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2/01/03 07:18:18수정됨
Name   cotton
Subject   자기혐오
1.
시작은 초등학교 1학년 1학기 종업식을 마치고 담임선생님의 의견이 써있는 학급통지서를 가지고 왔을 때였습니다.
통지서의 작은 칸에는 빼곡한 글씨로 '매우 소극적이며 거울을 보고 말하기 연습이 필요하다'라는 논지의 글이 적혀져 있었습니다.
그게 어머니의 무언가를 건드렸는지, 저는 거실의 구석으로 몰리며 회초리로 맞았습니다. 어머니는 엄청나게 소리를 지르셨고 저는 겁에 질려 엉엉 울며 빌어야 했습니다.

1학년 1학기 때 학교생활에 적응을 못했던 건 사실이지만 2학기부터는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고, 2학년이 되자 매일 방과 후마다 같이 놀만큼 친한 친구가 생겼고 그 외에도 두루 어울릴 수 있는 친구들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수업시간에 발표를 제대로 못할만큼 적극적인 성격과는 거리가 멀었고 그래서인지 매 학기말 통지서에는 내성적인 성격이라는 내용이 항상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통지서를 들고 가는 날은 항상 어머니께 맞는 날이었습니다. 사람이 무섭냐, 왜 말을 안 하냐고 저를 잡아 죽일 듯 소리를 지르셨고 저는 고양이에게 몰린 쥐처럼 벌벌 떨며 맞고 울었습니다. 한바탕 소동이 있고 나면 내가 자고 있을 때 엄마가 내 방에 들어와서 나를 목 졸라 죽이진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초등학교 5학년이 되었을 때 운 좋게도 정말 좋은 담임선생님을 만났고 좋은 친구들을 많이 사귀게 되었습니다. 그 때만큼 학교생활이 마음 편하고 즐거웠던 때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학기말 통지서가 걱정되지 않았고 정말로 선생님께서 저를 '사교적이고 친구들과 잘 어울린다'라고 적어주셨습니다. 저는 드디어 엄마에게 안 맞겠구나 라고 생각하며 기쁜 마음으로 통지서를 보여드렸습니다. 하지만 어머니의 반응은 "네가 사교적이라고? 친구들에게 만만하게 이용당하니까 그렇게 보이는 거겠지."라는 말이었고 저는 엄청난 충격과 모멸감, 혼란을 느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는 새로 사귄 친구들의 거짓말과 이간질로 따돌림을 당했습니다. 힘든 시기였어요.
하지만 부모님께 말씀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분명히 어떻게 행동을 하길래 따돌림을 당하냐며 저를 잡아 족칠 게 분명했으니까요.
어느날은 어머니와 외출을 하고 집 근처에 도착했을 때 어머니의 지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인사를 드렸더니 지인인 아주머니께서는 "딸이 착하다"고 말씀해주셨고 그날 집에 들어가자마자 어머니는 미친듯이 소리를 지르셨습니다. 요즘 세상에 착하다는 말은 욕이라며 착해빠져서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겠냐고요. 그때부터 너 같은 애는 사회생활 못한다는 말이 시작된 것 같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 어느날 심한 감기에 걸려 목에 가래 끓는 소리가 날 정도였습니다. 기침을 할 때마다 가래 소리가 나자 어머니는 저를 화장실로 끌고 가 변기에 가래를 뱉으라고 시키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가래 뱉는 걸 어떻게 해야 할 지를 몰랐고 제가 하지 못하자 어머니는 저에게 가래도 못 뱉냐고 엄청난 독설을 쏟아내셨습니다. 그리고 가래도 못 뱉으니 설거지나 하라며 설거지를 시키시곤 동생과 거실 쇼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며 깔깔 웃으셨습니다. 동생에게는 평생 한번도 설거지 하라는 말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2.
고등학생 때부터는 성격을 평하는 통지서가 없었고 수능이라는 중요한 시험이 걸려있다보니 어머니로부터 덜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저는 중3때부터 A대학의 B과를 목표로 했으나 수능성적이 좋지 못했고 부모님께 빌어 재수를 하게 되었습니다.
재수생이라는 불안정한 신분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컸지만 학교생활 스트레스가 없는 것, 학교 수업을 들을 필요가 없다는 장점 덕분에 원하는 공부를 마음껏 할 수 있었고 저 스스로도 믿기지 않을만큼 좋은 성적을 6월부터 9월까지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9월 모의고사를 잘 쳤음에도 불구하고 '재수까지 했는데 수능을 망치면 여기서 내 인생은 끝이다'라는 강박과 스트레스에 9월 중순부터 심한 불안에 시달렸습니다. 수능 시험장에 들어가는 날, 집을 나설 때는 비교적 마음이 평안했지만 교문 앞에서 수능 응원단이 꽹과리를 치고 응원하는 소리를 듣자마자 엄청난 긴장과 불안이 시작되었고 1교시 시험지를 받았을 때 그야말로 '흰 것은 종이, 검은 것은 글씨'인 패닉 상태가 되어 도저히 글을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덜덜 떨며 겨우겨우 힘겹게 글을 읽으려 했고 절반은 정신이 나간 상태로 마킹을 마치고 펜을 책상에 놓는 순간 정말 거짓말 같이 긴장이 한순간에 없어졌습니다.
1교시 시험을 완전히 망치고 더이상 수능을 잘봐야 한다는 강박이 없어서인지 나머지 과목들은 전혀 긴장하지 않고 잘 풀었습니다. 하지만 역시나 1교시 과목 점수는 완전히 엉망이었고 집에 오자마자 대성통곡을 하며 울었습니다.

