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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1/07/31 09:32:33수정됨
Name   Iowa
Subject   사치품의 가치
저는 명품을 좋아합니다. 명품을 참 좋아합니다.

돈도 없는데 명품만 밝히면 옛날 유행어로 된장 남,녀라고 하지요.. 네 원룸에 이런 라운지 체어 들여놓을 뻔 했던 된장입니다.


직업상 어떤 건축물의 고급스러운 재료와 이것을 고급지게 마무리짓는 디테일, 코너부, 창틀 같은 것에 자연스레 관심이 쏠리게 되었고, 이 성향이 다른 모든 물건들에도 다 발동하게 됩니다. 이런 일을 하던 다른 친구들도 자연스럽게 마감이 자연스럽지 않은 물건들은 극혐하게 되고, 아이폰, 맥북 같은 완벽한 디테일(과연?)을 추구하는 물건들을 돈을 더 얹어 주고 사 모으게 되더군요.

언제부턴가는 '명품 시계'에 꽂히게 되었습니다. 이들 시계들은 비슷한 특성이 있어요.  쿼츠라는 가볍고 정확하고 가성비 좋은 무브먼트를 쓰는 것이 아니라 몇백년 된 기계부품으로 까다롭게 만든 시계를 만들어서 비싸게 팝니다. 가볍게 몇십 만원으로(!) 서민들 차고 다니라고 만들어주신 시티즌에서부터, 무슨 천만원대 가격부터 시작하는 랑에 운트 죄네 .. 이런 것들이 너무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저와 동년배이신 분들은 클램프라는 작가 집단의 만화책들을 기억할 거예요. 아름답게 잘 빠진 만화 주인공의 배경을 장식하던 판타지 기계부속 같은 무언가. 동심을 자극하는 이런 기계장치가 손톱만한 시계 속 부품으로 밀도있게 들어가 있는 거예요. 명품답게 보석 원석도 부품으로 몇 개 박혀있는 간지도 챙깁니다.

다행스럽게도 이것들을 사느라 월급을 탕진하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환장하는 기계식 시계들은 대부분 남성용입니다. 크기 탓인지 여성용으로는 같은 브랜드에서도 오토매틱 시계가 잘 나오지 않아요. 여성용은 얄쌍하게 쿼츠 무브먼트를 넣어 제작한 다음에, 다이아몬드 같은 것들을 박아서 남성용과 가격대를 맞춥니다(!). 내 손목만한 굵기의 남성 시계를 몇 번이고 군침 흘리면서 들여다보다가 자제할 수 있었지요.

제 월급은 사수했으나, 이러한 명품들을 전재산 바쳐가며 구매하는 다른 된장 친구들도 여럿 있을 것이구요(요즘 유행하는 카푸어 친구들이라던지..), 이걸 무슨 카시오 5만원짜리 시계 사듯 가볍게 지르는 사람들도 세상에는 있습니다. 애초에 이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가격대이구요.

몇 천만원을 시계에 투자할 수 있는 사람들은 어떤 계층일까요. 국가와 시대를 막론하고 어떠한 노동계급의 몇 달, 몇 년어치 생존 비용을 대수롭지 않게 쓸 수 있는 계층은 존재해 왔습니다. 이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물건들, 건축물들은 그 분야의 장인이 몇 날 몇일동안 최고의 집중력과 노동력을 발휘하여 만드는 것이예요. 누구 손목에서 짤랑거리고 다니는 멋진 시계는 스위스의 최고 권위자 시계 장인의 몇 날 몇일의 노동력과 같은 가격을 지니고 있지요. 명품은 이것이 가능할 때 존재합니다. 물건이 단순하게 기능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과도할 정도의 정밀함, 디테일, 장식의 완성도를 가지게 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숙련도와 노동력이 필요해요. 디테일이 1만큼 올라가게 하기 위해서는 이것에 1만큼의 노동력이 더해지는 것이 아니라 10, 100만큼 더해지게 됩니다. 완성도 50%짜리 물건을 60%로 만드는 것보다 98%짜리 물건을 99%짜리 물건으로 만드는 것이 몇십 배의 공임을 늘리는 일이기도 하구요. 즉 어떠한 명품이 완성될 정도의 노동력의 금전적 가치가 누군가에게는 일상 생활용품을 구매하는 금전적 가치와 같을 때 사치품이 탄생합니다.

이것은 지나친 일반화일 수 있어요. 최근에는 숙련공의 공임보다는 브랜드의 유명도와 눈에 띄는 디자인으로 물건의 완성도 자체는 차마 말 못할정도로 떨어지는 명품도 많습니다. 요는, 누군가를 카푸어로 만들 정도의 가격대의 물건들이 만들어지는 원리에 대해 말하고 싶었어요. 너무나 슬프지만, 내 눈을 즐겁게 해주는 명품 사치품들은 노동력의 가치에 대한 계층적 차이, 이 낙폭에서 오는 원동력으로 생성되게 된다 하는.


(아 그런데 홍차넷에 사진은 어떻게 올려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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