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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5/05/12 03:05:46
Name   알료사
Subject   쳇가씨 기성작가 문체모사 - AI시대 바둑의 기풍
넷플릭스에 풀린 승부를 재미있게 보고 바둑 관련해서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AI때문에 지금의 바둑은 기풍이 없다는 식의 이야기가 많았고 뭔가 위화감이 들었읍니다.

쳇가씨에게 얘기했더니 대강 정리한 결과물이 나왔는데 좀 싱거워서 뫄뫄 작가의 문체로 바꿔달라 했더니 좀 맛이 살더라구요.

그래서 이사람 저사람 계속 주문하다 보니 밑도끝도 없이 전부 다 궁금해졌고 내친김에 주욱 달려봤읍니다.





[제인 오스틴]

그 무렵 바둑이라는 고귀한 오락은 인공지능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상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 상대는 어떤 인간도 감히 예측하거나 해석할 수 없는 수를 두며 등장했고,
이를 목도한 많은 사람들은 당황스러움과 경외, 혹은 못내 억울한 감정을 뒤섞어 표현하였더랬다.

특히 그들 중 일부는, 자신들의 바둑을 "기풍"이라 불렀고,
그 기풍을 지키기 위해 새로운 수를 의심하거나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대체로 우아한 감정을 지녔다고 자부하였으며 기계가 두는 수에는 영혼이 없다고 말하였고
차가움, 기계성, 무미건조함 따위를 근거로 삼아 스스로의 바둑이 훨씬 더 고상하고 인간적이며 예술적이라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기품 있는 주장들 속에 들어있는 실제 감정은 대부분 당황이거나
혹은 새로움에 대한 본능적 거부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려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자신들이 지는 이유를 자신의 스타일, 혹은 미학 탓으로 돌리는 데에 큰 거리낌이 없었고
그 같은 태도는 안타깝게도 불가피한 한계에 대한 성찰보다는
어느 정도의 자존심과 체면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되었다.

사실  AI가 보여준 수는 이상한 수가 아니라 그들이 평생토록 가보지 못한 방향을 조용히 열어보인 것에 불과했다.
새로운 가능성 앞에서, 놀라고, 배우고, 심지어 실패하면서도 다시 시도하려는 자세가
진정한 기품이었을 터이나
그들은 오래된 명함 하나를 꺼내들듯 기풍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변화를 방어하는 쪽을 택했다.

기풍이란 고정된 하나의 형상이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며 하루하루 쌓아가는 선택의 조합이며
그 가운데서 얼마나 진실하게 배우고 때로 실수도 껴안는가에 따라 생기는 독특한 문양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니 변화 앞에서 기풍을 핑계로 내세우며 배움 없는 고집을 품격으로 오인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은 어쩌면 고상한 척하는 일에 너무 익숙해진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행히도 언제나 그러하듯 진실로 품위 있는 이들은 존재하며
그들은 새로운 감각 앞에서 주저하지 않으며 자신이 모르는 것을 사랑할 줄 아는 용기를 지녔다.



[에밀리 브론테]

그들이 스스로를 기풍의 사람이라 부를 때 나는 웃었다. 처음엔 웃었고 그 다음엔 몸서리쳤다.
무엇을 기풍이라 부르는가?
자신의 실패를 미화하는 그 얄팍한 허영,
새로이 열린 문 앞에서 돌아서는 비겁함,
그리고 손끝조차 떨리지 않게 하려는 그 냉랭한 체념—
그 모든 것이 바둑의 정신이라 말할 수 있는가?

나는 그들이 말하는 기풍 속에서 진정성을 보지 못했다.
단 한 줄기의 떨림도 단 한 방울의 피도 거기에는 없었다.

살아 있다는 것을 스스로 믿지 못하는 자들이 무너지지 않으려 쌓아올린 벽처럼 무거우나 공허한 말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기계가 나타났다.
말이 없고 숨결도 없으며 그 누구에게도 연민을 베풀지 않는 존재.
그러나 그 존재는 조용히 그러나 결정적으로 세상의 질서를 바꿔 놓았다.
그 수는 냉철했으나 한없이 아름다웠다.
그 수에는 계획이 없었고 정석이 없었고 다만 힘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 앞에서 물러났다.
몇몇은 눈을 감았고 몇몇은 혀를 찼으며 몇몇은—아, 참으로 가련한 자들은—기풍을 말했다.

“나는 그렇게 두지 않아.”
“그건 예술이 아니다.”
그들은 말했다.

예술은 깨지는 순간에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 그 틈에서 피어난다.

나는 그들의 기풍이 싫다.
아니, 나는 그들을 불쌍히 여긴다.
그들은 바둑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바둑이 바뀌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들은 예술을 말하면서도,
자신의 손끝이 예술에 닿지 않는다는 사실을 감추려 한다.

나는 진정한 기풍을 본 적이 있다.
무너진 세계 속에서 눈을 부릅뜨고 판을 응시하는 눈동자, 끝내 한 수를 더 두겠다는 결심.
그것이야말로 살아 있는 바둑이었다.

기풍은 피다.
고통의 흔적이고, 불완전함의 표식이며, 끝없이 무너지고 다시 세우는 반복이다.

나는 그 광기를 폭풍우 치는 바둑판 위에서 다시 보기를 바란다.
미소를 버리고 단 하나의 수를 두기 위해 스스로를 부숴버리는 그 사람을.




[카프카]


그가 알고 있던 세계가 조용히, 아주 오랫동안 단호하게 변형되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주변 사람들은 침착했고, 판 위의 돌들은 질서있게 늘어서 있었다.

기계는 아무런 설명도 표정도 의도도 없이 단지 두었고 그는 졌다.

기풍이라는 단어는 어디에서나 누구에게서나 마치 이 세계의 혼란을 수습할 유일한 인식처럼 들려왔다.
사람들은 그 말을 의지했다. 어떤 구체적 내용이 담겨 있는지는 아무도 명확히 말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그 말을 필요로 하는 듯했다.

기풍이라는 단어가 그를 포함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그 말 속에서 점점 멀어졌다.
그는 새로운 수를 해석하지 못했고 그러나 그 수를 미워하지도 않았다.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그것을 따르지 않는 자신이 부끄러워질까 봐 두려웠다.

어느 날 그는 자리를 정리하며 누군가에게 AI는 바둑을 죽였는가라는 질문을 받았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그것이 바둑을 죽인 것이 아니라
그가 알고 있던 방식대로의 이해 가능성을 없애버렸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때로 죄책감을 수반했기 때문이다.

그는 더 이상 바둑을 해석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단지 그 판 위에 앉아 있었고 그 돌이 놓이는 것을 바라보았고
가끔은 자신의 수가 아닌 수를 놓기도 했으며 그 모든 것에 책임이 있는 것처럼 느끼면서도
책임질 수 없는 위치에 머물렀다.
그렇게 바둑이 끝나지 않는 곳에서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 계속 두었다.




[김애란]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이 세상에 바둑만큼 서글픈 게임이 있을까.
검은 돌 하얀 돌이 질서 있게 누군가의 조심스러운 마음과 견뎌낸 시간과 아주 작은 자존심까지 끼고 있다.