그렇게 힘없는 하루하루를 보내다 어느날 제가 목표로 했던 A대학의 B과에는 못 가지만 C과는 지원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원래 관심 있었던 과는 아니었지만 A대학의 나쁘지 않은 학과에 갈 수 있다는 사실에 너무 기뻐서 어머니께 이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는 목소리가 뒤집어질 듯 "그런 과에 가서 뭘하려는 거냐"라고 소리지르셨습니다.
완전히 의욕을 상실한 상태로 지내다 뜻밖의 희망을 발견한 저에게 어머니의 반응은 너무 충격적이었고, 당시 마음이 약해질 대로 약해졌던 저는 감히 어머니의 뜻을 이길 생각을 못해 결국 제가 사는 지역의 국립대학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A대학으로의 입학 자체도 매우 중요한 일이었지만 무엇보다 상경해서 지옥 같은 집을 떠나고 싶었던 저는 완전히 꺾이고 무기력해졌습니다.


3.
대학교 1학교 1학기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A대학을 포기하기가 힘들어 반수를 결정했고 여름방학이 되자 다시 수능공부에 매진했습니다. 그러나 방에서 제가 공부를 하고 있으면 어머니는 매번 "쟤는 대학생이 밖에 활발하게 다니지는 않고 방에 박혀서 고시공부를 하나, 뭘하는지 모르겠다"라고 소리를 지르셨습니다.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고요.
매일 같은 그놈의 고시공부, 고시공부 타령에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던 저는 수능 접수까지 해놓고도 결국은 수능을 포기했습니다.

하지만 도저히 2학기를 제정신으로 다닐 자신이 없어 2학기 휴학을 했고 고등학생 때부터 하고 싶었던 영어과외를 하기로 했습니다. 거실에서 컴퓨터로 과외 전단지를 만들고 있었는데 뒤에서 어머니가 보시곤 "너 같은 애가 과외를 한다고? 학생한테 잡아먹히지나 않으면 다행이지"라고 소리를 지르셨습니다. 그 말에 너무 충격을 받아서 과외 전단지 만들기를 3개월간 중단했습니다.
그러다 3개월 뒤 마음을 추스리고 다시 전단지를 만들어 과외를 시작했고, 다행히 영어과외는 저에게 매우 의미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해가 바뀌어 학교에 복학을 했습니다. 하지만 무기력함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고 학교 상담실을 찾아 상담을 받게 되었습니다.
저는 진로에 관한 이야기를 주제로 상담실을 찾았는데 상담을 하다보니 부모님과의 관계로 얘기가 진행되었고 위에 쓴 어린 시절 얘기를 했더니 제 말을 듣고 상담 선생님께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제 개인사에 나이가 지긋한 어른이 눈물을 흘린다는 것이 저에게는 다소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아, 내가 정말 힘든 일을 겪긴 했구나 하고 인정받는 느낌이었어요.

