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5/11/18 21:37:08
Name   삼공파일
Subject   위플래쉬 잡담

작년에 가장 뜨거웠던 영화 2개를 꼽으라면 버드맨과 위플래쉬였을 겁니다. 당시에 버드맨은 영화관에서 봤는데 위플래쉬는 못봐서 최근에 컴퓨터로 봤습니다. 버드맨만 본 입장에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이 위플래쉬의 JK 시몬스에게 간 것이 이해가 안 갔는데 보고 나니 납득이 되더군요. 그러나 영화를 평론할 정도로 눈이 높지는 않지만 영화적으로 봤을 때 버드맨은 위플래쉬와 비교도 할 수 없이 훌륭한 작품입니다.

위플래쉬의 연출도 좋지만 음악이 중심이 되는 서사를 JK시몬스의 연기가 끌고 가는 기본틀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역할을 합니다. 반면 버드맨의 연출은, 영화 속 연기와 서사 자체가 차고 넘치기 때문에 그것을 담아낸 자체만으로도 대단한데 그 연출 자체로 혁명적입니다. 연기 자체로만 봤을 때 버드맨의 모든 배우의 연기가 아카데미급 레전드였지만 JK시몬스의 연기가 영화를 이끌어 간 힘을 생각해보면 남우조연상은 그에게 돌아간 게 맞아 보입니다.

버드맨과 위플래쉬 모두 드럼을 중심으로 하는 음악이 중요하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위플래쉬는 말그대로 드럼 영화인데 버드맨은 어떻게 보면 드럼 영화일 정도로 음악 역시 대단하게 어울립니다. 위플래쉬를 보고 버드맨 얘기를 하게 되네요. 그만큼 버드맨은 정말 대단한 작품입니다.

위플래쉬는 괴팍한 천재와 제자라는 영화에서 많이 쓰인 구도를 가지고 갑니다. 제자를 길러내는 고독한 천재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데 여기서는 음악 밖에 모르는 교수가 제자를 극한으로 몰아 스트레스를 주면서 음악가로 키워낸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여기서부터는 스포가 될 수도 있는데 스포가 중요한 영화는 아니고 이미 위플래쉬를 보신 분이 더 많으리라 생각되니 그냥 씁니다. 결론적으로 이래 저래 얽혀서 교수는 학생을 괴롭힌 죄로 짤리고 학생도 학교를 때려칩니다. 후반부부터는 괴팍한 천재 서사가 현대 사회에서 얼마나 허무맹랑한 지 보여주는 것으로 이야기를 끌고 갑니다. 음악만 하겠다고 여자친구랑 이별을 통보한 것을 후회하는 장면에서 절정에 이르죠. 또 교수가 마지막까지 학생의 뒷통수를 치면서 괴롭히는데 음악에 대한 순수한 열정으로 학생들을 괴롭혀왔다는 말이 전부 뻥이 되게 만드는 이 장면에서도 괴팍한 천재에 대한 환상을 깨버리죠.

버디 리치라는 전설적인 드러머가 계속 언급되는데 제2의 버디 리치를 만들겠다, 되겠다라는 이야기가 반복적으로 나오고 그게 깨지면서 천재의 서사가 현대에서 얼마나 허무맹랑한 지 강조하는 것이죠. 하지만 이 마지막 씬에서 결국 음악에 미친 또라이들이기 때문에 음악으로 소통하게 됩니다. 상상의 나래를 펴보면 커튼이 내려가고 둘은 고개만 몇 번 끄덕이고 헤어져서 다시는 안 만났으리라 생각됩니다.

버디 리치를 들으면서 꿈꾸던 학생처럼 무언가 되어 보겠다고 마음 속에 열망을 품고 재능을 발휘하겠다고 믿으면서 살아간 나날들이 있었던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예전에는 누구나 그랬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좀 지나자 나만 그랬나 그런 생각이 들었고 좀 더 지나자 그런 사람도 있고 안 그런 사람도 있구나 알게 되었죠. 뭐 여튼 그런 서사는 저 영화처럼 함정입니다. 애초에 인생은 하루 하루 그냥 우연의 연속이지 서사가 아니잖아요.