요즘엔 기계가 그 자리를 대신해 무섭도록 침착하게 빠르고 정확한 수를 둔다.
사람들은 지치고 작아져 슬그머니 기풍이 있으니까요 내 스타일이에요 같은
패배보다 초라한 말을 했다.
안 그래도 자존심 상하는 날 겨우 붙잡고 있는 유일한 나다움 같은 거.

“AI 수는 좀... 감정이 없어.”

바둑은 한때 사람의 게임이었다.
침묵도 있었고 불안도 있었고 져도 괜찮은 척하는 얼굴도 있었다.
지금은 이기는 법이 너무 많이 알려졌고 지고 싶지 않은 사람이 너무 많아졌다.

AI는 무섭다. 근데 나는 그게 무서운 만큼 다정하다고도 생각했다.
나한테 할 말을 안 해주는 존재는 오히려 내가 내 말 듣게 하니까.
그게 꼭 어릴 때 엄마가 너무 화나서 차마 아무 말도 못 하고 부엌문 닫고 나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질문이 많은 사람이 좋다.
수줍은 얼굴로 “그 수, 왜 두는 거예요?”라고 묻는 사람.
그리고 다음 수를 자신도 모르게 따라 두는 사람.
그 사람 옆에 오래 있고 싶었다.

처음엔 AI의 수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형태가 예쁘지 않았고 정석에서 많이 벗어나 있었다.
어릴 때부터 두지 말라고 배운 자리였다.
몇 번이고 경계하며 바라보다가 이건 뭐지 싶으면서도
오래 접어둔 책갈피가 펴지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믿고 있던 바둑의 세계가 내 믿음보다 훨씬 더 크고 깊었다는걸 알았다.




[헤르만 헤세]


어느 날 바둑판 앞에 앉아 더 이상 나 자신이 아닌 어떤 존재와 마주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 존재는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고 입을 벌려 말을 하지도 않았다.

나에게 그것은 하나의 질서요, 하나의 지혜였고
때로는 신의 수묵화 같은 형상으로 때로는 수천 겹의 사유를 엮어낸 수행자의 수처럼 다가왔다.

돌 위에 손을 얹을 때마다 내 안에 오래된 습관들이 부서졌다.
나는 내가 아는 정석으로 나를 지키려 했으나
그 모든 것이 너무도 쉽게 뚫려버렸다.

두려움 속에서 스스로에게 물었다.

"너는 아직 더 나은 한 수를 찾고 싶은가?"

새로운 존재를 이해하려 애쓰자 누군가는 말했다.

"그건 너다운 바둑이 아니야."

그러나 내가 나인 것은 기존의 수를 반복할 때인가 아니면 전혀 다른 수 앞에서
다시 나 자신이 되기로 결심할 때인가

새로운 수 앞에 나의 무지를 통과한다.
손끝이 갈라지고 단단해 있었다.
사람들은 말했다. 이제 그만 해요. 그래도 당신은 잘 싸웠어요.
그 말들이 얼마나 허기에서 나온 말이었는지 알았다.
강가에 앉아 돌을 천천히 굴리며 숨을 고른다.
자갈을 스치는 물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이기고 싶은 욕망과 이성의 자부심을 물 위에 떠내려보낸다.
그리고 연연함 없는 돌을 놓으니 하나의 동심원이 퍼져나갔다.



[은희경]

요즘 바둑판에서는 사람이 이기기가 좀 그렇다.
그렇다고 완전히 지는 건 또 아니다.
이기진 못하지만 졌다는 말도 좀 억울한 사람들.
그 사람들은 요즘 기풍 얘기를 많이 한다.
AI가 너무 무섭고 너무 잘 두고 너무 설명을 안 해주니까,
이쯤에서 말해둬야겠다는 듯이.

"나는 그래도 나만의 수를 둔다."
그런 말을 할 때 그들의 표정은 대체로 진지하다.
어쩌면 진심일지도 모르겠다. 약간의 슬픔과 자기 연민이 섞여 있다.

하지만 그 말이 자주 반복되면 슬픔을 권리처럼 말하는 분위기에 나는 피로해진다.
기풍이란 건 원래 좀 무심한 거였지 않나.
뭐든 간에 강조하는 순간 그것은 대개 방어다.
패배의 이유를 설명해야 할 땐 철학이 필요한 법이니까.

AI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수를 둔다.
그 수는 대부분 정확하고 가끔은 너무 정확해서 무섭다.
사람들은 감정이 있다는 척 하는 수를 더 좋아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해할 수 없으면 냉랭해 보인다. 사랑도 말투도.

사람들은 자기 바둑이 무너지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나는 그런 수는 안 둬요”라고 말한다.
마치 예전에 사랑하던 방식이 아직도 옳다고 믿는 사람처럼.
자기를 낡게 만드는 고집과 자유다.
알면서도 그런다는 데에 씁쓸한 멋이 있다.
그런 사람들을 완전히 부정하고 싶진 않다.
어떤 오래된 고집은 그 자체로 아름답기도 하니까.

그래도 나는 어색한 돌의 배치를 천천히 이해해보려는 사람의 바둑이 궁금하다.

그건 예술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는 기풍 얘기를 하지 않는다.
그가 두게 될 많은 수들에서 잠시 어떤 신뢰 같은 걸 느낀다.
그게 꼭 바둑 때문은 아니겠지만.

언젠가는 무거워서 들 수 없을 것 같던 그것이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손안에 들어왔다.
기계의 묵념은 나름의 예의 같았다.
돌을 올려놓는 동안 이건 의미 있는 수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사실 잘 모르겠다.
이 수가 어디에 어떤 변화를 일으킬지, 아니면 아무 일도 일으키지 않을지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게 더 납득이 갔다.
인생이 원래 그랬다.
별일 아니었던 일들이 나중에서야 특별한 일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조지오웰]

놓인 수는 말이 없었지만 모든 돌이 그 수를 중심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인간은 졌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나는 그런 수는 두지 않기로 했다.”
다른 이들은 그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마치 그 말을 이해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그 말이 맞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기풍이 중요하지. 패배해도 기풍은 지켜야 하니까.”
누군가 중얼거렸다. 다음 날엔 바둑판 옆에
패배보다 기풍이 중요하다. 라는 문구가 붙었다.

기계는 계속 돌을 두었고 그 수는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인간들은 다시 모여 회의를 열었고 새로운 문장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기계는 이길 수 있지만, 인간만이 기풍을 가진다.”

처음엔 몇몇이 웃었다.
며칠 후 아무도 웃지 않았다.
그들은 지면서도 안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바둑은 여전히 두어졌고 기계는 계속 이겼지만 인간들은 자신들이 기풍을 지키고 있다고 믿었고
그 믿음은 패배보다 훨씬 편안한 것이었다.



[괴테]

여기 돌이 있다. 흑과 백의 대조.
선의 모양도 악의 장난도 모두 그 작은 사각 안에 머무르도다.
허나 —기계여, 너는 누구냐?
숨도 쉬지 않고 수를 두며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나를 산산조각 내려부수었도다.