상담을 하면서 학교에서 열리는 독서치료 프로그램도 신청을 했습니다. 부모님과의 관계를 주제로 하는 프로그램이었고 관련 책을 읽고 자신의 경험을 말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20명이 조금 안 되는 학생들과 선생님이 넓은 탁자에 둘러앉아 한사람씩 얘기를 했고 제 차례가 되었는데, 준비된 말을 꺼내려는데 갑자기 저 스스로도 놀랄 만큼 주체할 수 없는 울음이 터졌습니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결국 제 얘기를 못했던 것 같고, 저는 메일로 담당 선생님께 계속해서 참석하기가 어렵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제 모습이 기억이 난다고 말씀하시며 메일을 보내줘서 고맙다고 하셨습니다.

이후로도 학교생활은 엉망이었습니다. 공부를 하려고 해도 책 한 장을 읽기가 어려웠고 시험에 들어가지 않게 되었으며 나중에는 수업에도 들어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학사경고를 한 한기 걸러 총 3번을 받았고 저는 밑바닥 어디까지 가는지 보자라는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었습니다. 고등학생 때까지 공부를 썩 잘했던 건 아니지만 못하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성실했던 제 모습에 비춰보면 현재의 모습은 상상도 못할 상태였습니다. 어머니에게선 자폐아라느니, 괴물이 되어간다는 말을 들었고요.
무기력이 너무 심해 다시 한번 학교 상담실을 찾았고 저학년 때 10회간 상담했던 선생님도 좋은 분이셨지만 이번 선생님은 정말 저와 성향이 잘 맞고 저를 잘 이해한다는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분이셨습니다. 상담을 진행하면서 이 분이 내 어머니면 좋겠다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고 어느날 선생님께서 따님과 통화하는 걸 우연히 듣고는 질투가 날 지경이었습니다.
제 상태가 워낙 좋지 않아 원래 최대 20회까지 상담이 가능하나 선생님께서 10회를 더 진행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약물치료를 권유받았는데 저는 정신과에 가게 되면 부모님이 연말정산 등으로 아시게 될까봐 두려웠고 또 제가 병원에 갈 상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치료를 거부했습니다.
상담 30회를 채우고 이제 선생님과 헤어지게 되었을 때 준비해온 인사말을 떨리는 목소리로 드리고 아무렇지 않은 듯 상담실을 나왔지만 세상이 무너진 것 같았습니다. 이후로 엄청난 슬픔과 우울에 시달려 한동안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였습니다.

추가학기와 계절학기까지 수강하여 이수학점을 간신히 채우고 졸업논문도 가까스로 제출하여 졸업을 했습니다.
하지만 취업할만한 스펙이란 게 아무것도 없었고 저는 애초에 취업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초등학생 때부터 대학생 때까지 어머니로부터 항상 듣던 말이 '너 같은 애는 사회생활 못한다'였으니까요. 어떻게 저 말에 진짜로 취업을 못한다는 생각을 할 수 있냐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 것 같지만 그냥.... 서서히 데워지는 냄비 안의 개구리처럼 저도 모르게 그 말에 동화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저 소수의 과외와 파트타임 학원강사일을 하며 제 용돈벌이 정도로만 돈을 벌었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려 했습니다.
그러다 보다 못한 아버지의 채근으로 아버지 지인 회사에 연봉 2천만원으로 취업을 하게 되었고 매우 힘든 시간이 많았지만 퇴사하면 굶어 죽는다는 공포심으로 죽지 못해 다니는 상태로 살았습니다.
적은 월급이었지만 집과의 거리가 멀어 1년 뒤 회사 근처로 이사를 하려고 했는데 그 과정에서 어머니는 또 저를 잡을 듯 소리를 지르셨습니다. 버스 종점과 기점의 거리였고 새벽 6시 45분에 집을 나서야 했지만 다들 그 정도는 참고 다닌다고, 뭐가 그렇게 힘드냐고 말씀하시면서요. 하지만 체력적인 문제와 어머니와 더이상 같이 있다간 정신병에 걸릴 것 같다는 괴로움에 결국 독립을 했습니다.

