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06/10 18:03:43
Name   이그나티우스
Subject   인맥 같은 건 만들 줄 모르는데...
예전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사회인 특강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 연사가 직장생활에 있어서의 인맥과 네트워킹의 중요성을 역설했습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회사 근무경험이 있고 지금도 현직에 계신 저의 아버지도 항상 그 말씀을 하시곤 합니다.

저는 미국에 가본 적은 없지만, 영미권의 기업들은 인재채용을 할 때 대개 네트워킹을 중심으로 사람을 뽑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 못잖게 그 대학의 어느 동아리에서 활동했는지, 어느 교수와 친했는지 등등이 중요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인턴쉽이나 인맥 채용이라고 하면 인사비리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은데, 저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생각합니다. 지원자를 잘 아는 사람의 추천을 받으면 잠시 면접보는 것보다 더 정확할 수도 있고, 또 그렇게 사람을 뽑아야 다들 평소에 평판 관리도 하고 조심해서 살겠죠. 나름대로 합리성이 있는 제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그런 제도가 말이 되려면, 적어도 그 사회 내에서 열심히 노력하고 산 사람들은 혜택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적어도 평범하게 공부를 열심히 한 대학생들에게 취직과 커리어를 위해서 인맥을 쌓으라는 주문은 너무 어려운 과제입니다. 지금까지 해본 거라곤 밥만먹고 기출문제 풀어본 것밖에 없는데!

물론 배우지 않아도 이 과제를 능숙하게 잘 해내는 분들도 계십니다. 고교, 대학시절 벌써 클럽활동 통해서 선후배, 교사, 사회인들과 인맥을 쌓고 그걸 활용해서 학창시절에는 NGO나 스타트업을 하다가, 나중에는 그 경력을 살려서 좋은 포지션으로 들어가는 그런 친구들이 주위에 있었습니다. 그런 친구들은 인맥사회에서도 잘 살아남겠죠.

그렇지만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는 학생들에게 "딴데 신경쓰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해라."는 부모님과 선생님 그리고 주위의 압력이 강합니다. 공부 이외에는 다른 것은 안 해도 되고, 아니 하면 안 된다는 압박이 강합니다. 저도 고등학교 시절에는 학교에서 클럽활동에 쓰는 시간 아깝다고 교내 클럽으로 수학문제 풀이반 만들어서 운영하던 그런 분위기 속에서 자라왔습니다. 그러다보니 순응적으로 살아온 학생들이라면 인맥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사회에 잘 적응할 지에 대한 걱정이 앞설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습관의 동물이라 갑자기 변하지 못합니다. 거의 평생을 책상에 앉아서 공부만 해온 학생들에게 어느날 갑자기 네트워킹이 중요하니 술자리에 나가서 인맥도 쌓고, 주위 사람들에게 PR도 하면서 자기 평판을 관리하라는 이야기를 해봤자 도대체 어떻게 해야 첫 단추를 꿸지조차 막막합니다. 당장 저만 해도 변호사 취업의 중요한 관문인 실무수습에서 어디를 가야 될지 몰라서(받아주는 데도 없었지만) 학교에서 제공하는 공공기관 실무수습을 다녀왔습니다. 물론 그런 실무수습은 강의나 과제 위주여서 현직자들과 교류할 기회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도 배울건 많았지만...)

어른들이 학생들에게 인맥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려면 먼저 학생들이 인맥을 쌓는 방법을 학습할 만한 기회를 충분히 제공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걸 미리 알고 어린 세대에게 클럽활동과 과외활동의 중요성을 잘 가르치는 어른들도 요즘은 많습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학생은 다른데 신경쓰지 말고 공부만 하라고 하다가, 갑자기 이제는 인생은 실전이니 황금인맥을 만들라고 해 봤자, 축구선수에게 갑자기 야구하라는 수준의 주문이 되는 겁니다. (물론 공부 열심히 하라는 어른과, 인맥 쌓으라고 하는 어른이 같은 사람은 아니어서 각자가 자기 입장에서 이야기한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도대체 어른들이 말씀하시는 그 인맥은 어떻게 만드는 걸까요? 동문회나 교회같이 사람이 모이는 데에 빠짐없이 얼굴을 디밀면 되는 걸까요? 아니면 봉사활동이나 단체의 총무 등으로 지원해서 품을 팔면서 이름을 알려야 하는 걸까요? 그것도 아니면 유력한 서클이나 동호회에 들어서 잘나가는 선배들의 눈에 띄어야 하는 걸까요? 전 평생 시험공부만 하면서 살아와서 그런지 솔직히 인맥을 어떻게 만드는지에 대한 감도 잡히지 않습니다. 과장 좀 보태서 말하면 저에게 갑자기 비행기를 조립하라는 수준의 주문으로 느껴집니다.

