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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5/06/01 02:18:04
Name   삼공파일
Subject   [과학철학] “H₂O는 물이 아니다”
요즘 핫한 인물인 허현회 씨의 “H₂O는 물이 아니다”라는 황당한 주장을 볼 수 있었습니다. 화학 실험에서 사용하는 증류수는 1차, 2차 등으로 나뉘고 목적에 따라 다른 것을 사용합니다. 용매로 쓰이는 증류수가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증류수이고 전기화학 실험 등에서 사용하는 증류수는 이온까지 제거해야 하기 때문에 좀 더 정밀한 방법을 씁니다. 격렬한 운동으로 흘린 땀 때문에 잃은 수분을 보충할 때 나트륨이나 칼륨 이온의 균형이 깨지는 것을 막기 위해 생수 대신에 ‘게토레이’나 ‘포카리 스웨트’를 마시잖아요? 제가 마셔본 적은 없지만, 비슷한 이유로 증류수를 마시면 설사 등의 부작용이 일어날 수 있다고는 합니다. 화학실험실에서 사용하는 용매나 시약은 아무리 친숙하다고 해도 먹으면 안 된다는 사실은 차치하더라도 허 씨 주장의 허무맹랑함을 강조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H₂O에 대한 글을 쓸 수 있도록 좋은 모티브가 되어줬으니 감사를 표하고 허 씨는 잊어버립시다.

보통 CO₂는 이산화탄소(carbon dioxide)라고 읽죠? 한편, CH₃COOH는 아세트산(acetic acid)이라고 합니다. 화학자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화합물과 앞으로 존재할 모든 화합물의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정교한 규칙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실험실이나 일상에서 많은 화합물들이 ‘관용명’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이산화탄소는 규칙에 의한 이름이고 아세트산은 관용명인 셈이죠. 화학 규칙에 따르는 것이 공식적인 이름이지만, 이미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쓰인 관용명과의 혼선을 방지하고자 몇몇 관용명은 공식적이라고 인정해주었습니다. IUPAC(International Union of Pure and Applied Chemistry)라는 단체에서 이 작업을 했고 여기서 인정 받은 이름은 ‘IUPAC명’이라고 합니다. CH₃COOH는 규칙에 따르면 에탄산(ethanoic acid)라고 불려야 하지만, 널리 불리는 이름임을 인정받은 아세트산 역시 IUPAC명입니다.

그렇다면 H₂O는 어떨까요? 산소와 같은 족(group)에 속하는 황도 수소와 H₂S라는 화합물을 만들고, 이 화합물의 이름은 황화수소(hydrogen sulfide)입니다. H₂O 역시 마땅히 규칙에 따라 산화수소(hydrogen oxide)나 일산화이수소(dihydrogen monoxide)와 같은 이름을 가져야 할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IUPAC에서 규칙에 의한 이름을 공식적인 이름에서 제외한 유일한 화합물이 H₂O입니다. 관용적인 이유로 쓰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예 시스템명(system name)을 쓰지 말라고 규정해둔 것이죠. 즉, 화학자들이 인정하는 H₂O의 이름은 ‘물(water)’ 하나뿐입니다. 이는 물이라는 화합물이 가진 인류와 생명, 지구의 역사에서 고유한 위치를 인정하기 때문이죠. H₂O는 산화수소나 일산화이수소 따위가 아닙니다. 의심의 여지 없이, “H₂O는 물”입니다.

하지만 자명한 사실에 항상 의문을 제기하는 ‘철학자’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단 결론적으로 말해서 ‘H₂O가 물이 아니다’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지만, ‘H₂O가 물이다’라는 명제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기저에 깔린 사고방식을 비판하고 명제의 공고한 위치를 흔들 수는 있겠죠. 생각과 상식을 확장한다는 의미에서 재밌게 읽어보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하는 http://plato.stanford.edu/entries/chemistry/#MicWatH2O 를 대부분 참조했습니다.)

‘H₂O가 물이다’라는 명제가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여지는 데는 의미론적 실재론과 본질주의라는 관점이 깔려 있습니다. 쉽게 설명해서, 우리가 H₂O라고 할 때 어떤 고유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 물이라는 화합물을 지칭할 수 있으며 그 고유한 특성들이 물이라는 존재를 규정한다는 생각이죠. 이를 좀 더 화학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화학 교과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 두 그림이 곧 물인 셈이죠. 물리학이나 화학에 대한 지식에 따라 이 그림에서 더 많은 것들이 보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오비탈이 그려질 것이고 어떤 사람은 알고리즘이 보이거나 미분방정식이 보일 겁니다. 이렇게 간단하게 그려 놓은 그림으로도 충분히 그 모든 걸 담아낼 수 있고 물이라는 존재를 지칭하거나 표현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러한 화학적인 관점을 미세본질주의(microessentialism)이라고 한 뒤에 비판을 가하고 있습니다.

