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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4/12/06 12:17:57
Name   joel
Subject   낡디 낡은 옛날 만화 이야기. <비트>





흔히 위대한 작품은 시대와 장소를 뛰어 넘는다고 들 합니다. 아예 오랜 세월 읽혀왔다는 사실 자체가 명작의 증거로 여겨지기도 하지요.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문학이건 만화건 영화건 간에 인간이 만들어낸 것은 결국 인간 세상의 모사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거장이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낸다 한들, 그 속으로 옮겨 그려진 세상에 공감할 수 없는 이들의 눈에는 낯선 풍경에 불과하겠지요.

물론, 명작이라 불리는 많은 작품들이 대체로 오랫동안 널리 사랑 받는 것이 그저 우연의 일치 만은 아닙니다. 예나 지금이나, 여기나 저기나 사람들 사는 모습은 의외로 비슷비슷 하거든요. 돌도끼를 든 구석기 시대의 인간이나 월가의 양복쟁이들이나 내 것을 빼앗기면 화를 낼 것이고, 폭풍우 치는 날에는 일 하지 않고 놀고 먹는 삶을 꿈꾸는 똑같은 호모 사피엔스에 불과합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우리 세상의 거죽이 아닌 속살을 꿰뚫는 높은 이해를 담고 있는 몇몇 작품들은 시대를 넘어서 여전히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이며, 우리가 명작이라 부르는 것이겠지요. 단적인 예로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 나온 "사람들이 원하는 건 하늘 위의 복음이 아닌 지상의 빵이다. 하늘 위의 복음만 말하다 떠나버린 네가, 사람들에게 빵을 나눠주기 위해 네가 부정했던 카이사르의 검을 손에 쥐어야 했던 우리를, 감히 비난할 수 있느냐?" 라는 대심문관의 이 질문은, 속세의 권력과 권력을 만들어내는 이념의 관계로 치환해서 생각해보면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작품의 훌륭함이 꼭 시간과 공간을 넘어섬을 담보하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백석의 <모닥불>이라는 시를 봅시다.

"새끼 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짚검불도 가랑잎도 헝겁조각도 막대꼬치도 기왓장도 닭의짗도 개터럭도 타는 모닥불"

서북방언의 화자가 아닌 저는 갓신창, 개니빠디 같은 단어가 무엇인지 해석을 봐야만 알 수 있습니다. 설명을 듣는다 한들 제가 저 시를 보면서 얻을 수 있는 감상이란, 저 단어들의 나열만으로도 백석이 보았던 풍경을 그려낼 수 있는 사람들이 느낄 아름다움에 비하면 아주 두꺼운 장갑을 끼고 비단의 촉감을 가늠하는 것과 같겠죠. 그러나 그 누구도 감히 백석의 시를 가리켜 졸작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수많은 매체로 재해석 되어 만들어지고 현대까지 애독 되는 반면, 셰익스피어의 <존 왕> 같은 역사희극들이 그만한 인기를 누리지 못 하는 것도 작품들의 우열 때문이 아니라 그저 그 때나 지금이나 인간은 사랑을 하고 사랑 이야기를 좋아한다는 증거일 뿐이겠지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언제나 참인 명제를 말하고 계신 교황님>



이런 관점에서 볼 때, 90년대 한국에서 나온 작품들을 지금 돌아보면 꽤 먼 거리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세상이 정말 많이 달라졌거든요.

90년대 초중반의 한국은 호황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시민들의 오랜 투쟁 끝에 군부독재가 종식되었고, 경제는 호황을 맞아 서민들이 자동차를 가질 수 있는 시대가 되었죠. 특히 젊은이들에겐 더욱 그랬습니다. 대학 졸업장은 취직 보증서나 다름없었고, 좋은 대학에 진학한 학생들은 과외만 잘 뛰면 왠만한 공장 노동자 월급 정도는 벌 수 있었으며, 교사나 공무원은 정말 인기 없는 취직처였습니다. 그 시절 10대들에게 있어 가장 큰 슬픔과 고뇌란 대학을 가기 위해 공부를 해야 하고, 공부 못 하면 사람 취급받지 못 하는 것에서 오는 반발심 정도였지요.

