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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9/14 19:30:16
Name   ar15Lover
Subject   게임, 영화 기록으로 병역거부자의 '양심의 진정성'을 입증하겠다는 검찰의 행태에 반대하는 이유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959984.html


2018년 헌법재판소의 결정 이후 한국의 검찰과 사법부는 병역거부자들의 '양심의 진정성'을 입증하고, 이렇게 입증된 진정성의 여부에 따라 대체역 복무를 허용할지 안할지에 대해 결정하겠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특히 검찰은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어떤 게임을 했는지, 어떤 영화를 봤는지까지 추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만약 어떤 병역거부자가 폭력성이 짙은 게임을 했거나 영화를 관람했다면 이들의 양심에 '진정성'이 부족한 것으로 보고 대체역 복무를 불허하겠다는 것인데요.

이러한 검찰의 주장은 일차원적이고, 단순하고, 유치합니다.
그 이유는 아래와 같습니다.

1. 병역거부자들은 마냥 착해빠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한국사회에는 병역거부자들에 대해 일종의 편견이 있어요. 병역거부자들은 평화주의자들이기에 마냥 착해빠졌고, 파리 한마리 제대로 못죽이는 심성이 약한 사람들일 것이라는건데요. 사실 이런 편견은 실제와 거리가 멉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무하마드 알리가 있겠네요. 무하마드 알리는 자신의 전쟁반대 신념에 따라 병역을 거부했고, 법정투쟁 끝에 최종적으로 무죄를 선고받았습니다. 그런데 무하마드 알리가 착해빠진 얼간이었습니까? 아니죠. 무하마드 알리는 싸움을 직업삼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시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주먹을 날리는 사람이였고, 가장 시비붙기 싫은 사람이었습니다.

만약 한국 검찰식 기준을 적용하면 이런 말이 나오겠네요.
"전쟁에 반대한다고? 근데 너 직업 보니까 프로복서네? 프로복서면 싸우는게 일일텐데 어떻게 전쟁에 반대할수가 있어? 너 가짜!!"
전 위와 같은 유아적 사고방식을 단호히 거부합니다.

2. 폭력적인 게임, 영화를 했거나 봤다고 해서 반드시 폭력적인 사람이 되는건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누군가가 칼 마르크스의 저서들을 읽고 있다고 칩시다. 그 사람은 마르크스의 책들을 읽고 있으니 무조건 공산주의자 빨갱이일까요?
그럴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습니다. 철두철미한 자유시장주의자가 칼 마르크스의 사상을 비판할 목적으로 그 책을 읽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단순히 학문적 호기심 때문에 읽는 것일수도 있고요.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아돌프 히틀러의 나의 투쟁이나, 데이비드 어빙의 저서들을 읽었다고 해서 그 사람을 반드시 네오나치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 사람은 나치의 사상을 비판하거나, 홀로코스트 부정론을 비판하기 위해 그 책을 읽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철저한 역사적 사료로써 연구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고, 그저 지적 호기심을 만족시키고 싶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영화의 경우, '지옥의 묵시록'이나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풀 메탈 자켓'과 같은 베트남 전쟁 영화들을 보면 폭력적인 장면들이 대단히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이 영화를 만든 감독, 스태프, 배우들과, 이 영화를 본 관객들은 싸그리 폭력광 호전주의자들입니까? 뭐 그런 사람이 한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 영화들의 제작자들은 전쟁에 단호하게 반대하는 사람들이었어요. 전쟁이라는게 얼마나 참혹한 것인지 알리기 위해 그런 영화들을 만든거죠.

게임의 영역을 살펴보죠. 'This war of mine'이나 '스펙 옵스: 더 라인' 같은 게임들은 어떤가요?
This war of mine에서는 생존물자를 얻기 위해 노부부의 집에 침입해 죽일 수 있고, 스펙 옵스: 더 라인에서는 민간인들을 무려 백린탄으로 학살하는 미션이 나옵니다. 이 게임을 플레이한 게이머들은 전부 천인공노할 미치광이 호전광 폭력광 전쟁광 잠재적 살인마들인가요?
아니죠. This war of mine은 전쟁터 한복판의 민간인으로써 플레이해 게이머들로 하여금 전쟁의 참상을 실감하게 하려는 의도를 갖고 만들어졌고, 스펙 옵스: 더 라인은  [당대의 폭력적인 게임들을 비판]하려는 의도를 갖고 나온 겁니다.

한국의 검찰이나 보수 언론들의 주장대로라면 저 게임들을 한 사람들은 "게임 내용상 노부부를 살해하고, 민간인들을 백린탄으로 학살하는 부분이 있는 게임을 플레이한 피고인의 양심의 진정성에 의심이 갈 수 밖에" 없겠군요.

그러나 이들의 주장과는 반대로, [오히려 이런 게임들을 통해 전쟁의 참상을 간접적으로 겪었기에 전쟁에 반대하고, 병역을 거부할 수도 있는 겁니다.]

