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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9/09/01 02:01:43수정됨
Name   메존일각
Subject   "향복문(嚮福門) 이름을 바꿔라!" 고려 무신정권기의 웃픈 에피소드
[서론]

고려 명종(1170-1197)은 1170년 8월에 일어난 무신정변 당시 의종을 폐위시킨 무신들에 의해 '세워진' 왕입니다.

아무리 안하무인격으로 날뛰던 무인들이라도 명분이 없는 그들이 직접 옥좌를 거머쥐기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무신정변 자체가 하급 무인들에 의해 주도되었기 때문에 더욱 그런 측면이 있었죠. 때문에 바지사장이 필요했습니다. 명종은 그들의 필요에 의해 옹립된 왕이었고, 명종이 일부러 무신들을 자극하지 않는다면 서로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무신들은 권력을 전횡할 수 있어 좋고(?) 왕은 자리에서 내쳐지지 않으니 좋은(?) 공동운명체라고 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명종은 누가 봐도 처량한 처지인 건 사실이었죠. (명종이 당했던 굴욕만을 따로 모아봐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아무튼 명종은 이의민-정중부-경대승-이의민을 거치는 27년 동안 자리를 지키다가 최충헌에 의해 한 해 뒤(1198년) 강제 폐위 당합니다. 최충헌이 무신정변에 직접 관여한 바 없는 새로운 실력자였기 때문에 정변에 의해 추대된 명종을 굳이 자리에 앉혀둘 필요가 없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명종 10년에 벌어진 한 에피소드를 다룹니다.


[강안전 출입문의 이름을 지어라!]

고려의 법궁 추정 모형

고려의 법궁은 고려조 내내 여러 차례 파괴되어 재건 및 증축이 빈번하게 진행됐습니다. 명종 원년(1171년) 10월 어느 날 궁궐에 불이 났습니다. 한데 당시 집권하던 정중부와 이의방, 이준의 등이 이 틈을 노려 변란이 날까 두려운 나머지 자성문(紫城門)을 굳게 닫고 아무도 들이지 않아 궁궐 전각이 모두 불에 탄 일이 있었습니다.(...) 명종은 꺼이꺼이 울었다고 하고요.

이후 방치되었던 궁궐은 명종 9년(1179년)부터 재건되기 시작하여 명종 12년(1182년)까지 계속됐는데요. 명종 10년(1180년) 11월 어느 날 전각 중 하나인 '강안전(康安殿)'*이 중수(重修, 큰 수리)를 마치고 완공됩니다. 새로운 건물의 출입문에 편액(扁額; 현판)이 달렸을 터인데 그 이름은 '향복문(嚮福門)'이었습니다. '복으로 향하는 문'이라는 무난한 이름으로, 강안전을 복원하며 이름을 새로 지은 것은 아니고 본래의 이름을 되돌렸을 뿐이었습니다.

* 강안전은 본래 편전(便殿; 왕이 주로 정사를 돌보던 곳)이었으나, 정전인 선경전(宣慶殿)과 대관전(大觀殿)이 끝내 복구되지 못함에 따라 강안전은 점차 역대 국왕의 즉위식이나 연등회(煙燈會)이 열리는 곳이 되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당초 경복궁의 사정전(思政殿)의 성격이었으나 근정전(勤政殿)의 역할로 변경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서긍의 <고려도경> 기록에 따른 고려인종 연간의 만월대

한데 이 '향복문'은 당시 상급 무신들의 정치기구이던 '중방(重房)'과 가까웠습니다.(위의 그림 참고) 새 출입문에 달린 편액은 당연히 무신들 눈에도 들어왔을 것이고, 중방에서 이 이름이 화제에 올랐겠지요. 무신들은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향복'이란 이름이 좀 수상쩍지 않소? 항복(降伏)이랑 소리가 비슷하지 않냔 말이오. 못 믿을 문신 놈들이 우리 무신들을 눌러 항복하게 하려고 지은 이름 아니겠소?"

