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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5/09/22 07:17:41
Name   기아트윈스
Subject   영국 생활 이야기 (4): 영어
피에르 부르디외는 전후 프랑스의 소작농 계층의 결혼 패턴 연구를 통해 다음과 같은 인상적인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프랑스 남서부의 작은 농촌 마을에서는 해마다 크리스마스 파티가 열립니다. 파티가 되면 큰 홀에 주민들이 삼삼오오 모여 먹고 마시고 춤을 추지요. 특히 춤이 중요한데, 미혼 남녀가 어울려 춤을 추며 눈을 맞출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부르디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춤을 추는 남성들은 대개 정해져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인근의 좀 더 큰 마을에서 온 대학생들이나 고등학교 학생들이 주로 메인 스테이지에서 춤을 추었고, 많은 젊은 여성들이 돌아가며 기꺼이 그들과 춤을 추었습니다. 반면에... 잠시만요, 눈물 좀 닦구요...



"춤 추는 구역의 가장자리에 서서 침침한 무리를 이루고 있는 이들은 침묵하고 있는 아재들이었다. 나이는 모두 30대 정도였는데, 베레모를 썼고, 허접한 검은 수트를 입고들 있었다. 춤판에 끼고자 하는 유혹에 이끌린 듯 그들은 전면을 향해 움직였다. 춤 추는 이들의 공간을 좁혀가면서. 그들은 모두 독신이었다."



물론 이들은 결국 춤판에 끼지 못합니다. 그저 본능적으로 춤판쪽으로 다가가다가도 이내 후퇴해서 다시 벽에 붙고 맙니다. 계속 벽에 붙어서 떨어지질 못하는 그 모양새를 보고 부르디외는 "꽃장식들 (wallflowers)" 같았다고 말합니다.

우리식으로 바꿔서 말해봅시다. 이들은 모두 병풍들입니다. 남녀상열지사의 대경연에 끼지 못하는 쩌리들이며, 더 멋진 사내들을 빛나게 해줄 덜 멋진 사내들, 곧 악세사리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처음부터 쩌리였던 건 아닐 겁니다. 누가 미팅에 나가고 나이트에 가면서 "난 정말 병풍 하고 싶어"라고 하겠습니까. 다들 주인공이 되고 싶어서 가는 걸 테지만 현실은 늘 잘나가는 애들이 잘나갈 뿐이지요. 주인공이 되느냐 쩌리가 되느냐는 결국 제로섬 게임입니다. 내가 주인공이 되면 쟤는 쩌리가 되는 거고 내가 쩌리가 되면 쟤는 주인공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서로가 상대방을 쩌리화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이상할 게 없습니다. 그게 노골적이든 은근하든 간에 이건 결국 내가 이기고 쟤가 져야 할 게임이니까요.

단체 미팅을 하고 나면 동성친구들간에 앙금이 생기는 건 이 때문입니다. 미팅자리에서 잘보이기 위해 친구의 흑역사 이야기 같은 걸 꺼내서 여성동지들을 웃기려는 건 남성의 본능이요, 어떻게든 더 잘 꾸미고 나가서 페르소나를 뒤집어써서 더 돋보이려는 건 여성의 본능이기 때문이지요.

자, 이 게임을 편의상 쩌리짱 게임이라고 불러봅시다. 모든 게임에는 룰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쩌리짱 게임에도 룰이 있습니다. 이 룰은 가변성이 있는데요, 나이별 지역별 신분별로 유행을 탄다는 데서 그렇습니다. 예컨대 미대생 여성 4인방과의 미팅자리에서는 미술지식을 가지고 있는 남자가 승리할 가능성이 높은 반면, 2차로 노래방에 갈 경우 미술지식은 꽝이지만 노래 하나는 임재범 뺨도 후려칠 다른 친구가 대역전극을 펼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상황에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이처럼 하드캐리할 가능성을 가진 카드들을 보유하는 것을 부르디외는 [문화자본]을 보유했다고 불렀습니다. 문화자본이란 쉽게 말해서 자기 자신 안에 축적한 무언가로서 자본의 역할을 하는 것이며, 자신 안에 축적된 것이기 때문에 돈이나 물건 처럼 남에게 덥썩 건네줄 수 없는 것들을 말합니다. 예컨대 부잣집 아이가 어려서부터 승마, 골프, 바이올린 등으로 단련받은 반면 가난한 우리는 그런 거 하나도 배워보지 못하고 살았는데 이 아이의 그런 경험과 그런 배움들이 훗날 대학 입학 때 매우 유리하게 작용한다면 우리는 [저 부잣집 아이는 잘 축적된 문화자본을 발판삼아 대학에 들어갔고 난 문화자본 거지라서 못갔구나] 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겁니다.

한국에서 [영어]는 매우 중요한 문화자본 중 하나입니다. 아니, 어떤 면에서 보면 가장 중요한 문화자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미술지식 같은 건 40대 50대가 되어서도 축적할 수 있는 거지만 영어는 10살 때 배운 애를 50살 때 배운 사람이 따라잡기 매우 어렵기 때문입니다. 뿐만아니라 우리 모두가 영어로 작성된 온갖 문화상품들에 고농도로 노출된 채 살고있기 때문에 자신의 영어구사력에 대해 자부심을 갖거나 열등감을 갖는 건 매우 당연하기도 합니다 (홍차넷 자게에서 얼마나 많은 영어단어나 영어문서 링크가 걸리는지 생각해보세요).

자, 이제 유학생활 이야기로 돌아와봅시다. 한국사람들 사이에선 그럭저럭 영어를 잘 하는 걸로 통하는 사람이 결국 어떻게든 영미권 국가로 유학을 가게 되는데요, 이 때 이 사람들이 해당국가에서 겪는 상실감이 보통이 아닙니다. 유학 전에는 대개 자신이 자신의 영어구사력에 얼마나 큰 덕을 보고 살고있었는지 자각하지 못합니다. 예컨대 설령 영어를 쓸 일이 하등 없는 삶을 사는 와중에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 본인의 자존감을 유지시켜주는 데 자신의 영어구사력이 큰 역할을 하고있다거나 등등. 하지만 일단 영미권 국가에 발을 들여 놓는 순간 본인의 영어구사력이 평균이하라는 게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고 지도교수가 영어 못한다고 쪼기 시작합니다. 비유하자면, 본인의 은행계좌에 1억원이 들어있어서 설령 그걸 펑펑쓰고다니진 않더라도 뭔가 뱃속이 뜻뜻하고 기분 좋은 느낌이 있었는데 유학가고나니 누군가가 그 앞에다가 마이너스 (-) 기호를 하나 슥 그어준 것과 같습니다. 대충 그런 상실감이 찾아옵니다.

.....ㅠ.ㅠ

제 이야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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