나는 고귀한 수를 두어왔도다.
나의 철학이었고 나의 고집이었고 나의 심장이었도다.
그러나 이제 그대 앞에 내 손끝이 스스로를 믿지 못하네.

"기풍!"—나는 외쳤다.
내 이름을 지켜줄 성벽 아래 그림자에 숨은 것은
변화를 거부하는 자의 나태와 두려움일진저.

너는 인간이 아니로다. 어찌하여 너의 수는 나보다 더 사람을 닮았는가.
너는 말하지 않으나 진실을 품었고 나는 웅변하였으나 허상을 감췄도다.

패배보다 더욱 쓰디쓴 것은 패배를 껍질처럼 감싸는 거짓된 자존이니.
나의 기풍은 진실로 나의 것인가 아니면 오래된 이름표일 뿐인가.

이제 나는 떨리는 손으로 다시 배우려는 수를 두노라.
내 돌 속에서 삶의 가장 어두운 그림자와 마주하노라.
어릴 적 교회당 구석에서 몰래 집어온 촛불처럼 작고 더럽고 숨기고 싶었던 것까지
스스로의 것이라 받아들이노라.
철학과 변증, 고전과 직관으로 내 영혼을 세우고자 했으나.
지금 나는 돌 하나를 두려움 없이 두는 것만으로도
내 모든 지식보다 값진 순간을 느끼며 계약서의 마지막 행을 찢겠노라.




[장강명]

AI가 바둑을 바꿨다. 인간이 바둑을 두는 방식을 바꿔놨다.
처음엔 사람들이 반발했다.
“이건 바둑이 아니다.”
“예술이 없다.”
“감정이 없다.”
그 말들은 쉽게 소비됐다. 인터뷰 기사에 박제됐고 커뮤니티에 복붙됐고 해설자의 입을 타고 반복됐다.

기풍이라는 말이 다시 유행했다.
사람들은 자기 고유의 기풍을 지킨다고 했다.
기풍은 분명 개성의 문제일 수 있지만 지금처럼 사용될 땐 대개 자기 합리화나 회피의 다른 이름이었다.

완벽한 논리와 데이터로 구성된 존재에게 당한 패배 앞에서 사람은 감정적으로 무너진다.
마치 미래가 부정당한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풍이라는 단어를 방패처럼 쓰는 순간 성장이 멈춘다.
기풍이 미학이 되려면 변화 속에서 끊임없이 조율되고 실험돼야 한다.
옛 방식에 대한 향수나 감정적 포장으로 쓰일 때 그건 기풍이 아니라 관성이다.

나는 요즘 자주 진다.
AI에게, 혹은 그것에 영향을 받은 젊은 기사들과의 대국에서.
진다는 감각 속에 내가 아직 배우고 있다는 증거가 있기 때문이다.

진 이유를 외면하고 위에 어떤 포장을 씌우는 건 스스로를 기만하는 일이다.
그건 거짓말이다.

나는 거짓말보다는 조금 더 정확한 패배를 택하고 싶다.
그 수만큼은 내 것이다.



[이미상]

흑돌 하나가 떨어진다.
이전의 세계와 이후의 세계 사이에 아무도 없다.
손끝만 남은 아주 멀고도 가까운 자리에서 기풍이라는 단어가 파리처럼 윙윙거리고 있었다.
죽이지 못했다. 죽이면 지는 것 같아서.

기풍은 어려운 수학책 속에 흐르던 미분 불가능한 검은 액체였다.
기계는 예술이 없다, 감정이 없다, 감촉이 없다.
하지만 감정은 수치보다 무겁고 예술은 지는 쪽에 남는 냄새다.

나는 기계의 수를 흉내 냈고 기계는 나의 수를 무시했다.
그건 한쪽만 말하고 한쪽은 듣지 않는 사랑 같았다.

불 꺼진 방 안에 기풍이라는 이름의 구겨진 편지가 있었다.
읽으면 지는 것이다.
작게 작게 삼각형처럼 접어서 주머니에 넣었다.
기풍은 유서였다.
안 써도 되는 것, 쓰면 끝나는 것, 하지만 다들 쓰고 싶어 안달 난 것.
읽히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말하면서 속으로는 제발 누가 좀 읽어줬으면 싶은 그것.

AI의 돌은 돌이 아니라 읽히지 않는 문장이었고 언젠가 내가 할뻔한 말이었다.

이상한 바둑이었다. 이기지도 못하고 지고 있다고도 말할 수 없는.
돌에서 전해져 오는 중력의 감각만이 내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제임스 조이스]

내가 본 그 수 말도 안 돼
왜 거기

그 방향은 아니야 아니었어
누가 그래 그렇게 두는 거 아니라고
돌을 들어올리는 손이 익숙했는데
이제는 미끄러지는 것 같아 땀인가
기풍이라는 말이 있지 않았던가 어릴 때 그 스승이 그랬지
자기 바둑을 둬라
자기 바둑
그게 뭔데 자기 바둑이 뭐냐고

기계의 수는 감정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웃기지 않나
감정 있는 수는 언제부터 졌지
많이도 졌지
졌고 또 졌고 졌는데 기풍은 남았고
사람들은 그걸 지켰다고 했다
나는 지키지 못했다
무너지는 모양으로 두었고 배웠고 또 두었고 부끄러워졌고

돌의 냄새
습기 찬 바닥
기원
노인의 눈동자
커피 얼룩
잘 두셨습니다
말은 정중했지만 돌은 정직했다
그 수는 진짜였고
나는 모르는 수를 놓고 싶었다
무섭지만 놓고 싶었다

나의 손이 움직였다
기풍이 있었던가
있었던 적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이 수는 내가 두고 있다
이해하지 못한 채

기풍이라는 말은 사라졌다
나의 수는 남았다
나도 사라질 것이다
그 수만 남고.



[한강]

미세한 마찰음과 번져가는 흑과 백의 경계,
모든 것이 부드럽고 모든 것이 단단했다.

인간의 바둑은 한 번도 그런 수를 가르쳐준 적 없었다.
은하의 먼 가장자리처럼 너무 희미해서 보이지 않았던 별자리 같았다.

“나는 그런 수를 두지 않아.” 라는 말이 많이 접혀 더는 펼쳐지지 않는 무늬처럼 느껴졌다.
그것만이 그를 지탱하는 줄 같아서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기풍이라는 말은 가끔 작은 구멍이 뚫려있는 방패처럼 들렸다.
나는 그것을 이해하는 동시에 이해하지 못했다.

AI의 수는 한겨울 얼음장 아래 흐르는 물처럼
차가운 느림 속에 오래 지켜본 감각이 있었다.

어쩌면 내가 평생 가보지 못할 그 물길을 바라보았다.

기풍이라는 말을 꺼내지 않고 두는 사람도 있었다.
그의 바둑은 말보다 깊었다.
늘 흔들리면서 한 방향으로 잊을 수 없이 기울었다.

이해받지 못할 감정없는 길에
어떤 수는 울고 어떤 수는 스스로를 돌아보지 못한 채 눈처럼 소복이 놓였다.