비록 지인을 통해 들어왔지만 제 일은 책임감 있게 했고 업무 문제로 특별히 지적 받은 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회식과 주말 행사가 잦은 조직문화가 몹시 힘들었고 무엇보다 마지막 2년간 바로 윗 직급 팀원 2명의 괴롭힘으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결국 부서장에게 퇴사의사를 밝혔으나 만류하셨고 저는 생각해본 끝에 계속 다니겠다고 했습니다.
그 후 생전 처음으로 정신과를 찾았습니다. 다만, 치료를 받으려는 의지를 가지고 간 것이 아니라 제가 우울증인지 아닌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왜냐하면 무지하게도 정신과라는 곳에 대한 안 좋은 인식이 있었고, 우울증이 아니라 의지가 나약한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병원은 2번 정도 방문했는데 선생님께서는 (물론 어느 정도의 시간 동안 제 얘기를 먼저 들으셨지만) 제가 딱 봐도 우울증이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우울증이라는 걸 받아들이지 못했고 병원 방문을 중단했습니다.

그리고 몇 달 뒤,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저를 따돌리는 팀원의 말에 순간적으로 죽을 것 같다는 감정에 압도되었고 결국 퇴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퇴직금을 축내며 놀았어요. 하지만 퇴사 후에도 당장 전 직장에 찾아가 저를 괴롭힌 두 명을 칼로 찌르고 싶다는 충동과 분노에 휩싸여 고통스러웠습니다. 아니, 칼로 찌르고 못하고 그냥 나온 저 자신이 후회되었습니다. 한편으론 막연히 퇴직금이 어느 정도 바닥 날 때가 되면 취업준비를 하겠지라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많이 지나고 정말로 퇴직금이 바닥날 지경이었는데도 전혀 공포심을 느끼지 않고 아무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저를 발견하고 안 되겠다 싶어 다른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았습니다. 검사 결과 중상 정도의 우울증이라는 진단을 받았고 그리고 지금까지 계속 병원에 다니고 있습니다.


4.
사실 이 문단을 쓰고 싶었고 그 전에 저의 인생을 어딘가 풀어놓고 싶어 위에 긴 글을 쓰게 되었어요.
고졸이면 누구나 지원할 수 있는 최저임금 정도의 일자리를 구해서 일하고 있습니다. 정규직이지만 언제 없어질 지 모르는 불안정한 일이고, 저를 괴롭히는 팀원 때문에 퇴사했는데 여기에는 더 심하게 저를 괴롭히는 팀장이 있습니다. 그래서 퇴사를 엄청나게 후회하고 있고 하루하루가 답답했습니다. 그러다 한 계기로 어느 남자분을 알게 되어 만나게 되었어요. 만나기 전 문자를 주고 받을 때도 괜찮은 분이라는 인상을 받았는데 실제로 만나보니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속으로 놀랄만큼 아주 좋은 분이었습니다. 저도 예전에 몇 년 사귄 남자친구가 있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이성적인 매력보다는 저와 성향이 비슷한 친구 느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분은 저와 다르게 외향적이면서도 편하게 느껴지는 분이었고, 아 내가 이런 사람을 좋아하는구나 라고 깨닫게 하는 부분이 있었어요. 제 인생 모든 인간관계를 통틀어 이런 사람은 처음이었습니다. 첫눈에 반한다는 게 현실에서 일어날 수 일이라는 걸 경험하게 되었고 대화하면서 더 호감이 갔어요. 하지만 상대분은 저에게 별로 관심이 없구나 라고 느껴졌고 식사 후 헤어졌는데 그 분께서 한번 더 만나보는 게 어떠냐고 제안하셔서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만나는 날의 일정을 본인이 정하겠다고 하셔서 일정이 정해지시면 연락달라고 했는데 다음날부터 연락을 주셔서 연락이 다시 만나는 날까지 며칠간 계속해서 이어졌습니다. 문자에서 느껴지는 말투나 다정함, 성격 등도 무척 좋았고요.

