 없는데 갑자기 5장을 하라고?"

우리가 동화 속의 "...그래서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이후를 상상하지도 않고, 상상하기도 어렵 듯, 박대통령은 대통령이 된 후의 삶이 암전 속에서 여기저기 손으로 더듬는 것처럼 답답했을 거예요. 마치 엔딩을 봤는데도 끝나야할 게임이 끝나지 않아서 캐릭터를 이리저리 움직여보고 점프도 해보고 칼질도 해보며 방황하는 게이머들처럼요.



3.

대본도 대사도 없는 즉흥극을 해야하는 주연 배우는 심박수가 빨라지고 동공이 커져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데 사람들은 모두 자기만 쳐다보고 있으니까요. 이런 배우에게 무대 앞에서 누군가가 스케치북으로 대사 비스끄무레한 걸 적어서 들어보여주면 숙고할 여지 없이 읽어버리게 마련이지요. 대사 없이 닥치고 서있는 것보단, 정체 불명의 누군가가 적어준 뭐라도 읽는 게 마음이 훨씬 편하거든요. 하물며 그 사람이 정체 불명의 괴인이 아니라 자신의 평생 지기(知己)일 경우에야!

마찬가지로 이런 상황에서 다른 배우가 무대 위로 올라와서 즉흥적으로 상황을 만들고 대사를 치고 플롯을 이끌어가면 또 얼마나 고맙겠어요. 자신이 하이라이트를 독점하고 있을 때보다 누군가가 그 하이라이트를 조금이라도 가져갔을 때, 설령 그게 결과적으로 주연 고유의 권한을 빼앗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고 할지라도, 조금 더 안도하게 될 거예요.

박대통령은 대통령 당선으로 인해 생긴 거대한 권력을 어떻게 써야겠다는 이념도 계획도 희박했기 때문에, 옆에서 이 권력을 다른 누군가가 이렇게 저렇게 대신 써주는 상황에 안도했던 걸지도 몰라요. 자기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옆에서 우병우가, 최순실이, 정호성이, 안종범이, 안봉근이, 이재만이 슥삭슥삭 능숙하게 권력을 행사해주니 얼마나 갸륵했겠어요. 충신이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4.

이런 식으로 생각의 타래를 이어가다보니 초점이 다시 제 자신에게로 돌아오네요. 목적과 수단의 꼬인 관계를 풀지 않으면 학위과정을 제대로 마치기 어려울 테니, 저로서는 어떻게든 이 관계를 풀어야 해요. 이럴 때 가장 요긴한 건 역시 스스로에게 솔직해지는 거예요.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였는지를 계속해서 자문함으로써 마음 속 껍질 깊숙히 포장되어있는 속내를 찾아내야 해요. 그렇게 찾아낸 골룸 같은 속내를 대명천지에 꺼내 놓고, 그 속물됨을 인정하고, 용서하고, 마지막으로 꼭 껴안고 화해할 때라야 지금의 교착 상태를 돌파할 동력을 얻을 수 있을 거예요. 프로도가 골룸을 용서했던 것처럼요.

표면화된 의지표명부터 이면의 숨은 동기까지 고속도로를 놓아 투명하게 표리를 일치시키는 것, 그 일관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을 주희(朱熹, 1130-1200)는 성의(誠意: 의도를 참되이 하다/참된 의도)라고 했어요. 어려워 보이지요? 이거 쉽지 않아요. 아픈 자기반성은 물론 그 반성의 결과물을 남에게 보여줄 용기도 필요해요. 박대통령이 성의(誠意)껏 입장표명을 할 용기가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고, 그저 저라도 잘 해야겠다고 다짐할 뿐이에요.


* 수박이두통에게보린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6-11-21 00:06)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10
  • 추우처언


레지엔
가치전도 현상이 발생하는 가장 큰 요인은 실물 레벨에서의 압박이 가시적일 때라고 하죠...
기아트윈스
좋은 포인트예요. 누가 농담으로 철학사를 정리하길,