진지하게 이런 소리를 했다는 게 놀라우실 법한데 그 부분은 뒤에서 다시 다루기로 하고 무신들은 명종에게 냉큼 달려가 편액을 바꿔달라 주청하였습니다. 사서에는 '주청(奏請)'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떼를 쓰며 항의했다고 보는 게 맞겠죠.


[이름을 바꾸긴 했는데...]

항의를 들은 왕은 평장사(平章事; 정2품 재상) 민영모(閔令謨)에게 문의 이름을 바꾸라고 명하였고, 민영모는 '영희문(永禧門)'이라는 이름을 지어 올렸습니다. '영희'란 '영원한 복'이니 궁궐 주전의 출입문 이름으로선 적당하다 하겠지요.

한데 새로 바뀐 이름이 무신들 눈에는 미심쩍게 보였던 모양입니다. 무신들은 중방에서 또 이러쿵저러쿵 하였습니다.

"희(禧)는 복(福)이니까 괜찮은데(역주; 뜻이 같습니다), 영(永)이라는 글자의 뜻이 영 꺼림칙하오. 글자에서 길흉을 알 수가 없어요. 능구렁이 같은 문신들이 '영희'란 이름에 무슨 꿍꿍이를 숨겨 놓았는지 짐작조차 못하겠단 말이오."

"그러지 말고 그냥 우리가 이름을 지읍시다! 마침 이 문이 우리 중방(本房)하고 가까우니까 중방의 이름을 따서 중희(重禧)라 하면 어떻겠소? 중방의 복이란 의미로 해석되니 더없이 좋지 않소이까?"

이렇게 "중희"란 이름으로 결정하고 왕에게 주청(이라 쓰고 요구라고 읽는)하니 명종이 이 말에 따랐다는 겁니다. 임금이 머무는 강안전 출입문의 편액에 중방을 높이는 '중희문'이 걸리게 되었다는 거죠. 

문 이름 하나도 마음대로 어떻게 못했던 허수아비 왕의 슬픔이 느껴지십니까?


[고려시대 무관들의 지적 수준]

요즘 말로 '웃픈' 해프닝에 대한 배경을 말씀드릴까 합니다. 이 에피소드는 기본적으로 문관들에 대한 무관들의 열등감의 발로입니다. 무신정변 때 중심이 된 하급 무관들이 문관들을 무차별 살륙하여 정권을 휘어잡기는 했지만, 당시 고위 관직에 있던 무관들은 나라를 끌어가기 위해 문관들의 역할까지 무시할 수는 없었음을 알고 있었으므로, 문관들에게 비교적 온건한 태도로 일정 정도 협조를 구했습니다. 때문에 글을 모르고 무식한 무관들은 문관들이 자기들 몰래 어떤 장난을 쳐놓았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늘 갖고 있던 겁니다.

다들 아시는 이야기겠습니다만 '양반(兩班)'이란 말은 고려와 조선시대 지배층을 일컫던 말입니다. 왕이 남쪽을 보고 앉았을 때를 기준으로 동쪽에는 문관들이, 서쪽에는 무관들이 서게 되었는데 동과 서를 합쳐 양반이라고 불렀지요.

고려시대에는 무인도 분명 지배계급이긴 했지만 문인들과는 차별이 있었습니다. 국가가 점차 안정되고 사회에 유교적 질서가 영향을 미치면서 문인들에 비해 무인들은 하대받게 되었습니다. 단적으로 문인들은 과거를 통해 관료로써 등용되었지만 무인들은 이러한 절차가 없었습니다. 정확히 얘기하면 12세기 초에 잠시 무과가 실시된 적이 있었지만 곧 폐지되었고 간간이 무과를 부활하려는 시도는 있었음에도 별 의미를 갖지 못했습니다.

무신정변에 힘을 보탰음에도 난을 두 번이나 토평하는 공을 세웠고
분수를 알던 군인이었던 점을 사서에서 높게 평가받던 '두경승'
하지만 그도 글자를 모르는 무식쟁이이었다.