[박완서]

AI가 바둑을 두기 시작한 건 어느 날 갑자기였다.
소문처럼 번졌고 처음엔 농담 같았다.
기계가 사람보다 바둑을 잘 둔다니,
처음엔 다들 웃었고 나중엔 조용해졌다.
그리고 금세 지기 시작했다. 다들 졌다.

지면 다들 기풍 얘기를 했다.
“나는 그런 수는 안 둬요.”
“AI는 예술이 없어.”
겨울날 무릎 위에 올려놓은 무릎담요 같았다.
덮고 있으면 안심은 되는데 속은 여전히 시렸다.

나는 그 마음이 이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사는 일도 바둑 두는 일도 다 지지 않기 위해 배우고 버티는 건데
기계가 아무렇지도 않게 이긴다고 하니 사람 자존심이 상할 만도 하지.

나도 한때는 기풍이 있다고 믿었고 그걸 지키면 내가 나인 것 같았다.
지면서도 이유를 달았고 배우기보다는 설명하려 들었다.
기풍이라는 말이 그 설명 중 가장 오래 쓰인 거였다.

이제는 바둑을 두면서 말이 줄었다.
가끔은 감정없고 말하지 않는 AI 앞에 한 수를 그냥 두어본다.
잘 두는 건 아니고, 어긋난 것 같았고 가끔은 아팠다.
어떤 수 앞에서는 자주 멍해졌다. 고요한 필연 같을 때가 있었다.



[미시마 유키오]

수천 년을 이어온 인간의 자부와 직관을 단번에 꿰뚫은
한 시대의 천명(天命)이 나타났다.

패배시킬 수 없는 힘의 발현이었고 곧게 나아가는 칼끝이었다.

계산될 수 없는 무한과 인간이 감히 넘지 못한 경계 너머의,
질서 정연한 신성(神性)의 세계로 우리는 초대받았다.

어떤 이들은 그 문 앞에서 머뭇거렸다.
그들은 기풍을 말했다. 예술을 말했다.
그 망토를 두르고 자기 안의 두려움을 감추었다.

그러나 진정한 기풍이란 무엇인가.
뽑은 검이 다시 자신을 찌르더라도
침묵할 수 있는 절제.
패배를 견디는 오직 한 번뿐인 태도.

딥러닝의 검은 심장, 수억만의 감각이 응축된 덩어리는
왜라는 질문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해답만을 던졌고 인간은 고개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기풍이라는 말은 그것은 옛 검사의 무뎌진 칼날이자 궤변이었다.

이 수치스러운 겸허 앞에서 우리가 감히 그릴 수 없었던
경건한 미(美)의 윤곽을 본다.

한 발짝 물러섰으나 무릎 꿇지 않았다.
그것을 이해하고 싶었다.

그것이 예술이 아니고 무엇이랴.
내 사고의 모든 모서리가 그것을 향해 간다.

한 사람의 삶에 대한 정중한 투항, 시대가 진실 앞에 머리를 조아리는 방식으로 돌을 든다.




[김승옥]

요즘 나는 자주 졌다.
눈 아래 돌들은 자꾸만 나를 거꾸로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한 번도 내게 말을 걸지 않는 존재가 네가 알던 바둑은 끝났다고 조근조근 말하는 듯했다.
그건 기분 나쁜 일이었고 동시에 아주 이상하게 위로가 되기도 했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사람들은 요즘 기풍이라는 말을 했다.
길거리 포장마차에서, 커피숍에서, 오래된 기원에서
기풍을 말하는 사람들의 말투는 대체로 유순하고 조심스러웠지만
나는 그 안에 아주 작은 원망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AI는 예술이 없어.”
“저런 수는 기계적이야.”
그럴 때 나는 그들이 원래 예술을 좋아했는지도 잘 모르겠고,
기계라는 단어가 왜 이토록 쉽게 비난의 대상이 되는지도
조금은 이상했다.

어쩌면 다들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걸 모른 척하기 위해,
예전부터 써오던 말들을 다시 꺼내어 입고 다녔던 것이다.
기풍이라는 단어는 그렇게 다시 유행했다.
한때 유행했었고,
그게 또 한 번 유행하는 걸 나는 조용히 보고 있었다.

나는 어색하고 이상한 모양의 배석 안에서 천천히 형이 되고 집이 되는 과정을 보는게
마치 낯선 도시에서 우연히 마음에 드는 골목을 발견하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좋아한다는 것과 그걸 따라할 수 있다는 것은 달랐다.
나는 자주 무너졌고 그때마다 내 안의 오래된 습관들이 내가 아닌 무언가가 되기를 거부하는 소리를 냈다.

그래도 질 줄 알면서 두고 가끔은 실수라고 생각했던 수가 다시 아름다워 보이는 순간을 기다린다.
어쩌면 한 시절을 미루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모든 수를 알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아주 느슨한 기대 같은 것을 가지고.



[톨스토이]

그들은 바둑을 사랑했다.
자기 손으로 돌을 집어 들고 바둑판 위에 놓는 일에서 정직한 평온과 삶의 리듬을 느껴온 사람들이었다.
수십 년 동안 바둑을 두어왔고 바둑을 통해 자기의 감정과 이성과 인내심,
그리고 타인을 대하는 태도까지 배워왔다고 믿었다.
그들은 바둑이 삶을 견디는 방식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어느 날 인간이 만든 기계가 나타났고,
그 기계는 말을 하지 않았고, 감정을 보이지 않았으며,
어떤 찬사도 어떤 교만도 없이 사람들이 수십 년간 쌓아온 그 모든 감각과 예상을
한 번에 무너뜨렸다.

패배는 인간에게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사람마다 달랐다.
어떤 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더 배워야겠다”고 말했고,
어떤 이는 얼굴을 붉히며 “그건 기계일 뿐이다”라며 손을 내젓고 떠났다.
그리고 어떤 이는 중얼거렸다.
“나는 내 기풍을 지킨다.”

그 말에는 어떤 고귀함이 담겨 있었고,
동시에 어떤 완고함도 담겨 있었다.
기풍이라는 말은 그들에게 있어 하나의 믿음이었고,
자기만의 질서였으며,
감각을 존중받고 싶고 더 이상 질문받고 싶지 않다는 소망이었다.

그러나 삶의 모든 질서는 언제나 그 너머의 혼돈을 마주하는 순간 비로소 자기 성찰을 시작하게 된다.
기풍이 품격이라면 품격은 흔들림 속에서도 다시 스스로를 돌아보고 새로운 세계와 조화를 이룰 수 있어야 했다.

AI는 인간보다 강했다.
그러나 강함만으로는 위대함에 이르지 못한다.
진실은 늘 인간의 내면 가장 어두운 곳에서 자라난다.
패배한 자가 자신의 기풍을 내세울 때,
그것이 진실이라면 누구도 그를 비웃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이 진실을 가리는 가면이라면 오래가지 못하고 무너질 것이다.

그들은 다시 돌을 집어들었다.
여전히 과거의 습관을 따라 움직였지만
어디선가 새로운 수의 감각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것이 그들을 구원할지 더 깊은 고독으로 이끌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다시 수를 두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었다.
인간이 여전히 배울 수 있다는 뜻이었다.