저도 만나는 날 새 옷을 사고 미용실에 다녀오는 등 신경을 써서 다시 만나게 되었어요. 함께 차 안에 있는 순간부터 좋았습니다. 다만 그분께서 데리고 가신 식당이 저는 한번도 먹어본 적 없는 외국 음식점이었는데 사실 입에 잘 맞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걸 티내고 싶지 않아 열심히 먹으려고 애썼고 또 원래 밥 먹는 것과 대화를 동시에 잘하지 못하는 편이라 대화에 별로 집중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 후엔 잠깐 산책로를 따라 걷자고 하셨는데 하필 그날이 기온이 많이 떨어진 추운 날이었습니다. 저는 추위에 무척 약한 편이고 자리가 자리인만큼 두툼한 패딩이 아닌 코트와 치마를 입고 온 상태라 더욱 추웠고요. 그래서 산책을 할 때 평소보다 말이 적게 나온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상대분에게 호감이 있는 상태라 그냥 걷는 것만으로도 좋았고 추우니 그만 걷자는 말도 하지 못했어요.

나중에 카페에서 음료를 사고 그분께서 선택지를 주겠다, 집으로 가겠느냐 아니면 다른 곳을 산책하겠냐고 물어셨고 저는 (날씨가 추우니) 다른 곳에 차를 대고 차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면 좋겠다고 대답했어요. 알겠다고 하셨고 운전을 시작하셨는데 가는 길이 드라이브를 갈만한 종류의 길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어디로 가는 거냐고 물어봤더니 처음 만났던 역으로 데려다 주신다는 거예요. 순간 놀랐지만 나와 함께 있는 것이 싫어서 그냥 데려다주시려는 거구나 라는 생각에 다른 질문을 못했고 허탈한 마음으로 헤어졌습니다.

그리고 예상대로 연락이 없으셨고요. 저는 제가 뭘 잘못했는지 생각해보다가 제가 그날 말을 너무 적게 했고 반응이 적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혼자 며칠을 괴로워하다가 문자로 여쭤보았는데 뜻밖의 말씀에 너무 놀랐습니다. 제가 너무 불편해하는 것 같아 일찍 데려다주었고 그분께서 열심히 대화를 이어가려는데도 피드백이 없어서 모욕감을 느낄 정도라 기분이 좋지 못했다는 장문의 말씀이었어요. 날이 선 내용으로 쓰신 걸 본인도 인정하시는 말씀을 덧붙이셨고요. 저는 그런 마음이 아니었다고, 저의 감정을 이야기했고 다시 한번 더 뵙고 싶다고 했으나 다시 안 보는 게 좋겠다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제 속마음과 전혀 다르게 비추어졌다는 저 자신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살면서 이런 분은 처음이었고 이렇게 좋은 사람을 저의 잘못으로 잃었다는 걸 도저히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어요. 살아오면서 저의 어떤 점이 싫다거나 어떤 점을 고쳐야겠다는 생각은 종종 했지만 저 자신이 싫다고 느낀 적은 없었는데...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가 나 자신인 게 싫다는 감정이 들었습니다. 이런 제가 저 자신이란 걸 견딜 수가 없었어요.

돌이켜보니 내가 빈 껍데기 같은 상태로 나갔구나 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상대에게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관심을 표했어야 했는데, 저를 오랫동안 알아온 극소수의 친구 또는 사무적인 관계의 회사 사람만이 현재 제 인간관계의 전부이다 보니 이런 자리에 나올 때 무슨 대화를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혀 생각을 안 하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런 제 모습이... 저희 어머니께서 저의 초등학교 시절부터 그토록 싫어하셨던 말없는 사람의 모습이구나, 결국 엄마 말이 맞았구나 하는....

자기혐오의 감정에 휩싸여 너무 괴로웠습니다. 내가 나라는 걸 감당할 수 없고 정말 세상에서 없어지고 싶다는 감정만 가득했어요. 집에서나 회사에서나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정말 한참을 괴로워하다가 고민 끝에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다시 한번 뵐 수 있을지 여쭤보았는데 아마 대화를 읽지 않고 대화창에서 나가신 것 같아요.

지금껏 살아온 제 인생이 너무 후회가 됩니다. 저는 이 분을 만났을 때 아, 인생이 이런 사람을 만나려고 사는 거구나 라고 깨달았어요. 하지만 형편없는 인생을 살아온 저였기에 결국.... 이렇게 되었습니다. 내가 좋은 직장에 다녔으면 위축되는 마음도 없었을 거고,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며 살아왔으면 다소 어려움이 있는 상황이라도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파악하고 대화를 잘 이어나갔을 텐데. 결국 형편없는 인생을 살아온 저 자신이 문제였어요.