고려시대의 무관들은 주로 동네에서 힘 꽤나 썼거나, 무예가 출중했거나, 전쟁에서 공을 세우는 등 용력을 갖춘 자들이 추천을 받아서 '교위(校尉)'로 임명되는 식이었습니다. '교위'란 직책은 지금 시대의 계급과 1:1로 매칭은 어렵지만 '하사'나 '소위' 정도로 인식됩니다. 개인적으로는 엄연히 '오(伍)'라는 작은 부대의 지휘관이었기 때문에 소위 정도로 보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하여 고려의 무관들은 대다수가 일자무식쟁이라고 봐야겠지요. 한자를 읽기는 커녕 자기 이름 글자조차 못 쓰는 사람이 부지기수였고, 무신정변 자체가 한미한 신분이었던 하급 무인들에 의해서 주도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은 더했습니다.

당장 무신정변에서 얼굴마담을 담당했던 정중부(鄭仲夫)는 당시 무관으로서 최고 관직인 정3품 상장군이었지만, 평민 출신이었기 때문에 글을 알았더라도 수준은 깊지 않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훗날 정중부 일당을 제거한 경대승에게 명종이 정3품 승선(承宣; 왕명의 출납을 맡던 직책)을 제수하려 할 때도, 경대승은 "나는 글을 몰라 그 직책을 맡을 수 없다."고 거절했다는 기록이 있었고, 서경유수 조위총(趙位寵)이 일으킨 난을 평정했던 두경승도 그의 열전에 '무식하여 글자를 알지 못하였다.'고 기술된 등을 보면 학문에 대한 조예는 물론, 글자조차 잘 읽지 못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라고 봐도 되겠지요.


[결어]

이후의 역사에서 '중희문'으로 불리게 되는 '향복문' 에피소드는 여기서 끝을 맺습니다. 하지만 이와 비슷한 에피소드가 나중에 몇 차례 더 등장하게 됩니다.

무관을 시험으로 뽑기 위한 무과는 조선이 개창된 후 비로소 자리 잡습니다. 특기할 만한 점은 문과에 비해서는 쉬웠다고 하나 유교와 병법의 필기시험인 복시(覆試)를 치르게 하였다는 것인데요. 무관들에게 최소한의 교양을 갖추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무관으로서의' 관직 상한선도 정3품까지로 문관에 비해 낮기는 하였으나 공을 계속 세울 경우 관직상 '문관으로' 직렬이 바뀌며 종2품 이상으로 승진할 수 있었습니다. 문관이든 무관이든 품계가 같다면 딱히 차별이라 할 만한 현상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100년간 이어진 무신정권의 경험이 크게 작용하였던 것입니다.

단원 김홍도 풍속도 화첩의 '활쏘기'


[관련기사]
<고려사절요> 명종 10년 11월 기사
11월. 중수하던 새 강안전(康安殿)이 완성되니 문을 편액하여 향복문(嚮福門)이라 하였는데 중방(重房)에 가까우니 무신들이 의논하여 이르기를, “향복은 항복(降伏)과 소리가 서로 비슷하니 아마도 문신들이 이것으로 무신을 눌러 항복하게 하려고 함이다.”라고 하였다. 그 편액을 고치기를 주청하였니 평장사(平章事) 민영모(閔令謨)에게 명하여 고쳐 영희문(永禧門)이라 하자 무신들이 다시 말하기를 “문신의 뜻은 짐작할 수가 없으니 영희에 따로 깊은 뜻이 있는지 어찌 알겠습니까. 희(禧)는 복(福)이지만, 영(永)이라는 글자의 뜻은 길흉(吉凶)을 알 수가 없습니다. 중(重)이라는 글자는 본방(本房)의 칭호이니 고쳐 중희(重禧)로 하시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그 말을 따랐다.

十一月. 重新康安殿成, 門額曰嚮福, 近於重房. 武臣議以爲, “嚮福與降伏聲相近, 蓋文臣欲以此壓武官而降伏之也.” 奏請改其額, 命平章事閔令謨改曰永禧, 武臣復以爲, “文臣之意, 不可測, 安知永禧別有深意耶. 禧者福也, 永字之意, 吉凶未可知也. 重字本房之稱, 請改爲重禧.” 王從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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