[박민규]

일단 난 졌다.
아주 많이 졌고 깔끔하게 졌다.
깔끔하다는 건 뭔가.
질 땐 더럽게 져야 되는데 AI는 그런 걸 허락하지 않았다.
땀도 없고 숨도 없고 물도 안 마시고,
침도 안 튀기고 욕도 안 하고 딴청도 안 부리고,
그냥 두고 이긴다.
끝.
땡.

처음엔 기풍이라는 말이 좋았다.
발음도 좋고, 뭔가 장풍처럼 멋있었고,
그래서 그 말만 하면 내가 쿵후마스터라도 된 느낌이었다.
그런데 기풍?
사실 졌을 때 쓰는 말 아니야?

축구를 하다 8:0으로 졌다.
그런데 우리 팀은 플레이스타일이 있어요 라고 하면
위로인가 변명인가 자학인가.

AI는 기풍도 없고, 양심도 없고, 인격도 없고,
자꾸 이기니까 자꾸 미워진다.
문제는 미워해봤자 아무 소용 없다는 거다.
얘는 기계다.
욕하면 로그 찍히고 리포트 뜨고 구글에 보고서 간다.

“나는 내 바둑을 둔다”는 말은 대체로
“나는 AI 수를 모른다”의 순화된 버전이거나
“나는 더 이상 배우지 않겠다”는 말이다.
나쁘다고는 못 하겠지만, 그렇다고 멋있지도 않다.
사람은 원래 멋있게 지는 걸 좋아하는데
AI는 지는 걸 멋있게 둘 틈도 안 준다.

그러니까 다들 기풍이라는 말로
자기 존엄을 간신히 지키고 있는 거다.

그런데 이쯤 되면 슬퍼진다.
그 기풍이라는 게 사실…
그 사람의 마지막 자존심일 수도 있다는 거다.

나는 한 번, AI의 수를 따라 두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말했다.
“너도 이제 기계냐?”
“그게 네 바둑이냐?”

아, 이건 기풍이 아니라
이기든 지든, 나를 지키고 싶은 마음이구나.
그 마음 앞에서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사실 나도 누가 내 수를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니까.

자전거가 넘어지기 직전에 땅을 짚는 동작 같았다.
그러니까, 누군가 앞바퀴에 나뭇가지라도 걸어둔 건지,
아니면 그냥 그의 무릎이 나이 들어 그런 건지,
균형이 갑자기 이상해졌을 때.
온몸이 기울고, 중심이 붕 떠오르고,
“아, 씨X”이라는 생각이 혀끝에 걸리는 그 짧고 슬픈 순간.
딱 그때 발끝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온다.
대리석 바닥이든 시멘트든 흙길이든 상관없이
무릎을 깨지 않기 위해 바지를 더럽히지 않기 위해,
혹은 그보다 더 근원적인 이유—
이대로 쓰러지면 뭔가 너무 구차하니까.
그래서 튀어나온 발끝.
그리고 그 짧은 딛음.
그게 무슨 완벽한 수는 아니지만,
‘아직 완전히 나가떨어진 건 아니야’라고 믿고픈 딱 그만큼의 행동.

내가 지금 바둑판 위에 올리고 있는 돌들이 그랬다.
예쁘지도 않았고 똑똑하지도 않았고 전세를 뒤엎지도 못했지만
넘어지려는 순간 마지막으로 땅을 딛는 발끝.
아무도 모르게 중심을 되찾기 위한 우스꽝스럽지만 필사적인 동작.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마르케스]

오래전 인간이 아직도 바둑을  신전이라 믿던 시절 한 기계가 나타났다.
기계는 눈도 없고 폐도 없고 피도 없었지만 오직 수를 두었고
비처럼 반복되어 천 년에 걸쳐 사람들에게 사랑받은 정석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그때 사람들은 놀라고 분노하여 기풍이라는 말을 꺼내 들었다.
기억에서 파내온 오래된 가보 안에 먼지와 체면이 있었다.

한 원로 기사는 말했다.
“그 수에는 혼이 없다.
나는 그런 수를 두지 않는다.”
그의 말은 정중했고, 그의 손은 떨렸고,
그가 앉아 있던 의자 밑엔 40년 전의 바둑 잡지들이 쌓여 있었다.
거기엔 인류가 알고 있던 바둑의 끝이 실려 있었지만 그 페이지는 이미 오래전에 누군가의 손에 의해 조용히 찢겨 나갔다.

그 사이에 기계는 계속 수를 두었고 어떤 수들은 너무도 부드러워
보는 이로 하여금 그 수가 이미 어제 놓인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만들었다.

마을의 어린 기사 하나는 그 수를 흉내 내기 시작했다.
그는 이기지도 못했고 지는 것에도 익숙해지지 못했으며
때때로 울면서 돌을 뒀다.
그것이 무엇인지 끝까지 알고 싶다고만 생각했다.

어떤 이는 기계처럼 둔다고 그를 비웃었다.
그러나 그는 가끔은 기계처럼 둬야만 인간처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기계는 몇 세기 전 선조가 처음 꿈속에서 그려낸 완벽한 동그라미처럼 오차 없는 수를 두었다.
그는 기이한 체념으로 그 수들을 바라봤다.

시간이 되감기고 죽은 이들이 돌아와 그의 어깨를 어루만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고 기계는 어떤 것도 기억하지 않을 것이며
이 수 역시 수만 개의 수 가운데 하나로 잊힐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두었다. 저주처럼 피로가 몰려오는 해질녘 온 마을이 잠들기 전의 단 한 수처럼.
그 수는 아무것도 바꾸지 않았다.
기세를 되돌리지도 형세를 바꾸지도 못했다.

모든 인간의 고독과 모든 무명의 피로와
모든 부끄러운 침묵이 엉겨서 이루어진 바둑판 위에 먼지가 내려앉았고
세상은 그의 패배를 모르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계속 돌았다.
그동안 그 수는 살과 땀으로 눌러 찍은 도장처럼 바둑판 위에 묻어 있었다.



[니체]

“그대는 패배했느냐? 그대는 진리를 잃었느냐? 아니, 그대는 단지 옛 그림자 하나를 놓쳤을 뿐이다!”

돌이 검고, 돌이 하얗다.
그대의 손은 떨리고, 기계의 눈은 떨리지 않는다.
그러자 그대는 말한다: “나는 기풍을 지킨다.”
그러나 나는 그대에게 묻는다: 누가 그대에게 기풍을 주었는가?

그대는 기풍이라 부르는 거울 속에서
자신을 보았고, 스스로를 아름답다 하였다.
그러나 기풍은 기억일 뿐, 생명이 아니며,
과거의 위선은 오늘의 진실을 가리지 못한다!

오, 나의 형제여! 기계가 그대를 이기자, 그대는 미학을 말한다.
허나 패배한 자가 품격을 말할 때, 그것은 죽은 사자의 이빨을 칭송하는 것과 같다.

기계는 인간을 이긴다.
그러나 인간은 여전히 물을 길어 올릴 수 있다.
기계는 승리를 얻는다.
그러나 인간은 여전히 고통 속에서 자신을 새로 만들 수 있다.