일단 가장 쉬운 것부터 지적하자면 H₂O는 일단 저 그림이 아닙니다. H₂O라는 화학식은 수소와 산소가 2대1의 비율로 구성되어 있다는 정보만 제공할 뿐이죠. 저 그림의 함의까지 포함하는 개념은 ‘H₂O 분자’고, 우리가 알고 있는 ‘물’은 H₂O 분자 하나가 아니죠. 문장을 좀 더 정확하게 손 보면 ‘물은 H₂O 분자의 집합이다’라고 고쳐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H₂O 분자라는 개념, 저 그림이 포함하는 개념만으로 물의 존재를 말할 수 있을까요?

사이비과학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한 <물은 답을 알고 있다>라는 책을 보면 형형색색의 얼음 결정 사진이 있습니다. 그렇게 아름답지는 않지만 한 번 더 확대시켜서 보면 물 분자는 그것 못지 않게 규칙성을 이루며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다른 모든 화합물처럼 고유의 미세구조(microstructure)가 있는 셈이죠. 그러니까 단순히 H₂O 분자가 모여 있다고 해서 물이 아니라 어떤 미세구조를 형성하고 있어야 물이라는 이야기입니다. H₂O 분자는 수소 결합이라는 독특한 힘을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고 이는 물의 중요한 특성 중 하나입니다. 고등학교 화학교과서에 나오죠? 또, 이온이 전혀 없는 100% 순수한 물도 전기가 전도될 수 있는데 이는 물이 자동이온화되기 때문입니다. H₂O 분자 중 하나에서 양성자가 떨어져 다른 분자로 전달되는 현상이죠. 이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물의 특성이고요. 지금 표면에 물방울이 맺혀 있는 것, 컵 안에서 음료수가 찰랑대는 것, 커피포트 안에 물이 부글부글 끓는 것, 이러한 물의 미세구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단순히 분자 하나로 설명하기 어려운, 일종의 고분자적 특성을 보이는 셈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순하게 하나 또는 많은 수의 H₂O 분자를 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러한 주장을 들은 화학자 대부분은 아마 물이 그러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 이유, 그러니까 수많은 분자가 집단적으로 독특한 미세구조를 보이는 이유는 H₂O 분자의 고유한 특성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며, ‘H₂O는 물이다’ 혹은 ‘물은 H₂O 분자의 집합이다’라는 명제에 그러한 개념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아무 상관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실제로 화학자들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H₂O가 물이라고 말하는 것이고요.

이러한 주장이 미시적 특성(microscopic property)에만 집중하고 거시적 특성(macroscopic property)을 무시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오류라고 말합니다. 화학자들이 물이라고 말하면 이는 ‘순수한’ 물을 뜻하는 것입니다. 벤젠과 물이 다른 것처럼, 10% 에탄올 용액과 물은 다른 것이죠. 그런데 실제로 이렇게 서로 다른 물질이나 혼합물을 구분할 때 사용하는 가장 정확하고 공식적인 기준은 ‘삼중점(triple point)’입니다. 어떤 물질이 고유한 삼중점을 가지는 이유를 분자적인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겠지만 그 분자 자체가 아니라 그 분자를 모여서 이루는 미세구조 때문이며, 물질을 구별하는 기준 자체도 분자가 아니라 삼중점이라는 거시적 특징이라는 점에서 분자, 혹은 분자의 구조 자체를 물질의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화학에서의 미세본질주의를 비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H₂O가 물이라는 걸까요 아닐까요? ‘H₂O가 물이다’라는 말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린 문제인데 그 기저에 깔린 사고방식, 즉 미세본질주의가 의심의 여지 없이 받아들일 만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에 보면, 어릴 적을 회상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어렸을 때부터 그리스 철학을 좋아했던 하이젠베르크는 플라톤의 정다면체에 대해 이야기하며 원자의 구조도 그처럼 매우 기하학적이고 추상적인 형태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하죠. 그리고 실제로 하이젠베르크가 규명한 원자의 구조는 그것보다 훨씬 더 추상적이고 떠올리기 힘든 모습이었죠. 많은 과학도들과 과학자들이 이런 경향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사물의 본질에 대해 환원주의적인 태도를 가집니다. 그런데 사실 그러한 태도의 기원을 따지고 따져보면 플라톤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연하다고 지나칠 수 있지만 어떤 생각에는 또 그 생각 밑에 깔려 있는 생각이 있는 법입니다. 과학자들의 기저에 있는 본질에 대한 믿음도 한 번쯤 의심되어 볼 필요가 있다고 여기는 철학자들의 생각, 심심할 때 읽어보면 재미있겠죠. (최대한 쉽게 써보려고 했는데 그래도 물리학이나 화학을 공부하면 좀 더 공감할 부분이 있는 내용이었던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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