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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5/10/24 01:56:02
Name   Raute
Subject   네이버 스포츠의 차범근을 띄워주기 위한 번역 조작
요새 앵거스 디턴의 저작 번역 문제로 시끌시끌하죠. 오늘은 스포츠계에서 이뤄진 장난질을 하나 소개해볼까 합니다.

네이버 스포츠에는 키커의 편집장인 프랑크 루셈이란 사람의 칼럼이 이따금씩 올라옵니다. 총 편집장은 아니고, 독일 서부지역 편집장이라는데 이따금 독일축구를 즐기는 입장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발언을 할 때가 있었지만 나름 연륜있는 기자의 립서비스라고 생각하고 그런가보다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 심하다 싶은 면이 있더군요.


[특별 기획] 차붐의 운명을 바꾼 분데스리가 통산 100번째 경기
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worldfootball&ctg=news&mod=read&office_id=064&article_id=0000004634

<자, 기억해 둘 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차범근은 분데스리가 데뷔 첫 해부터 6년 동안 매년, '유럽에서 가장 권위 있는 축구전문지' 키커로부터 평균평점 3점 이상을 받았습니다. 매운 드문 기록입니다. 제 기억으론 독일 축구의 상징 프란츠 베켄바워 정도만이 이룬 기록이죠.>

제가 이상함을 느낀 건 이 부분입니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키커라는 독일 언론은 경기가 끝나면 선수들의 활약에 점수를 매깁니다. 독일 학교에서 1-6점으로 채점한다는데, 키커 역시 1점이 가장 좋은 점수고, 6점이 가장 나쁜 점수입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키커가 평점을 주는 방식이 지금과 달랐고, 지금보다 훨씬 후하게 평점을 줬습니다. 60년대에는 평균평점이 1점대인 선수들이 있었고, 7-80년대만 해도 평균평점이 2점대인 선수들이 수두룩했죠. 가령 차범근의 실질적 데뷔시즌인 79/80시즌에는 시즌평점 2점대가 100명이 넘었는데, 최근의 14/15시즌에는 20명이 조금 넘는 수준이었습니다. 상식적으로 2명만이 저런 기록을 세웠을리가 없죠. 당연히 다른 사례들이 많이 있고, 독일 기자가 립서비스를 심하게 해줬구나 싶었습니다. 그래도 좀 많이 찜찜해서 제가 다니는 독일 축구 사이트의 한 회원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독일 거주경험도 있고, 평소에도 기사 번역을 자주 해주는 분이었거든요. 그리고 아래와 같은 답변이 왔습니다.


[죄송하지만 전체는 저도 아직 시험기간인지라 읽을 여유가 없을 것 같고요, 말씀하신 부분은 제가 봐도 좀 문제가 있네요. 번역하신 분이 차붐을 추켜세우려고 아주 작정을 하신 듯...

하지만 베를린 골키퍼 그레고르 콰스텐은 이날 '인생경기'를 펼치며 차범근의 공격을 모두 막아냈습니다. 덕분에 콰스텐은 경기에 나선 모든 선수들을 통틀어 가장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는 커커로부터 자신의 최고 점수인 평점 2점(낮을 수록 좋은 점수)을 받았습니다. 당시엔 지금보다 높은 평점을 주는 기준이 더 '짰습니다'.
차범근 입장에선 하필 이날 '선방쇼'를 펼친 콰스텐 골키퍼가 야속했을 겁니다. 쉴 새 없이 그라운드를 누비고도 팀은 0-1로 졌거든요. 당시 자신의 분데스리가 통산 골 기록(36골)도 늘릴 수 없었습니다.

원문에 없는 내용은 대충 이렇게 지웠는데 제대로 번역을 한다면 아래처럼 해야겠죠.

