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2/02/18 14:47:00
Name   nothing
Subject   길 잃은 노인 분을 만났습니다.
며칠 전의 일입니다.

아파트 상가의 한 편의점에서 친구를 기다리는데 한 노인분이 들어오셔서 갑자기 말을 걸었습니다.

"109동이 어딥니까?"

처음에는 부정확한 발음 때문에 몇 번을 되물었습니다. 하지만 곧 노인께서 찾으시는 게 아파트 단지 내 109동이란 걸 확인한 후에 지도 앱을 켜서 위치를 안내해드렸습니다.
하지만 그러고도 한참을 가만히 계시다가 다시 "109동이 어딥니까?" 하고 물으십니다.
좀 더 자세히 설명드려야 하나 싶어 고민하는데 한 마디를 덧붙이십니다.

"109동이 우리 집인데 어딘지를 기억이 나질 않아요."

심장이 덜컹하고 떨어지는 기분이었습니다.

마침 친구도 아직 도착하지 않아 직접 모셔다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롱패딩으로 꽁꽁 싸맨 제 외투와는 다르게 노인의 외투는 그다지 두꺼워보이지 않는 등산복 재킷이었습니다.

"한 시간을 헤맸어."

그때 기온이 영하 5도였습니다. 두꺼운 롱패딩으로 둘둘 싸맨 저 마저도 추워서 편의점 안으로 대피해있던 참이었습니다.
노인께서 한 손에 쥐고 있던 등산용 스틱인지 지팡이 인지가 유난히 위태로워 보였습니다.

가족에게 연락을 드려야 하나 싶어 댁에 가족이 있으신지 여쭈었습니다.

"아내가 있었는데 작년에 갔어. 지금은 혼자 살아요."

그리고는 다른 이야기를 한참 하시다가 씁쓸한 목소리로 다시 덧붙이셨습니다.

"109동이 우리 집인데 기억이 안나. 내 머리가 정말 이상한가봐."

노인분의 집으로 향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올해로 연세가 88살이라고 하셨고, 이 아파트에는 2017년 1월 13일에 이사를 오셨다고 했습니다. 날짜까지 정확히 기억하시는 걸 보니 기억력이 정말 좋으신 것 같다고 말씀드렸더니 조용히 웃으셨습니다.

자제분들에 대해 여쭈니 분당에서 살고 계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얼마전에 자식 분들이 점심 시간에 찾아와 같이 식사를 하는데, "아버지 괜찮냐"고 물어보셨답니다. "아무래도 이상하다"고 하셨다네요.

이윽고 109동에 도착했습니다. 노인께서는 고맙다며 몇 번이고 내게 악수를 청하셨습니다. 혹시 몇 호인지도 기억을 못하실까 싶어 들어가시는 것까지 보고 가겠다고 했지만 한사코 괜찮다며 나를 돌려세우셨습니다. 다음 번에 또 헷갈리시면 아파트 입구의 관리사무소를 찾으시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조언드리고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요 며칠 계속 생각이 나네요.
날씨는 어제 오늘 갑자기 추워지는데 또 길을 잃고 헤메시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됩니다.
핸드폰 번호라도 찍어드리고 왔어야 했는데 하는 후회도 듭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나를 잊어갈 때도 마지막까지 나를 기억하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입니다. 그런 나 자신마저 잊어가는 일이 얼마나 암담할지 감히 상상도 되질 않습니다.



35
  • 마음이 따뜻하신분..
  • 멋지십니다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2635 일상/생각대한민국 OECD 우울증 1위. 8 moqq 22/03/16 3729 0
12630 일상/생각분위기 바뀌는거 걱정되네요. 24 Picard 22/03/15 4776 4
12629 일상/생각나는 네 편 9 머랭 22/03/15 3894 39
12617 일상/생각내 차례는 언제일까? 9 방사능홍차 22/03/13 3778 1
12613 일상/생각일상의 사소한 즐거움 : 어느 향료 연구원의 이야기 (1편) 5 化神 22/03/11 4015 27
12610 일상/생각윤통이 대출 풀어주면 영끌해서 집 사야겠죠? 27 Picard 22/03/11 4724 0
12604 일상/생각인사명령서 없이 병원입원하는 병사 목격한 썰 25 매뉴물있뉴 22/03/10 4308 0
12597 일상/생각동생의 세계 21 하얀 22/03/09 5179 70
12596 일상/생각대선 전날 쓰는 회사 정치 이야기 2 Picard 22/03/09 3103 11
12592 일상/생각모 중소병원 직장인의 일기 16 자몽에이드 22/03/07 3693 23
12590 일상/생각농촌생활)봄에는 굼벵이도 석 자씩 뛴다 16 천하대장군 22/03/07 3618 22
12563 일상/생각2년간의 비대면 강의 후기 16 물냉과비냉사이 22/03/02 4184 15
12549 일상/생각코로나 안걸리는게 이젠 신기하네요 5 동현 22/02/25 3508 1
12546 일상/생각역대 대통령이 내 삶에 끼친 영향이 있나.. 11 Picard 22/02/25 3784 3
12534 일상/생각노래가 끝나고 2 심해냉장고 22/02/21 3722 17
12533 일상/생각강등&부서이동 7주차 13 Picard 22/02/21 4043 26
12524 일상/생각길 잃은 노인 분을 만났습니다. 3 nothing 22/02/18 3390 35
12520 일상/생각네거티브 효과 8 Hi 22/02/17 3676 4
12515 일상/생각내 고향 서울엔 11 사이시옷 22/02/14 3902 21
12514 일상/생각워들에 빗대어 끄적여본 나의 어리석음에 대하여 5 덜커덩 22/02/13 3697 14
12484 일상/생각임인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1 dolmusa 22/02/01 2854 3
12483 일상/생각인간관계, 그리고 연애(1) 1 늑대를불러야지 22/02/01 3802 6
12467 일상/생각시사in을 구독하기로 했습니다 21 매뉴물있뉴 22/01/26 4046 4
12459 일상/생각그 식탁은 널 위한 것이라고 이야기 했다. 2 Erzenico 22/01/22 3683 25
12454 일상/생각닷스페이스 이재명 인터뷰를 보고 9 Alynna 22/01/20 4065 0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