5.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잠을 자지 않고 긴 글을 썼습니다. 인터넷을 하면서 단순 정보 관련 질문글을 쓰거나 댓글 등을 통해 짧은 한탄을 해본 적은 있지만 자유게시판에 이렇게 장문의 글을 쓴 것은 처음입니다. 저의 개인사가 너무 많아서 아마 시간이 많이 지나고 나면 삭제를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바보 같은 인생 이야기인 것만큼 홍차넷 회원분들만 보셨으면 합니다.

자기혐오와 우울증에서 어떻게 빠져 나올 수 있을까요. 남은 인생을 제대로 살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습니다.
마음이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47
  • 토닥토닥..
  • 조금씩 나아지고 잘 될 겁니다.
  • 당신의 용기에 경의를...
  • 선생님 잘못이 아니에요. 지금까지 묵묵히 버티고 살아오신것에 무한한 경의를 표합니다..
  • 않이 쌓아오신 내공이 엄청나신데요. 그냥 존재 자체만으로 존경스럽습니다.
  • 선생님의 앞날이 크고작은 행복들로 가득했으면 좋겠읍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이 게시판에 등록된 cotton님의 최근 게시물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2453 일상/생각아이를 재우며 6 Dignitas 22/01/19 3428 14
12449 일상/생각겨울방학이 끝나고.. 10 풀잎 22/01/17 3955 13
12448 일상/생각지방갭투자 한번 생각해봤다가 생각 접은 후기+계약갱신청구권 7 오늘 22/01/16 3992 0
12429 일상/생각리을 이야기 21 아침커피 22/01/10 4981 65
12408 일상/생각패알못의 지난달 패션 입문기 및 지름 결산 14 박태 22/01/06 4357 12
12407 일상/생각글쓰기를 위한 글 쓰기 4 *alchemist* 22/01/06 4182 7
12400 일상/생각자기혐오 19 cotton 22/01/03 4810 47
12395 일상/생각대한민국 청해부대 장병들 감사합니다 5 아리똥 22/01/01 3130 21
12392 일상/생각중년 아저씨의 베이킹 도전기 (2021년 결산) (스압주의) 22 쉬군 21/12/31 3435 29
12386 일상/생각배달비 인상에 대해서 어떻게들 생각하세요? 45 탈론 21/12/27 5929 0
12385 일상/생각저희 아이가 다른 아이를 다치게 했다고 합니다. 9 엄마손파이 21/12/27 4690 2
12379 일상/생각코로나19 무서워요... 흑; 22 *alchemist* 21/12/24 4507 26
12376 일상/생각구박이는 2021년에 무엇을 어떻게 먹었나 61 구박이 21/12/23 5534 70
12366 일상/생각국내 헤드헌터/서치펌에 대한 실망과 아쉬움 26 SCV 21/12/21 5836 14
12359 일상/생각요리 초보의 단상 21 2막4장 21/12/19 3471 15
12352 일상/생각뜻하지 않게 다가온 자가검열시대 6 sisyphus 21/12/15 4060 1
12348 일상/생각도어락을 고친 것은 화성학과 치과보철학이었다 2 Merrlen 21/12/15 3893 27
12347 일상/생각헌혈하는 것의 의미 9 샨르우르파 21/12/14 3742 23
12340 일상/생각호의에 대한 보답 (feat 고얌미) 12 천하대장군 21/12/10 4595 29
12335 일상/생각직장인무상 6 2막4장 21/12/09 3900 4
12334 일상/생각개콘은 정말 심의 때문에 망한건지 궁금하네요 14 Picard 21/12/09 4296 2
12333 일상/생각벨기에 맥주 오프모임에 참석하지 못해서 하는 벨기에 맥주 셀프시음회(어?) 10 세리엔즈 21/12/08 4005 22
12331 일상/생각회사에 확진자가 나왔습니다. 10 Picard 21/12/07 4626 2
12324 일상/생각홍차넷을 떠나며 29 플레드 21/12/04 5716 10
12323 일상/생각서울대병원 응급실에 대한 단상 6 경계인 21/12/03 4199 13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