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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09/29 01:20:37 |
Name | 아침커피 |
Link #1 | https://crmn.tistory.com/108 |
Subject | 여백이 없는 나라 |
작년 말에 일본에 출장을 갔다가 쓴 글입니다. 출장 때문에 10년만에 도쿄에 갔습니다. 그 사이에도 몇 번 일본에 간 적은 있었지만 도쿄는 정말 오랜만이었습니다. 홍콩에 있다가 도쿄에 가니 땅이 참 넓었습니다. 홍콩에 살다 보면 길에서 사람들하고 부딪히는 것과 고층 건물 때문에 하늘을 못 보는 것이 일상이 되기 마련인데 도쿄에서는 길이 넓어서 걷기에 편했고, 고층 건물들이 띄엄띄엄 떨어져 있어서 하늘도 마음껏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분명 땅은 넓은데 뭔가 마음 한 구석이 답답했습니다. 왜 그럴까 고민하던 중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의문이 어느 정도 풀렸고, 저녁 식사 때문에 식당에 들어갔다가 의문이 완전히 해소되었습니다. 여백이 없어서 그랬습니다. 지하철에 붙어 있는 책 광고는 안그래도 띄어쓰기가 없는 일본어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여백도 없어서 광고판 테두리 직전까지 글자가 쓰여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는 박찬호 선수가 인스타그램에 일기를 논문 수준으로 빼곡히 쓴다고 화제가 되었지만 일본에서라면 아무런 화제가 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광고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지하철 역사도 온갖 표지판과 안내문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환승에 대한 표지판이 있으면 또한 그 표지판의 위치를 알려주는 화살표가 바닥에 그려져 있었고, 계단에는 모든 칸마다 우측통행이라고 딱지가 붙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여백을 채우고 채우다 도저히 그 무엇도 붙일 수 없을 만한 곳이 나타나면 뜬금없는 문구라도 붙여 놓았습니다. "안전제일" 그렇게 지하철에서 어느 정도 생각이 정리된 상태로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식당 안에도 여러 가지 안내문이 붙어 있는 것은 역시나였습니다. 의자에 앉았는데 그 순간 식탁과 의자 사이 공간에 참 절묘하다 싶을 정도로 가방 놓을 공간을 만들어 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여백이 없구나'라고 생각이 완전히 정리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땅 좁고 사람 많은 것으로는 일본이 홍콩을 따라올 수 없습니다. 하지만 홍콩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넓게 삽니다. 식당 테이블이 4인용이면 그냥 거기에 앉아서 밥을 먹습니다. 그러다 보면 다른 사람이 별 거리낌 없이 바로 앞자리에, 심지어 어떤 때는 옆자리에 와 앉아서 밥을 먹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앉아서 밥을 먹게 될지언정 홍콩 사람들은 4인용 식탁에서 밥을 먹습니다. 일본은 그렇지 않습니다. 일본 유명 라면집에 가면 한국 독서실 스타일로 1인용 식탁을 만든 뒤 칸막이까지 쳐 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르는 사람과 겸상하는 것은 일본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일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일본 문화는 개인에게 그 사람만의 공간을 만들어 주었지만 그 대신 그 사람의 공간은 그만큼 작아졌습니다. 칸막이가 차지하는 공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400짜리 식탁을 홍콩식으로 4명이 공유하면 누군가는 120을 쓰고 누군가는 80을 쓰겠지만 식탁 400 전체를 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식으로 칸막이를 치고 다 조각조각 나누어 놓게 되면 모든 사람이 각각 90씩을 쓰고 칸막이가 40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 칸막이만큼 일본은 좁아집니다. 개인의 공간을 철저히 보장해 주는 대가는 공간의 축소인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개인의 공간을 만들어 주었으니 수저통도 다 따로 놓아 주어야 하고 컵도 각각 따로 쌓아 놓아야 합니다. 홍콩식이었으면 하나만 있었으면 될 수저통이 네 개가 되어야 하고, 그 만큼 개인의 공간은 더더욱 줄어듭니다. 또한 개인 공간 보장은 각 개인의 무한한 책임을 수반합니다. 내 공간 안에서 내가 겪는 문제에 대해 그 누구의 도움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알아서 다 해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본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으면 고맙습니다(아리가또 고자이마스)가 아니라 미안합니다(스미마셍)라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이를 '메이와쿠'라고 합니다) 안 그래도 좁은 내 공간 안에 모든 것을 다 갖추어 넣어야 하고, 그러다 보니 여백이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엔가 그것이 사회와 문화 전반에 걸친 보편적인 현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전철을 타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 광고판을 보니 역시나 일본어가 빼곡히 쓰여 있었습니다. 일본어와 한국어가 서로에게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언어라고 하지만 한국어에는 있는 띄어쓰기가 일본어에는 없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주욱 그럴 것입니다. 그 띄어쓰기의 공간만큼 한국인은 일본에서 답답함을 느낄 것이고 일본인은 한국에서 허전함을 느낄 것입니다.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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