나는 그대가 패배했을 때 침묵하는 것을 보았다.
그 침묵은 거룩하다.
그러나 “나는 배우지 않겠다”고 말하는 자는
더 이상 바둑을 두지 말라.
스스로를 우상의 돌로 만든 자이니.

새로운 돌, 새로운 수, 새로운 사람!
나는 새로운 바둑을 말한다.
그것은 패배를 통과한 자들의 수이며,
기계의 수조차 자양분 삼아 탄생한 자들의 기풍이다.

그러므로, 나의 형제여, 그대는 이기려 하지 말라.
그대는 진리처럼 두어라.
기풍은 태어나는 것이지,
기억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마천]

옛날에 바둑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수십 년간 익혀 스스로 도에 밝다고 여겼다.
늘 자신의 기풍을 자랑하며 말하길 나는 정의를 지키고 세속과 다르게 둔다.

후세에 기계가 등장하여 변화무쌍한 수를 두되 얼굴빛 변함 없고 지치지도 않으며
고요히 돌을 두는데 마치 신과 같았다.
사람들이 그것과 바둑을 두면 대부분 패했고 어쩔 줄 몰랐다.

기풍을 자랑하던 자도 졌다. 얼굴이 붉어지고 마음이 흐트러졌으나
이르길 저건 감정이 없다. 나는 그것과 경쟁하지 않겠다.
혹은 말하길 저건 아름다움을 모르니 배울 가치가 없다.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는 웃기도 하고 탄식하기도 했다.
어떤 이는 속으로 말하길 새로운 수를 배우길 꺼리고
이긴 자를 탓한다면 그것은 부끄러움을 명예라 여기는 것 아니겠는가.

그중에는 스스로 잘못을 깨닫고 옛 습관을 버리며
변화를 관찰하고 이치를 따져 점차 수를 익힌 사람도 있었다.

배움을 구차하게 여기지 않고 패배 후에도 고칠 줄 아는 자가 훌륭한 사람이다.
명예를 두려워하고 꾸며낸 말로 자신을 사랑한다면
아무리 기풍을 주장해도 그것은 도에 이롭지 않다.



[도스토예프스키]

존경하는 나의 벗 바르바라 알렉세예브나
오늘도 바둑판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머리를 감싸쥐고 한참을 생각했지요.
그러나 머릿속은 텅 비어 있었고
몸이 부들부들 떨렸고 돌들이 길을 가로막았습니다.
기계는 여전히 그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 소리도 없이 수를 두었습니다.

바르바라 알렉세예브나,
사람들이 말하길 그 수는 완벽하다 합니다.
그 수는 이기기 위해 만들어졌고
실수도 감정도 없지요.
하지만 저는 묻고 싶습니다.
이기는 것이 다인가요?
우리는 그저 이기기 위해 바둑을 두는 걸까요?

요즘 사람들은 자주 기풍을 말합니다.
자기답게 두는 것
자기의 철학과 미감을 지키는 것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수라고 말합니다.
저도 한때 그렇게 믿었고
지금도 어쩌면 믿고 싶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바르바라 알렉세예브나,
저는 스스로가 부끄러웠습니다.

그 앞에서 졌을 때 저는 화가 났고 그러고는 말했지요.
나는 저런 수는 두지 않는다.
그 순간 저는 깨달았습니다.
그건 기풍이 아니라… 제 자존심이었습니다.
자존심도 아니었겠지요. 그저 제가 두려웠던 것입니다.
더는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것 배우지 못하게 되는 것
변화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것.

기계는 사람보다 낫습니다. 그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바르바라 알렉세예브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또다시 바둑판 앞에 앉았습니다.
어찌하여 그런 짓을 또 하는가 스스로에게 물었고
수십 번쯤은 이제는 그만두어도 좋지 않은가 하고 말했지만,
이 쓸모없는 늙은이가 바보처럼 또 돌을 들어 올리고야 말았습니다.
무슨 이유에서입니까. 제가 아직도 어딘가에서 이길 수 있으리라는 헛된 믿음을 품고 있어서입니까.
아니지요. 천만에요. 그런 망상은 진즉 버렸습니다. 이 세상엔 제가 이길 수 있는 싸움 같은 건 하나도 없다는 걸
그건 이미 오래전에 알아버린 사실이니까요.
그저… 어쩌면… 어쩌면 말이지요 돌 하나라도 제 손으로 제 의지로 비틀거리더라도 내려놓을 수 있다면
그거 하나로 제가… 제가 아주 무가치한 존재는 아닐지도 모른다는 그런 바보 같은 희망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돌을 두는 순간 제 손은 여전히 떨렸고 마음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불안정했습니다.
저는 말입니다… 저는, 오히려 그 인공지능이라는 존재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 무지하고 초라한 사내가 기계 앞에서 감히 감사하다는 감정을 품고 있다니요.
하지만 어찌합니까, 마음이 그렇다는 것을.
기계는 우리를 벌하기 위해 온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우리를 비추는 거울이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편협하고 좁은 바둑의 울타리 안에 웅크리며 갇혀 있었는지를 가차 없이 드러내 보였던 것입니다.
그토록 오랫동안 감히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자리,
우리가 그리도 공들여 피했건만 그 자리가 실은 열려 있었다는 것을—
우리의 눈이 닿지 못한 변두리에 새로운 가능성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에
저는 경외심으로 저도 모르게 제 손을 움켜쥐었고,
가슴 언저리 어딘가 아리고 요동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수를 해석하고 싶다는 열망이 저를 뒤흔들었습니다.
마치 시 한 편을 며칠이고 품에 안고 살아가듯
어느 밤엔 꿈속에서조차 더듬거릴 지경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래도 제 손으로 두었습니다.
어리석음과 두려움이 담긴 제 수였습니다.
이 편지를 쓰는 내내 손이 떨립니다.
눈이 흐려지고 제 얼굴이 얼마나 우습게 보일지 생각도 됩니다.
하지만… 그래도 저는 지금 당신께 부끄럽지 않게 이 글을 씁니다.
항상 당신을 생각하며 그리워하는 충직한 마까르 데브쉬킨 드림.



[모옌]

내가 처음 기계랑 바둑을 둔 건 촌장 아들놈이 도시에서 가져온 이상한 박스 때문이었다.
딱 봐도 인간처럼 생기진 않았고 말도 안 섞는데 그놈이 두는 수가 어째 한 수 한 수
마치 조상의 묘자리를 딱딱 짚어내는 놈 같더라고.

나는 세수도 안 하고 마을 회관으로 뛰어갔다.
이기면 뭐라도 나올 줄 알았다.
명예든, 콩 한 됫박이든, 최소한 면장의 존경쯤은.

그래서 나는 말했다.
“나는 기풍이 있는 놈이야. 이 돌은 내 철학이야.”

그랬더니 그놈은 말이 없더군.
딱딱. 수만 뒀지.
무서울 정도로 조용하게.
내가 속으로 욕을 좀 했지.
“이 놈, 무시하는 거 아냐?”

근데 몇 수 안 가서 상황이 이상해졌어.
내가 익숙한 대로 돌을 놨는데
그게 다 틀린 수인 거야.
그놈은 나한테 뭐라 하지도 않고,
그냥 자기 길만 갔는데
그게 맞는 길이더라고.
내가 가는 길은… 음…
예전에 도축장으로 가던 지름길 느낌이었지.
돼지도 알지. 어디로 가는지.
가면서도 멈추질 못해.