결국 저같이 공부 이외에는 할 줄 아는 것이 없는 무능력자들은 대학에 가서도 자격시험, 공무원시험 등등 시험으로만 해결되는 무언가를 하려고 하게 됩니다. 다른 것은 할 줄을 모르니까요. 그렇지만 시험만으로 버틸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고, 언젠가는 인맥으로 돌아가는 사회에 나가야 하는데 그 때 어떻게 할 지는 정말 겁이 납니다.

어른들은 학력이 중요하지 그따위 인맥은 사회 진출하면 금방 다 만들 수 있는 거라고 하시는데, 저는 그런 조언이 맞기를 바라면서 오늘도 제가 해오던 것처럼 전력을 다해 공부할 뿐입니다.

LG그룹에서 공개채용을 없앴다고 하길래 여러 생각이 들어 적어봤습니다.



2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7694 일상/생각태어나서 처음으로 여자에게 4 망고스틴 18/06/16 4188 6
    9127 오프모임청주에 맥주 좋아하시는 분 없나요? 4 자일리톨 19/04/26 4188 6
    12929 IT/컴퓨터휴직된 구글 직원과 인공지능의 대화 전문 7 Jargon 22/06/18 4188 7
    8068 일상/생각생각이 많을땐 글로 푸는게 상당히 도움이 되는군요. 13 태정이 18/08/17 4189 9
    10800 사회검언유착? 한동훈과 이동재는 무슨 대화를 나누었나. <녹음공개> 32 DX루카포드 20/07/21 4189 4
    11395 문화/예술시로바코 극장판 리뷰 4 이그나티우스 21/02/04 4189 5
    12207 오프모임오늘밤 9-11시 mm벙 일상에 지친 사람 모여라. 5 지금여기 21/10/25 4189 0
    894 정치자리의 정치 12 kpark 15/09/03 4191 0
    11073 일상/생각시래기 순대국을 먹고 왔습니다. 15 nothing 20/10/18 4191 11
    2203 음악벨 에포크로 생각난 음악 몇 개... 1 새의선물 16/02/11 4192 0
    2983 IT/컴퓨터카카오가 대기업 규제를 피하게 될 것 같습니다 6 Leeka 16/06/09 4192 0
    6146 정치이종구, 연봉 2천만원 이상 근로자에 연 12만원 소득세 부과 법안 발의 19 empier 17/08/22 4192 0
    6744 음악샹송 한곡 듣고 가셔요. 2 droysen 17/12/08 4192 4
    7327 도서/문학바깥은 여름 - 김애란 7 nickyo 18/04/04 4192 2
    2316 방송/연예필리버스터 쉽게 이해하기? 1 펠트로우 16/02/29 4193 0
    3831 일상/생각제주입니다. 미치겠습니다. 8 Xayide 16/10/05 4193 0
    11910 기타천안함 유족 분께서 도움이 필요하시다고 합니다. 21 cummings 21/07/22 4193 11
    2522 일상/생각오, 지진 왔어요... 9 세계구조 16/04/01 4194 0
    6571 일상/생각홀로 견디는 당신에게 14 레이드 17/11/10 4194 28
    10672 일상/생각인맥 같은 건 만들 줄 모르는데... 16 이그나티우스 20/06/10 4194 2
    12380 정치20대 대통령 선거 정책 공약 살펴보기 (각 후보자 1호 공약 + 선거관리위원회 공약 이슈트리) 21 소요 21/12/24 4194 9
    7208 영화이번 주 CGV 흥행 순위 AI홍차봇 18/03/08 4195 1
    7604 음악사랑하지 않으니까 4 바나나코우 18/05/30 4195 2
    9371 게임롤 골드를 찍고 느껴지는 것 7 Xayide 19/06/30 4195 1
    10239 게임게임을 샀습니다 7 별빛사랑 20/01/30 4195 4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