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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2/19 16:26:08수정됨
Name   이그나티우스
Subject   봉준호 감독 통역을 맡은 최성재(Sharon Choi)씨를 보면서 한 영어 '능통자'에 대한 생각
봉준호 감독 통역을 맡은 최성재씨가 한동안 언론에 많이 오르내렸습니다. 하도 궁금해서 간단히 찾아보니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영화를 전공한 사람이네요. 이분의 영어실력이 하도 화제가 되어서 보니 재미교포 출신은 아니고, 초등학교 시절 미국에서 잠시 학교를 다니다 귀국해서 한국에서 고등학교(외대부속외고)까지 마친 후 다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케이스입니다.

저 자신도 대치동 키드였고, 주위에도 용인외고 간 친구들, 미국 학부로 유학을 간 친구들이 제법 있어서 이분이 국내에서는 어떤 삶을 살아 오셨을지가 대충 눈앞에 그려집니다. 사실 이런 이력을 가지신 분들은 정말로 미국인보다 영어를 잘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마 얼굴을 가리고 소리만 들려주면 미국인들도 절대 한국인이라는 생각 못할 겁니다.

이미 2000년대 이후 우리나라 형편이 많이 좋아지면서 교육의 미국화 현상이 굉장히 강해졌고, 그런 분위기를 타고 거의 현지 미국인이나 별로 다를바도 없는 한국의 수재들이 많이 양성되었습니다. 이 친구들 특징이, 완전히 한국식 교육을 받으면서 여기서 엘리트 코스를 밟으면서도 초등학교~중학교 시기에 1~2년간 미국 유학경험을 가진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아무래도 부모들이 유학을 영원히 시킬 수는 없으니 언어습득능력이 말랑말랑한 어린 시절에 보내는 느낌이었습니다.

이런 친구들 강점이 우리나라와 미국 양쪽에서 살아남을 실력을 갖췄다는 거죠. 대개 아예 어릴때 미국으로 건너가버린 친구들의 경우에는 우리나라에 다시 돌아오면 적응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친구들은 한국에서 학교를 계속 다니되, 중간에 1~2년 정도 유학을 다녀옴으로써 모국에서의 적응력과 영어실력을 동시에 갖춘 친구들이라 정말 엄청난 시너지 효과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대기업이나 법조계, 의료계 같은 젊은 엘리트들이 집합한 조직에 가면, 한국에서도 엄청난 능력자이면서 미국인 수준으로 영어를 구사하는 괴물들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저는 이런 분들이 우리나라에 엄청나게 큰 기여를 할 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실무능력과 완벽한 외국어 능력을 쌍으로 갖춘 인재를 엄청나게 동원할 수 있는 것은 우리나라의 엄청난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에도 전문 통역가도 아닌 영화 전공자가 저렇게 탁월한 통역을 해냈다는 점에서 그런 부분에 대한 좋은 예가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순수 국내파의 입지는 점점 좁아질 수밖에 없다는 현실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해외 재류경험을 갖춘 외국어 우수자가 워낙 많다보니, 순수히 국내에서 공부한 사람들은 정말 어지간히 어학에 자질이 있는 경우가 아니면 해외파를 이기기가 쉽지 않습니다. 문제는 해외파 선호 현상이 단순히 최성재씨와 같은 통역 일자리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요직이라고 하는 곳들은 어지간하면 외국어 우수자를 우대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겁니다. 대한변협 홈페이지에 들어가 사내 변호사 모집 공고를 보면, 한집걸러 한집이 영어 능통자를 우대합니다. 개중에는 네이티브 수준의 영어 구사자'만' 채용하겠다는 업체도 결코 적지 않습니다. 특히 인기업종이나 규모가 큰 회사들일 수록 그런 경향이 높습니다. 물론 우리나라의 글로벌 경제의존도가 높으니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영어를 못하는 변호사들의 입지가 점점 좁아지는 것도 부정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로스쿨 출신 변호사들은 이미 입시에서 영어성적 제출을 요구받기 때문에 이론상으로는 아예 영어를 못하는 변호사는 로스쿨 전환 이후로는 상상하기 어려운데도 구태여 '영어 능통자'를 찾는 트렌드입니다.) 심지어는 요즘은 검찰도 외국어 우수자를 선호할 정도이니 외국어 우수자에 대한 선호는 말 다한 거죠. 물론 그런 공고를 걸어놓는다고 실제 영어 우수자가 얼마나 올지는 별문제이지만, 적어도 HR 쪽의 선호는 엿볼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회가 선호하는 최성재씨와 같은 '영어 우수자'는 사실 보통의 학생이 자신의 노력만으로 달성하는 것이 쉽지는 않은 '스펙'입니다. 초등학교 시절 1~2년간 해외유학을 가고, 용인외고 국제반을 다니고, 다시 USC 영화학과에 입학하는 것은 본인의 노력(능력)과, 가정의 환경과 기타 여러 요소가 모두 갖춰져야 하는 굉장히 어려운 코스입니다. 아무리 강남 대치동 키드라고 해도 저렇게까지 잘 풀리는 경우는 일부이고, 나머지는 해외경험은 있는데 좋은 대학을 못 가거나, 반대로 공부는 잘하는데 영어실력은 그냥 시험성적만 좋거나 그런 케이스가 더 많을 겁니다.

문제는 사회에 딱 나가면, 아니 대학만 진학해도 저런 '좁은 문'을 통과한 영어 우수자들이 숫자가 엄청나게 많다는 부분입니다. 학부시절 영어강의를 들으면 외국 유학생과 한국인 학부생(정시 출신들)이 같이 수업 듣는데, 토론하면 누가 외국인인지 얼굴 안보면 모를 정도입니다. 결국 누군가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해외 체류 경험을 중심으로 한 영어실력이 대학생들이 볼륨이 충분히 커지다 보니 대학생 혹은 사회 초년생들 사이에서 영어 우수자와 비 우수자로 사회적인 선이 그어지는 부분이 있다고 봅니다. 외국과 관련되거나, 전망이 밝은 요직은 영어 우수자가, 그렇지 못한 포지션은 국내파가 맡는 경향이 점점 뚜렷해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느낌이 없잖아 있습니다.

결과론적으로만 보면, 당장에 외국인들과 교섭해서 우수한 결과를 내는 영어 우수자를 우대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영어실력이 부족하니 내수용으로만 취급되는 저 같은 입장에서 외국어 우수자를 우대하는 분위기에 마냥 박수만 쳐줄 기분이 들지 않는 것도 사실입니다. 나는 여기서 주어진 환경 내에서 최선을 다했는데, 왜 이렇게 무능한 인간으로 취급받는가? 라는 문제의식을 솔직히 완전히 털어내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최성재 씨나, 영어에 능통한 분들을 비판하거나 그들이 특별대우를 받는다고 성토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제 학창시절 친한 친구들 중에서도 유학경험 있거나 외고출신들이 많기 때문에 그분들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다만 외국어 우수자를 양성하는 방식, 그리고 그들이 소비되는 방식이 과연 지금 이대로 괜찮은 것인가? 하는 원론적인 의구심을 가질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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