이건 여담이지만, 양심의 진정성을 게임으로 검증하겠다는 검찰의 주장은 [게임은 사람을 폭력적으로 만든다, 게임을 하는 사람들은 폭력적인 사람이다.]와 동일한 맥락에서 나옵니다. 저런 주장을 들으면 불편해할 사람들 많을 게임 관련 커뮤니티에서 유독 게임으로 양심의 진정성을 검증하겠다는 검찰의 주장에는 찬동하는 사람들이 많으신 것을 보면 그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3. 반드시 극단주의자가 되어야만 진짜인가?

병역거부자의 평소 행실을 통해 양심의 진정성을 입증하겠다는 검찰의 입장에도 문제가 많습니다.
여호와의 증인 신도가 병역거부를 할 경우, 평소 교회 출석 여부, 세례 여부 등을 따져서 이 사람이 찐 여호와의 증인인지 검증하겠다는 것이고,
평화주의자가 병역거부를 할 경우, 위에서 나온 게임이나 영화 관련 기록을 살펴서 찐 평화주의자인지 검증하겠다는겁니다.
하지만 이런 주장에는 문제가 많습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홍차넷에서도 과거 몇몇분들이 괜찮은 비유를 들어주셨는데요.

"기독교인이 문명 하다가 종교로 불교를 선택하면 가짜 기독교인인가?"
"사회주의자가 부루마블을 즐겼으면 그 사람은 가짜 사회주의자인가?"
"(궁중음모가 게임플레이의 핵심인)크루세이더 킹즈2를 즐긴 사람들은 비도덕적이므로 공직에서 제외해야하는가?"

또한 폭력적인 게임, 영화를 즐기는 사람들은 폭력적인 사람이라는 검찰의 주장을 인정한다고 해도 문제가 발생합니다.
어떤 신념을 가진 사람이든 어디까지 허용할지, 어디까지 양보할지에 관한 기준이라는게 있습니다.

채식주의만 해도 종류가 다양하죠. 극단적으로 일체의 육류와 육류로부터 비롯된 유제품들까지 거부하는 입장,
육류는 거부하지만 유제품은 허용하는 입장, 육상 동물의 고기는 거부하지만 어류는 허용하는 입장 등등이요.

병역거부도 마찬가지인데, 각자 마음 속에서 허용할 수 있는 '폭력'의 선이 다를 수 있어요. 어떤 이는 '누가 날 때려도 맞아 죽을지언정 때리진 않겠다' 수준으로 극단적일 수 있겠지만, 누군가는 "날 때리면 맞서 싸우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상대를 죽이지는 않겠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검찰은 극단적으로 일체의 육류, 유제품을 거부하는 채식주의자만 찐 채식주의자고 나머지는 다 가짜 채식주의자고, 극단적인 비폭력주의자만 찐 병역거부자고 나머진 다 가짜 병역거부자 취급하겠다는겁니다.

검찰이나 보수언론들이 흔히 말하는 그 무시무시한 "전쟁게임"은 말 그대로 게임, 즉 시뮬레이션에 불과합니다. 게임 속에서 사람을 죽인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은 컴퓨터 AI거나, 다른 사람이 조종하는 아바타에 불과합니다. 게임 캐릭터가 다루는 총기들도 물리적 실체가 없는 데이터일 뿐이죠. 게임플레이 역시 실전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장기, 바둑, 체스와 같은 놀이들도 전쟁게임의 일종입니다. 장기, 바둑, 체스는 두 군대가 서로 맞부딫히는 모양새를 추상화했죠. 과거 사람들에게 있어서 장기, 바둑, 체스가 바로 오늘날의 리그오브레전드, 문명이었던 겁니다. 무시무시한 살인 시뮬레이션 '콜 오브 듀티', '스페셜포스', '서든어택'과 같은 게임들도 사실 어린이들이 하는 물총 놀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군사훈련은 얘기가 달라져요. 물리적 실체가 존재하는 총기를 다루며, 그 훈련은 실전을 가정합니다. 실제로 전쟁이 일어나고, 실제로 윗선으로부터 적을 향해 사격하라는 지시가 내려오면, 그 지시를 따른다는 가정하에 이루어지는 훈련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 게임 속에서 가상의 총기로 가상의 인물을 살상하는건 허용 선에 있지만, 실제의 인물을 살상하는 것은 비허용의 선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평소 게임을 즐겼다는 이유로 "실제의 총기로, 실제 상황을 전제로 한 군사훈련"을 거부하는 것에 진정성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비논리적입니다.

설령 누군가가 군말없이 군에 입대하고, 집총훈련을 받았다고 해도 그가 한국군의 결정에 무조건 따르리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적군을 죽이는 것까지는 허용해도, 포로나 민간인을 살상하라는 지시는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적군에게 포격을 하라는 명령은 따를지라도, 적군에게 생화학무기를 살포하라는 지시는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한국이 이라크 전쟁 파병 결정을 했을 때, 이를 사유로 군복무를 거부한 현역병들의 사례도 있죠. '이 사람은 게임을 했으니 양심에 진정성이 없다, 전쟁영화를 봤으니 양심에 진정성이 없다' 이런 주장은 위와 같은 사례들을 깡그리 무시한 단세포적 사고방식에 불과합니다.


위의 세 가지 이유로, 전 지금 양심의 진정성을 게임과 영화로 판단하겠다는 검찰의 행태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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