BCE 300 - 어떻게 운동이 가능한가?
800 - 어떻게 신은 전지(全知)한가?
1600 - 어떻게 우리는 무언가를 알 수 있는가?
2016 - 어떻게 펀딩을 받지?
April_fool
하지만 인간의 현실은… 적어도 겉으로 드러나는 일관성이라도 유지하는 것조차 얼마나 힘든가요.
기아트윈스
강한 의지와 심력이 필요해요. 그쵸.
Ben사랑
"그러니까 제가 대통령 되겠다는 것 아니겠어요"
일단 대통령 되고나서 뭘 생각해보겠다는.. 참으로 유치원생이나 할 법한 생각이었죠.
기아트윈스
이제사 다시 생각해보면 그 발언 자체가 수단/목적의 전도를 잘 보여주는 증언이 아닌가 싶어요. 수준의 고저를 떠나서 "되겠다는..."에서 벌써 근본적으로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게 느껴져요.
추천합니다
기아트윈스
황송합니다
매일이수수께끼상자
대학 입시 자체가 목표였고...
그래서 입학 하자마자 모든 목적을 잃고.... F 학점과 전과만 가득했던 20대가 생각나는 글이군요.
아파서 추우처언.ㅜㅜ
기아트윈스
그 기분 압니다 ㅜㅜ
추게로 왔네요. /ㅁ/
2번을 생각하면서 연산군이랑 참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절대권력을 잡아가는 모습은 긍정적인 부분도 분명 있었는데, 그걸 가지고 한 건 부어라 마셔라 -_-...
가족 일로 동정받는다는 것도 같고. 연산군은 후세인들이 하는 거긴 하지만요. 선조와 인조는 그리도 까이면서 연산군은 오히려 감성적으로 동정받기도 하는 모습이 이해 가면서도 이상합니다.
... 이걸로 (+광해군) 글 써볼까 했는데 연산군은 지 의지로 하기라도 했지 그보다 더 심해서 접었습죠
기아트윈스
부모의 비극적 죽음이라는 소재가 한국정계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해주지요. 정치문화? 정치감성? 그런 건 그 때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는가봅니다.
로오서
이런 좋은글을 못보다가 추게로 와서야 보게 되다니!
맨날 탐라만 쓱 보는 자신을 반성하게 되는군요 핫핫

어디까지 잘살고, 어디까지 안전해야 역구조를 바꿀 수 있을까요.
물론 언제 어디를 가나 대다수든 극소수든 목적과 수단의 전도는 존재할것 같지만 말이죠..
기아트윈스
여기도 문화팩터가 작용하는 것 같아요. 목/수 스와핑이 궁극적으론 나쁘지만 단기적으론 에너지 부스터가 되잖아요? 그래서 언제 어디서 이 스와핑을 어떤 규모로 발생시킬 것인가에 대해 사회 전반의 암묵적 합의? 중위값? 같은 게 있지 않을까 싶어요. 한국은 좀 심한 편 같구요.
2막4장
참 글잘쓰세요. 이해하기 쉽게 쏙쏙

박통 심리야 본인이 제일 잘알겠지만, 자신앞에 놓인 그 거대한 산을 넘을 수 있을지 궁금하네요.
조만간 직접 끝장토론 하겠다는 말도 나왔다는데, 여태 잘 안된 그게 마음 한번 먹는다고 될지는 의문입니다.
(참고로 대통령 취임후 제대로 기자회견을 한번도 안했다고 하네요. 즉 기자들의 질문을 받지 않았다는...)
기아트윈스
칭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304 정치/사회신칸센, 세계최초의 고속철도 - 소고 신지와 엘리트 네트워크 4 커피최고 16/11/17 7493 5
303 역사러일전쟁 - 그대여 죽지 말아라 4 눈시 16/11/17 6160 9
302 기타서원철폐 21 피아니시모 16/11/16 6139 4
301 일상/생각11월 12일 민중총궐기 집회 후기입니다. 15 nickyo 16/11/13 5962 12
300 의료/건강화병과 우울증 4 모모스 16/11/12 9175 8
299 일상/생각영화 <색, 계> (와 아주 살짝 관련된 이야기) 18 black 16/11/11 6654 19
298 정치/사회시국 단상: 박대통령과 골룸 16 기아트윈스 16/11/08 5374 10
297 IT/컴퓨터신경망 학습의 틀을 깨다, DFA 15 Azurespace 16/11/06 10094 10
296 기타만 4세, 실존적 위기에 봉착하다. 56 기아트윈스 16/10/31 7456 21
295 일상/생각아재의 커피숍 운영기 - Mr.아네모네. 15 tannenbaum 16/10/30 5539 6
294 문화/예술할로윈 시리즈 2편: 서구문화의 죽음을 기리는 풍습 20 elanor 16/10/30 7307 3
293 일상/생각꼬마 절도범 6 tannenbaum 16/10/26 5855 6
292 의료/건강너무 착한 병 17 눈부심 16/10/25 8375 13
291 과학신내림 약물과 무당, 주술가, 버서커 8 모모스 16/10/25 8955 15
290 정치/사회외국인 범죄에 대한 진실과 오해 6 tannenbaum 16/10/24 8481 6
289 창작[한단설] For Sale : Baby shoes, never worn. 8 SCV 16/10/24 6972 11
288 일상/생각골목길을 걷다가 20 마르코폴로 16/10/21 7364 5
287 기타당연한 육아는 없답니다 16 밀크티티 16/10/20 6960 22
286 역사클로비스 화살촉과 발사무기 8 모모스 16/10/20 8744 8
285 문학문학과 문학성 52 팟저 16/10/18 8488 3
284 일상/생각보름달 빵 6 tannenbaum 16/10/14 5277 14
283 일상/생각태어나서 해본 최고의 선물. 81 SCV 16/10/13 10798 34
282 체육/스포츠첫 하프마라톤 후기 31 파란아게하 16/10/12 11192 10
281 꿀팁/강좌셀카기술학 개론 (1) 19 elanor 16/10/12 9291 7
280 일상/생각전직 호주 총리 만난 썰 40 기아트윈스 16/10/12 6885 8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