오직 헤어타의 골키퍼 그레고어 크바스텐만이 그를 막을 수 있었다. 차범근은 이 경기에서 두 번째 최고 평점에 해당하는 2점을 받았고, 그날 올림피아 슈타디온의 잔디 위에 있었던 어느 누구도 그보다 더 뛰어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범근은 그의 기념비적인 경기에서 0:1로 패했고, 그때까지 그가 기록했던 36골에 더 이상 득점을 추가할 수 없었다.

뭔가 번역해 놓은 게 어감이 이상해서 기록 뒤져보니까 역시나 크바스텐이 아니라 차범근이 2점을 받은 거였네요. 크바스텐은 3점이었다는... 결과적으로 번역하신 분이 3점 받은 선수에게 그걸 '인생경기'라고 해 버린 셈이네요 흐흐;;

두 번째 건 더 낫기는 한데, 여튼 이것도 수정을 해보자면,

자, 기억해 둘 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차범근은 분데스리가 데뷔 첫 해부터 6년 동안 매년, '유럽에서 가장 권위 있는 축구전문지' 키커로부터 평균평점 3점 이상을 받았습니다. 매운 드문 기록입니다. 제 기억으론 독일 축구의 상징 프란츠 베켄바워 정도만이 이룬 기록이죠.

일단 지울 내용들은 이 정도 되고, 제 멋대로 다시 번역하면,

기억할 만한 점은 분데스리가에서의 첫 6년 동안 이 한국 선수가 매 시즌 가장 유명하고 진중한 독일 스포츠 언론, 키커 스포츠 매거진에서 3점 이하의 평균 평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오직 프란츠 베켄바우어처럼 절대적인 월드 클래스 선수들만이 그들의 커리어에서 도달할 수 있었던, 매우 드문 성취였습니다.]



그러니까 차범근을 띄워주기 위해 '과거에는 지금보다 평점을 더 짜게 줬다'라는 (사실이 아닌) 설명을 덧붙이고, '독일'의 권위있는 잡지를 '유럽 최고'로 바꿨고(실제로 권위가 높긴 합니다만 엄연히 본문과는 다르죠), 세계적인 수준의 선수라는 의미에서 언급한 베켄바우어를, 베켄바우어만이 이룬 기록이라고 바꿈으로써 특별한 기록으로 탈바꿈시켰습니다. 참고로 프란츠 베켄바우어는 '카이저'라고 불리는 독일 역사상 최고의 선수이자, 못해도 보통 축구 역사상 열손가락, 높게는 다섯손가락까지도 꼽히는 전설 중의 전설입니다. 그런 선수만 달성한 기록이라고 하면 굉장히 특별할 수밖에 없죠.

그냥 적당히 실감나게 의역해주는 선에서 끝났으면 될 문제인데, 괜히 이도저도 아니게 살을 덧붙이면서 망한 거죠. 이게 참 웃긴 게 프랑크 루셈의 트위터를 보면 1960년생의 레버쿠젠을 주로 담당하는 기자라고 되어있습니다. 1963년에 분데스리가가 개막했고, 1974년에 서독이 월드컵에서 우승했습니다. 그리고 1963년에 데뷔한 처음 선을 보인 선수 중 볼프강 오베라트라는 이름의 선수가 있었습니다. 60년대 분데스리가 최고의 미드필더였고, 1974년 월드컵에서 주전으로 뛰었던 전설적인 선수입니다. 즉, 우리로 치면 루셈이 초등학교-중학교 다닐 때 화려한 시절을 보낸 선수라는 거죠. 게다가 오베라트가 14년간 뛴 쾰른은 레버쿠젠의 앙숙으로 유명합니다. 자기가 담당하는 팀의 라이벌이 배출한 최고의 스타플레이어이고, 그 선수를 어렸을 때 본 기자가 활약상을 까먹었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요. 오베라트가 14시즌 동안 뛰고 은퇴할 때까지 가장 나쁜 시즌 평점이 2.62였습니다. 베켄바우어와 차범근 빼고 벌써 한 명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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