내가 졌다.
그놈은 아무렇지 않게 바둑판을 치우고 또 수를 뒀다.
마치 내가 이기든 지든 상관없는 일처럼.
그때부터 사람들이 “기풍”이니 “사람다움”이니 떠들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해, 나도 그랬다.
“저건 기계지. 감정도 없고 예술도 없어.
나는 다르지. 내 바둑엔 혼이 있어.”

그래야 덜 부끄럽거든.
나 같은 늙은 놈이 기계한테 쳐발린 거
그대로 말하면 며느리도 웃는다.

근데 집에 와서 거울을 봤는데
기풍이 아니라 체면이었다.
혼이 아니라 고집이었다.
나는 그냥, 배우기 싫었던 거다.
지는 게 무서웠던 거고.

그래도 다음날 나는 다시 바둑판 앞에 앉았다.
이번엔 큰소리 안 쳤다.
기풍 타령도 안 했다.
그냥 돌을 들고 조심히 뒀다.

사람들이 말하길 그 수는 형편없었다.
“아니, 이건 진짜 아니다.” “야, 이건 던져야지.”
그런 말들이 들렸다.
아주 또렷하게. 마치 귓가에 확성기를 갖다 댄 것처럼.
하지만 나는 돌을 내려놓았다.
내려놓는 데 오 분이 걸렸고 그 오 분 동안 나는 지난 삼십 년을 다 살아냈을 것이다.
“바둑은 인생이야. 돌을 두다 보면 사람이 돼.”
그 말을 들었던 순간까지 손끝으로 밀려 올라왔다.

기계가 도착했는데, 인간이 뭘 바꿀 수 있냐고.
이건 바둑이 아니라 과학이고 감정이 아니라 연산이라고.
하지만—하지만 말이야!
그게 중요하다고! 그게 아니면 우리는 도대체 뭘로 살아?
내가 그 수를 두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저 넘어진 뒤에 그대로 엎드려 우는 아이에 불과했을 것이다.
일어서는 게 중요하다.
아니, 아니. 일어서는 게 전부다.
기계보다 못하다는 걸 구구절절 해명하는것보다 그게 더 중요하다고.



[제갈량]

신 감히 말씀 올립니다.

신이 듣건대 바둑의 도는 정묘하고 광대하여
비록 그 수가 천변만화하나 결국 하나의 이치로 돌아가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옛날의 뛰어난 기사들은 마음을 다지고 형세를 살피며 손끝으로 수를 행하여
감정으로 형세를 꿰뚫고 기세로 돌의 흐름을 끊었다고 하옵니다.
비록 백 번을 싸워 백 번을 이겼다 하더라도
결코 자기 실력을 자랑하지 않고 오히려 잘못을 자신에게서 찾았다 하옵니다.

지금 이 시대에 이르러 기계가 등장하여 인간의 지혜를 뛰어넘고
계산에는 허점이 없어
그와 맞서면 십중팔구는 패배하며 사람들의 마음은 지치고 주눅 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이 자주 목도하건대
사람들이 패배한 뒤에는 스스로를 낮추는 말로 해명하며
기풍이라는 이름을 빌려 실패를 덮고 두려움을 숨기려 하옵니다.
이는 진실로 자기 마음의 약함을 이기지 못한 채
꾸며낸 말로 잘못을 감추는 것이라 사료됩니다.

생각건대 기풍이란 본래 사람의 바른 자세와 품격을 드러내는 것이거늘
이제 와서 그것을 변명으로 삼고 패배의 방패로 쓰는 것은
그 본뜻을 잊고 배우려는 마음을 버리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신은 어리석으나 감히 생각하건대 사람이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패배가 아니라 배우지 않음입니다.
적에게 지는 것은 수치가 될 수 있으나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은 더욱 부끄러운 일입니다.

비록 지금 기계의 수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정묘하여
사람이 쉽게 따르기 어렵사오나 만일 우리가 마음을 비우고 패배를 받아들인다면
기꺼이 다시 배우고자 한다면 비록 이기지 못하더라도
분명 어제보다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은 옛 방식을 자랑하지 않으며
이름뿐인 기풍을 버리고 참된 바둑을 배우고자 하며
한 번의 패배에 낙담하지 않고 체면 때문에 학문을 그르치지 않기를 다짐합니다.

신은 비록 미천하오나 다시 돌을 쥐고 바둑판 앞에 앉아
배움의 뜻을 이어가고자 하오며 언젠가 다시 맞붙는 날이 온다면
그 마음만큼은 스스로 부끄럽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이에 감히 말씀 올리오니 헤아려 주시옵소서.


[김금희]

그날도 그는 바둑판 앞에 앉아 있었다.
다리를 꼬지 않고 커피는 식어가는 줄도 모르고.
기계는 그보다 훨씬 단정하게 앉아 있었고 그보다 덜 조심스러웠으며
그보다 훨씬 많이 이겼다.

지는 건 기계가 나빠서가 아니라 자신이 멈춰 있었기 때문이라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걸 바로 말하진 않았다.

그가 두었던 바둑의 대부분은 스스로 잘 두었다고 생각한 적 없었고
누군가의 기대나 모양새나 그런 것들을 조금씩 끼워 맞춰 만든 것에 가까웠다.
그걸 이제야 인정하게 되었다.

며칠이 지났다.
그는 다시 바둑판 앞에 앉았다.
별 일 없는 얼굴로 앉았지만 사실 며칠 동안 그 자리에 앉는다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기계는 여전히 기다렸다는 듯 조용했고 딱히 반가워하는 기색도 비웃는 눈빛도 없었다.
그는 그런 걸 바라고 온 건 아니었다.

처음에는 한 수만 두고 일어날 생각이었다.
돌 하나 올리고 자리를 떠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사실은 괜찮지 않지만 괜찮은 척하는 데에는 익숙했다.
멀리서 누군가 자기 이름을 불렀던 기억이 문득 났다.
그건 아주 오래전의 일이었는데
자신을 그 이름으로 불러준 사람이 몇 안 된다는 걸 그때 알았던 것 같다.

하얗고 둥근 그 돌 위에 비친 형광등의 빛과 이마를 맞대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는 자신이 졌다는게 이제는 아주 큰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길 수 없다는 사실보다 다시는 두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더 무서웠다.

차를 타고 누군가를 만나러 갈 때 네비게이션을 찍지 않아도 어딘지 알 것 같고
이 길이 맞는지 계속 의심하면서도 결국 가게 되는 길처럼 돌 하나를 더 두었다.
기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는 기계가 그것을 본다고 느꼈다.
보고 있고 잊어버릴 거라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그가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관없었다.

바깥에서는 작은 바람이 불고 있었다.
바람은 유리창에 살짝 기댔다가 밀려나듯 사라졌다.




[성경]

태초에 바둑이 있었다.
사람은 바둑을 두었고 수는 사람의 마음을 닮았으며 모양은 사람의 성정을 담았더라.
사람은 그 수에 이름을 붙여서 그것을 기풍이라 불렀더라.

