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06/14 21:31:47
Name   이그나티우스
Subject   우리나라 만큼 살기 좋은 나라도 없다
바야흐로 국뽕의 시대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나라 사람들 스스로도 그런 낯뜨거운 국뽕과 자기애가 과하다는 것을 알기는 하는지 국뽕 유튜브나, 두유노 드립에 대해서는 스스로 풍자거리로 삼을 정도는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정말 무서운 쪽은 조악한 논리와 편집으로 떡칠된 저질 유튜브 채널이 아니라, 그럴듯한 정론의 모습을 갖고 중산층 이상의 도시민과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기득권 세력 사이에서 유통되고 있는 보다 고급진 버전의 국뽕입니다. 아니 이건 국뽕과 같은 쇼비니즘이면서 동시에 과도한 낙관론으로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프레스티지(?) 국뽕은 대개 그럴듯한 통계와 사회과학의 언어를 하고 있으며 메인스트림 언론이나 출판 등 공신력 있는 매체를 통해서 집중적으로 유통됩니다. 이들이 내세우는 주된 주장을 간추려 보면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제조업을 중심으로 한 우리나라의 펀더멘털 산업 경쟁력은 이미 세계적인 수준에 올라섰으며 전통적인 산업 강국인 일본도 무시못할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다.
둘째, 한류로 대표되는 우리나라 문화산업의 경쟁력은 날로 높아지고 있으며, 아시아를 중심으로 세계시장을 제패하고 있다.
셋째, 주기적 정권교제가 가능한 선진적인 민주주의, 저렴한 가격으로 모두가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누릴 수 있는 보건의료 시스템, 신속하고 정확한 공공 서비스, 빠르고 저렴한 인터넷 서비스와 물류망, 야밤에도 안심하고 다닐 수 있는 치안수준과 같은 사회적 인프라는 이미 미국, 일본 EU권과 같은 전통적 선진국의 수준을 넘어섰다.

위와 같은 고급 국뽕이 정말로 무서운 것은 상당 부분은 진실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삼성전자의 매출액과 영업이익은 일본 최대 메이커인 토요타를 넘어섰습니다. 한국산 컨텐츠가 아시아권을 중심으로 날개돋힌 듯 팔리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고급 국뽕이 보여주지 못하는 우리나라 사회의 모습도 많고, 앞으로 그런 모습이 점점 더 부각되리라는 점입니다.

사실 진정한 문제는 저런 유의 고급 버전의 국뽕의 내용 자체보다도 그것이  유통되는 배경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변부를 겉돌면서 기득권 세력이 속하지 못하는 제 스스로가 피부로 느끼는 한국 사회의 위기는 다음의 2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위기가 사회 전 영역에 걸쳐 동질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영역에서만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둘째, 위기가 지금 당장 구성원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라기보다는, 장래에 대한 기대의 문제인 경우가 많다.

가령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로 거론되는 저출산과 인구구조 문제가 저기에 들어맞습니다. 저출산 문제는 지금 태어난 아이들이 성인이 될 무렵인 10~20년 후에나 실제 우리의 피부에 와 닿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출산으로 인한 직격은 징병검사를 받는 젊은 남성들이나, 유아/초등교육과 관련된 전공을 공부하고 있는 학생과 같이 직접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면 사실 피부로 느끼기가 어렵습니다.

위기가 모두에게 발생하는 것도 아니고, 지금 당장 사람이 죽어나가는 문제도 아니다보니 위기를 실감하지는 못한 채, 현재 숫자로 확인할 수 있는 대한민국의 '실력'에 취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 아닐까요?

사회의 주변부를 계속 겉돌면서 제가 느낀 것은 우리나라 사회가 2개의 영역으로 분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제1영역은 글로벌 경제와 연결되어 있거나, 국가권력의 수혜를 받을 수 있는 이른바 선진국 섹터입니다. 여기에 속한 사람들은 식비나 주거비와 같은 기본적인 생활비의 압박을 받지도 않고, 여행과 같은 여가생활을 충분히 누릴 수도 있으며, 사회적으로도 여유있는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습니다. 이쪽에 속한 사람들에게 솔직히 위기라는 것인 신문지상이나 TV의 탐사프로에만 나오는 것일 겁니다. 아버지가 회사에서 퇴직하기 전 제가 아직까지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제가 그랬던 것처럼.