중요한 건 오늘날에도 저런 또라이들이 활개를 치고 다니는데 저들을 제지했던 건 학교 상담실의 고발 프로그램이었습니다. 한국에 이런 시스템이 정착이 안되는 이유가 공무원들의 게으름과 정치인들의 부정부패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더 중요한 건 사람들이 아직까지 이런 천재 서사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초등학생이 되는 아이의 책장에 위인전 전집을 사주는 문화가 남아 있는 한 시스템이 또라이들을 제재하는 날은 요원할 겁니다.

제가 초등학교 때 아이작 뉴턴 위인전을 읽는 비극이 없었더라면 시험 기간에 이런 글을 쓰고 있는 비극도 없었을 겁니다. 생각해보니까 그 책은 서점에서 제가 엄마한테 사달라고 졸라서 읽었네요. 우리 모두 열심히 살지 맙시다. 열심히 살면 저런 친구 하나 없이 음악 같은 걸 말고는 다른 걸로 소통할 수 없는 사람들끼리 서로 싫어하면서도 모여서 사는 슬픈 인생 밖에 못삽니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버드맨과 위플래쉬를 패러디한 장면이 있었네요. 웃겨서 첨부합니다.



2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공지 티타임 게시판 이용 규정 2 Toby 15/06/19 35017 1
    15878 창작또 다른 2025년 (3) 3 트린 25/12/04 255 2
    15877 스포츠[MLB] 코디 폰세 토론토와 3년 30M 계약 김치찌개 25/12/04 195 0
    15876 창작또 다른 2025년 (1), (2) 8 트린 25/12/03 436 7
    15875 기타유럽 영화/시리즈를 시청하는 한국 관객에 관한 연구(CRESCINE 프로젝트) 19 기아트윈스 25/12/03 543 2
    15874 일상/생각큰일이네요 와이프랑 자꾸 정들어서 ㅋㅋㅋ 14 큐리스 25/12/02 930 5
    15873 오프모임12월 3일 수요일, 빛고을 광주에서 대충 <점봐드립니다> 15 T.Robin 25/12/01 540 4
    15872 경제뚜벅이투자 이야기 19 기아트윈스 25/11/30 1498 14
    15871 스포츠런린이 첫 하프 대회 후기 8 kaestro 25/11/30 424 12
    15870 도서/문학듣지 못 하는 아이들의 야구, 만화 '머나먼 갑자원'. 15 joel 25/11/27 1034 27
    15869 일상/생각상남자의 러닝 3 반대칭고양이 25/11/27 691 5
    15868 정치 트럼프를 조종하기 위한 계획은 믿을 수 없이 멍청하지만 성공했다 - 트럼프 행정부 위트코프 스캔들 6 코리몬테아스 25/11/26 891 8
    15867 일상/생각사장이 보직해임(과 삐뚫어진 마음) 2 Picard 25/11/26 680 5
    15866 일상/생각기계가 모르는 순간 - 하루키 느낌으로 써봤어요 ㅋㅋㅋ(와이프 전전전전전 여친을 기억하며) 5 큐리스 25/11/25 616 0
    15865 경제주거 입지 선택의 함수 4 오르카 25/11/25 641 3
    15864 철학/종교진화와 창조, 근데 이게 왜 떡밥임? 97 매뉴물있뉴 25/11/25 1863 4
    15863 일상/생각창조론 교과서는 허용될 수 있을까 12 구밀복검 25/11/25 1047 17
    15862 기타★결과★ 메가커피 카페라떼 당첨자 ★발표★ 11 Groot 25/11/23 609 4
    15861 기타[나눔] 메가커피 아이스 카페라떼 깊콘 1 EA (모집마감) 31 Groot 25/11/21 670 3
    15860 일상/생각식생활의 스트레스 3 이이일공이구 25/11/20 707 1
    15859 일상/생각누구나 원하는 것을 얻는다. moqq 25/11/20 638 7
    15858 오프모임[취소] 11월 29일 토요일 수도권 거주 회원 등산 모임 13 트린 25/11/19 764 3
    15857 경제투자 포트폴리오와 축구 포메이션2 2 육회한분석가 25/11/19 469 3
    15855 의료/건강성분명 처방에 대해 반대하는 의료인들이 들어줬으면 하는 넋두리 46 Merrlen 25/11/17 2005 2
    15854 경제투자 포트폴리오와 축구 포메이션 육회한분석가 25/11/17 556 6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