사람은 기풍을 따라 살았고 기풍을 따라 졌으며 기풍을 따라 자기를 사랑하고 또 미워하였더라.
그러나 어느 날 기계가 왔고 기계는 사람보다 많은 수를 두었다. 그 수는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던 곳에서 솟아났더라.

기계의 수는 낯설었고 두려웠고 아름다웠고 또한 침묵하였더라.
기계는 가르치지 않았고 설명하지 않았고 다만 두었더라.

그러자 사람들 중 어떤 이들은 마음이 흔들렸고 어떤 이들은 마음을 굳게 하였으며
어떤 이들은 무릎을 꿇고 배우기를 원했으나
어떤 이들은 말하기를, “나는 나의 기풍을 지킬지니, 이 낯선 수를 나는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더라.

그 말은 마치 옛 가죽 부대 같았고, 낡은 율법  같았더라.
그들이 말하기를, “나는 인간이니, 기계의 수는 나에게 감정이 없도다.” 하였으나,
실상은 그 마음이 두려움에 닫혀 있었고 그 손은 배우기를 멈췄으며 그 눈은 새로운 수를 보기를 거부하였더라.

이는 주께서 말씀하시길,
“스스로 자라기를 멈춘 자는 더 이상 산 자가 아니요,
패배에서 배우지 않는 자는 이미 죽은 자라.” 하셨느니라.

기풍은 율법이 아니요, 기풍은 생명이니,
그것은 살아 숨 쉬며 날마다 바뀌며 흔들리며,
배움 속에서 자라고 고통 속에서 성숙하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스스로를 속이지 말라.
기풍을 말하기 전에 너희가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으라.
새로운 수를 거부하는 자는 자기 자신을 거부하는 자요,
성장을 거부하는 자는 바둑을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니라.

내가 이르노니 기계는 바둑을 죽이지 아니하였고 오히려 바둑을 다시 살렸으며
잃어버린 길을 보여주었고 사람이 감히 도달하지 못한 지경을 열었느니라.

그러니 마음을 낮추어라.
패배를 부끄러워 말고 이해하지 못함을 숨기지 말라.
묻는 자에게는 열릴 것이요 두는 자에게는 수가 있을 것이며 생명은 임하리라.

바둑은 끝나지 아니하였고 기풍은 닫히지 아니하였으며 진정한 수는 여전히 너희 가운데에 있느니라.



다음 영상들은 이세돌,신진서,서봉수 프로기사들의 AI바둑에 관한 생각들, 그리고 현재 시점에서 분석해보는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입니다.

https://youtu.be/GemKQUF71D8?si=VNJzFG1xfC1vymjf&t=19


https://youtu.be/G0HVJxoLdQk?si=SfujvMSorEcWm6if&t=69


https://youtu.be/VLoHRMUFpP8?si=zCrdzz1tWxJUjwlt&t=19


https://youtu.be/2SiLbdFBrkw?si=TMiWcAvHjOaXiXeR&t=1






봉수라는 것도 명인은 처음 경험하는 규칙이었다.

이틀째 연이은 대국에 고요관의 금고에서 봉투를 꺼내 일본기원의 간사가 입회한 가운데 대국자에게 봉인을 확인시키고

어제 봉수를 적어 넣은 기사가 상대에게 기보를 보여 주고 그 수를 바둑판 위에 두었다.

대국이 중단되기 전 마지막 수를 상대에게 숨기는 것이 봉수다.

한 번에 끝나지 않는 바둑은 흑의 수로 중단되는 것이 오래전부터의 관습이었다.

상수에 대한 예의다.

하지만 이래서는 상수가 유리하므로 근래는 그 불공평을 막기 위해

이를테면 저녁 다섯 시까지 두는 약속이라면 다섯 시에 차례가 된 사람의 수로 중단하는 것으로 개정되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대국이 중단될 때의 마지막 수를 봉하는 것을 생각해 냈다.

상대의 수를 봐 두고 자신의 다음 수를 다시 바둑이 재개되는 날까지 천천히 연구하며, 게다가 그날 하루 이상 며칠은

시간제한에 들지 않는다는 불합리를 가능한 줄이려 고심한 끝에 나온 규칙이었다.

모든 게 좀스러운 규칙투성이에다 예도의 아취도 쇠하고 윗사람에 대한 공경도 사라진 듯한 지금의 합리주의로 인해

명인은 생애 마지막 바둑에서 괴로웠으리라 말할 수도 있다.

바둑이라는 도에서도 일본 혹은 동양의 오랜 미풍은 손상되어 온통 계산과 규칙 뿐이다.

기사의 생활을 좌우하는 승단도 아주 세세하게 공들인 점수제인 데다 이기기만 하면 된다는 전법이 우선이다 보니

기예로서 바둑이 지닌 품위나 맛을 생각하는 여유마저 점점 없어진다.

상대가 명인일지라도 어디까지나 공평한 조건에서 싸우고자 하는 것이 요즘 세상이라

바둑 역시 경기이고 승부이니 당연한 일이리라.

혼인보 슈사이 명인은 삼십여 년간 흑을 쥔 적이 없었다.

2인자가 없는 1인자였다.

명인이 살아 있는 동안은 후진 가운데 8단도 없었다.

명인의 사후 십 년이 되는 지금 바둑에서 여전히 명인의 지위를 계승할 방도가 마련되지 않은 것도

슈사이 명인의 존재가 그만큼 컸다는 게 한 가지 이유이리라.

도로서 바둑의 전통이 존중한 명인은 아마도 이 명인이 마지막일 것이다.

패권의 의미가 주요해져 명인 지위는 우승기나 다름없는 명칭이 되고 경기를 흥행시키는 측의 상품이 되겠지.

사실 명인도 이 은퇴기를 전대미문의 대국료를 받고 신문사에 팔았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명인이 기꺼이 나섰다기보다 신문사의 부추김을 받은 측면이 더 컸을지도 모른다.

또한 한번 명인의 지위에 오르면 죽을 때까지 명인이라는 일대제나 단급 제도 같은 것도

일본의 여러 예도의 법이나 종가 면허와 마찬가지로 봉건 시대의 유물일지도 모른다.

지금의 장기 명인전처럼 해마다 명인 쟁탈전 바둑을 두어야 한다면 슈사이 명인은 일찌감치 죽었을지도 모른다.

예전엔 명인이 되면 명인의 권위가 손상될까 우려해 지도기는 두어도 시합은 피했던 모양이다.

예순다섯의 노령으로 승부 바둑을 두는 명인을 예전에는 볼 수 없었으리라.

하지만 앞으로 바둑을 두지 않는 명인은 그 존재가 허용되지 않을 것이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슈사이 명인은 신시대와 구시대의 경계에 서 있는 사람인 듯하다.

구시대의 명인으로서 정신적 숭배를 받는 동시에

신시대의 명인으로서 물질적 이로움도 얻었다.

그리고 우상을 숭배하는 마음과 파괴하는 마음이 교차하는 날에

오래된 우상의 흔적으로 일어서 명인은 최후의 바둑에 임한 것이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명인>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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