다른 하나의 제2영역은 위 제1영역을 제외한 것이고 이쪽에는 벌써부터 우리나라 사회가 겪고 있는 각종 문제가 피부로 느껴지는 곳입니다. 소득은 불안정하고, 사회적으로는 고립되고, 무엇보다도 미래가 불투명합니다. 사실 고통의 크기로만 보면 과거 5~60년대 우리의 선배 세대가 겪었던 수준이 훨씬 높겠지만, 문제는 오늘날의 위기는 과거와는 달리 나아질 가망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회가 2개의 영역으로 분단된 상태에서 문제는 주로 상황이 안좋은 2번째 영역에서 발생하는데다, 그 문제도 지금 당장 발생하는 것은 시작 단계에 불과하다보니, 정작 우리사회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해결할 능력뿐 아니라 책임도 가지고 있는 사회의 기득권 세력은 위기를 실감하지 못하고, 위에서 말한 고급진 국뽕의 논리에 빠져 낙관주의에 경도되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언제부턴가 "미국 이민 가 봐야 별거 없어. 우리나라가 세상에서 살기 제일 좋다."는 이야기가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립니다. 정말 그럴까요?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돈과 권력이 있으면 이제는 서울 수도권에서도 뉴욕이나 런던 못잖은 생활수준을 누릴 수 있을테니까요. 그렇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철이 든 이후로 제가 느낀 우리나라의 모습은 항상 불만스럽고 실망스러웠으며, 무엇보다도 미래에 대한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일본 따위는 이미 넘어선지 오래고, 이제는 미국과 비교해도 군사력 정도만 차이가 날 뿐 개인의 생활수준은 이쪽이 훨씬 더 낫다는 낙관론과 제 스스로가 느끼는 한국 사회에 대한 불만과 실망 중 어느 쪽이 맞는 것인지는 솔직히 저 자신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사회의 양지바른 곳에서 사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는 분명히 체감하는 사회의 온도와 분위기는 다르다는 점이 지금보다는 더 잘 이야기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5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1570 정치군복무와 국방의 의무의 관계 (feat. 박주민) 22 이그나티우스 21/04/10 5512 19
    11266 일상/생각2030세대는 공정에 민감하다? 54 이그나티우스 20/12/23 5680 7
    10992 정치북한군이 대한민국 국민을 총으로 쏴 죽이고 시체를 불태웠다 9 이그나티우스 20/09/25 5273 15
    10932 기타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세일러 전사는? 28 이그나티우스 20/09/06 6073 0
    10918 일상/생각건담 시리즈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품 27 이그나티우스 20/09/03 5193 1
    10816 경제코로나19 관련 거시경제 주요 이슈에 대한 논의 및 시사점 1 이그나티우스 20/07/26 3618 3
    10795 일상/생각Kimchi Warrior의 탄생 6 이그나티우스 20/07/19 3582 8
    10783 음악일본의 뮤지션 오오이시 마사요시를 소개합니다 2 이그나티우스 20/07/15 4723 4
    10769 꿀팁/강좌마스크, 손소독제 식약처 허가현황 검색방법 3 이그나티우스 20/07/12 4179 4
    10754 일상/생각집밥의 이상과 현실 42 이그나티우스 20/07/06 5488 43
    10715 문화/예술쿄토 애니메이션의 마스터피스: <타마코 러브 스토리> 7 이그나티우스 20/06/26 5671 7
    10687 일상/생각우리나라 만큼 살기 좋은 나라도 없다 89 이그나티우스 20/06/14 6688 5
    10679 방송/연예한 달 전 TV 코드를 뽑았습니다. 그리고, 14 이그나티우스 20/06/12 5155 3
    10672 일상/생각인맥 같은 건 만들 줄 모르는데... 16 이그나티우스 20/06/10 4214 2
    10942 문화/예술추천하는 최신 애니메이션 OST 2 이그나티우스 20/09/09 5324 2
    10505 일상/생각아싸, 찐따, 혹은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 8 이그나티우스 20/04/17 4716 15
    10482 음악밴드 SHISHAMO를 소개합니다 15 이그나티우스 20/04/10 4817 7
    10355 일상/생각시작도 못하고 과외 짤린 썰 (1): 입시지옥을 통과하고 과외시장에 뛰어든 내 첫 상대가 알고보니 대한민국의 절대권력 청와대의 하수인?!! 4 이그나티우스 20/03/07 4272 5
    10335 역사고구려 멸망 후 유민들의 운명 12 이그나티우스 20/03/01 3871 10
    10314 문화/예술케이온과 교지편집부와 영화감상반과 '리크루팅'에 대한 이야기 8 이그나티우스 20/02/22 4936 1
    10306 사회봉준호 감독 통역을 맡은 최성재(Sharon Choi)씨를 보면서 한 영어 '능통자'에 대한 생각 31 이그나티우스 20/02/19 5349 19
    10298 일상/생각매운맛지옥 8 이그나티우스 20/02/16 5373 4
    9735 문화/예술이것은 사랑이 아닌가? - 성적 대상화에 대하여 (보류) 22 이그나티우스 19/09/29 5324 2
    9687 일상/생각학교가 존재할 이유가 있을까요? 88 이그나티우스 19/09/20 5205 1
    9647 일상/생각새로운 신분사회가 된 학교 8 이그나티우스 19/09/09 4266 0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