30년 전의 청춘 소설이나 영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라는 구호를 지금의 10대들이 본다면 '그래 맞아. 행복은 부모님 재산 순이지' 라는 조소를 흘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시절 1,20대들이 가지는 슬픔이 정해진 레일 위를 벗어날 수 없는 기차 같은 인생에서 비롯되는 답답함이었다면, 지금의 10대들은 그 레일 조차 사라져버린 허허벌판을 걸어야 하는 막막함에서 분노를 느낄테고요. 그러니 어쩌면 90년 전에 출판된 <레디메이드 인생>에서 그려진 일자리 없는 인텔리들의 비애가, 지금 젊은이들에게는 더 큰 공감으로 다가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부터 이야기 할 만화 <비트> 역시 그 90년대의 아이들 중 하나입니다. 주인공 '이민'은 얼굴이 잘 생긴 고등학생 싸움꾼이고, 선생들은 대학 갈 아이와 아닌 아이를 구분해서 관리합니다. 공부로 사람을 판단하는 학벌주의와 추한 어른들이 등장하지요. 그 시절 청춘을 보낸 분들은 어디선가 마르고 닳도록 보셨을 법한 이야기입니다. 이제와 돌아보자니 헛웃음이 나오는, 정말 낡디 낡은 이야기죠.

그러나 이 만화를 흔하디 흔한 폭력물로 치부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은, 주인공 이민이 가진 복잡하고 모순적인 성격에 있습니다.

세상은(정확히는 만화가는) 이민에게 잘생긴 외모와 출중한 주먹실력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민은 이를 살려 밥벌이를 하는 것을 거부하는 성격 또한 타고났지요. 일단 이민 본인이, 주먹질을 잘 하는 재주 따위는 사회에서 아무런 쓸모도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압니다. 조폭이 될 생각도 전혀 없고요. 조폭을 주먹으로 제압한 후 '너도 이 짓거리 때려치고 기술이나 배워라' 라고 할 정도로요. 그리고 조폭들의 의리 타령은 지나가는 개가 웃을 헛소리고, 성공한 조폭 두목은 비열한 범죄자일 뿐이라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집요하게 주입시킵니다. 90년대는 물론 00년대까지 조직폭력배에 대한 말도 안 되는 환상이 남아서 협객 운운하는 작품들이 만들어졌던 것을 감안하면 시대를 앞서간 셈입니다.

잘 생긴 외모 덕에 '가난하고 무식한' 이민이 본래대로라면 쳐다보지도 못 할 공부 잘 하는 부잣집 딸, 로미와 만났고, 모델로 일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의도 받습니다. 그러나 이민은 우여곡절 끝에 로미와 이어지는 것을 끝내 거부했고, 모델 제의도 거부해버립니다.

그러나 또한 이민은 남들이 하듯이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에 가는 평범한 생활을 견딜 수 있는 운명 또한 타고나지 못 했지요.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주먹패 생활은 그만두고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뒤늦게나마 공부를 시작하려 하지만, 이것도 오래가지 못 합니다. 90년대 청춘물의 클리셰 답게 사회의 부품으로 사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못난 성격 탓에요. 그리고 집안 환경이 쐐기를 박습니다. 어느 비 오는 날에 이민이 집에 와보니 집에는 차압 딱지가 붙고 가재도구가 길거리에 나와 있습니다. 충격을 받아 병원에 입원한 어머니를 보러 병원에 간 사이, 아버지는 길거리에서 당뇨병으로 사망했고요. 어머니는 부유한 사람과 재혼을 하지만 이민은 어머니의 행복을 빌며 집을 나옵니다.

자기가 잘 할 수 있는 것은 알량한 자존심 또는 양심 때문에 못 하고, 못 하는 것을 잘 하도록 할 재주는 또 없어서 그저 소박한 삶 정도만 원하는 이민에게 세상은 대가를 요구해옵니다. 그 대가는 바로 공부 못 하고 재주도 없는 채로 세상에 내던져진 이가 견뎌야 할 고난의 세상살이죠. 막일을 전전하며 살다가 친구들과 식당을 차려보지만 사기를 당해 한 달 만에 문을 닫고, 친구는 철거반원을 찔러서 감옥에 갑니다. 이민은 돈 20원이 없어서 라면을 살 것이냐 공중전화로 중요한 전화를 걸 것이냐를 고민할 정도로 지독한 가난에 시달리지요. 결국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라면을 사지만 냄비조차 없어서 세숫대야에 라면을 끓여먹는 장면은 한국 만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입니다. '가난이란 인간이 가진 가능성의 박탈이다' 라는 말을 이보다 더 잘 보여주기도 쉽지 않겠죠.

이후 반쯤 망가져버린 이민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그토록 거부하던 조폭들의 세계에 발을 담급니다. 그나마 일말의 양심이 남아 있기에 조폭이 된 것은 아니고, 일종의 용병이 되어 돈을 받고 싸워주는 식입니다. 그러자 여태까지 가난에 찌들었던 생활은 단번에 부유해지고, 이민도 그럭저럭 그렇게 운명에 순응하며 살게 되죠.

그러나 운명은 또다시 이민에게 잔인한 현실을 들이댑니다. 돈을 받고 싸워주던 도중, 어느 날 자신이 폭력을 행사해야 할 사람이 다름 아닌 어머니의 재혼상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새 남편과 행복하게 잘 살고 계실 줄 알았던 어머니가 여전히 자신을 그리워하고 있으며, 지금은 이혼하셨다는 사실도 뒤늦게 알게 됩니다. 결국 이 사람에게 주먹을 쓰는 걸 거부했다가 조폭들에게 쫓기게 되며 그 짧은 안락했던 생활도 끝나지요.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기술직에 취직을 하고, 그렇게 기술자로 자립하는 꿈을 꾸지만 이번에는 어머니가 암으로 돌아가십니다. 그리고 조폭들에게 폭행당해 다쳤던 허리가 악화되며 이제는 몸을 쓰는 일조차 하기 힘들어졌습니다. 여태까지 만화였던 세계가 느닷없이 현실이 되어 '사람을 때려서 돈을 번 자가 편안한 삶을 살 줄 알았느냐' 라고 꾸짖기라도 하듯, 그의 선택이 업이 되어 돌아옵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잃은 이민에게 세상이 마지막 동앗줄을 내려줍니다. 그가 이전에 결국 밀어냈던 부잣집 딸이자 그가 여전히 사랑하고 있는 로미가 유학을 마치고 이민에게 돌아오려 한 거죠. 이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부잣집 사위가 되어 편하게 살 수 있겠죠. 그러나 이민은 결국 이마저도 거부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지요. 무식하고, 몸이 망가진 사람이 할 수 있는 일, 리어카를 끌고 길거리에서 음반을 파는 노점상이 되어 생계를 잇고, 평범한 여자와 만나 결혼을 합니다. 뒤늦게 자신을 찾아온 로미에게 여전히 사랑하고 있지만 맺어질 수는 없음을 통보하면서 만화는 끝을 맺지요.

저는 이 부분에서 '역마' 라는 소설의 결말을 떠올렸습니다. 역마살의 운명을 타고난 주인공이 내면의 이끌림을 따라 육자배기 가락을 흥얼거리며 엿판을 들고 방랑을 시작하는 그 모습이, 리어카를 끌고 나온 이민의 모습과 너무나도 닮았거든요. 그래서 이 결말을 정말로 좋아합니다. 만약 마지막에 가서 둘이 껴안고 끝나는 결말이었다면 거기까지 홀로서기 위해 투쟁해온 삶의 기록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누군가는 이 만화를 보면서 그 얄팍하고 상투적인 사회비판을 조롱하며 책을 덮어버릴 것이고, 누군가는 다분히 판타지적인 '착한 주먹꾼'의 환상을 비웃을 수도 있겠죠. 따지고 보면 주인공이 겪은 고난은 결국 본인이 못나서가 아니냐 할 수도 있고요. 네. 모두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사실이, 적어도 아버지가 비 오는 길거리에서 쓰러져 죽고 어머니가 암으로 돌아가셔야 할 이유는 되지 못 합니다. 그 고난과 불행이 누구의 탓이냐는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그 억센 운명을 타고난 이가 자기 모순적인 욕망과 현실 앞에 수없이 후회를 반복하며 살아가는 처절한 생존의 기록이지요. 그것이 <비트>를 단지 흘러간 옛날 만화로만 치부할 수 없게 만듭니다.

여태껏 인생에서 했던 선택들을 오롯이 원인과 결과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겁니다. 이민이 그랬듯이, 무언가를 완전히 잘라버릴 만큼 모질지는 못 해서, 하지만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강하지는 못 해서 고통을 받고,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하는 일, 잘 해야 하는 일 사이에서 갈대처럼 흔들리는 게 사람이지요. 자신을 둘러싼 문제들에 대해 모든 걸 자기 탓으로 돌릴 수 있을 만큼 강하지도 못 하고, 그렇다고 세상과 환경만을 탓할 만큼 악하지는 못 해서 자신의 선택을 후회해야 말아야 하나, 그 자체를 고심하며 사는 사람이 수두룩 합니다. 이민이 그랬듯이, 예나 지금이나 말이죠. 이것이 이 낡은 만화가 시간의 힘을 거슬러 기억의 책장 밖으로 나올 수 있는 이유입니다.

적어도, 세상이라는 축제의 장에서 상처를 끌어안은 채 자신이 앉을 곳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다 먼 발치의 폭죽놀이를 보며 울고 있는 청춘들이 있는 한은 그럴 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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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 동생 놈 사는거랑 비슷해서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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