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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5/12/24 17:41:29
Name   트린
Subject   또 다른 2025년 (14)


14.

외풍이 불고 머리 위에선 반쯤 깨진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이 어둠을 선처럼 가르는 방.
옆에서는 낮게 흐느끼는 수진을 껴안은 상태로 보민은 자신은 오늘밤 그녀처럼 자다깨다를 반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생각과 달리 보민은 무안할 정도로 푹 잤다. 피곤과 함께 알 수 없는 이유로 헤어진 수진, 자신의 처지 같은 그동안 그를 괴롭혔던 문제가 일시에 해소된 탓 같았다.
눈 떠 보니 주변엔 햇살이 가득했다. 얼굴이 울어서 부은 수진이 그를 들여다보며 쿡쿡 웃었다.

"언제 깨나 했네."
"미안해."
"미안하긴. 한 명이라도 쌩쌩하면 좋지."

두 사람은 간단히 아침을 먹고, 번갈아 공용 화장실을 다녀와 몸 치장을 마쳤다.
보민은 새벽에 그랬던 것처럼 침대의 더러운 담요를, 수진은 가벼운 파카를 둘렀다.  

"아침이라 눈에 띄지 않을까?"
"우린 차를 타고 가. 중구까지는 못 걸어. 그래서 복장은 몸만 가리면 상관없어."
"중구를 가는구나. 그런데 차가 있어?"
"아는 사람이 있어."

두 사람은 모퉁이를 돌아 얼마 지나지 않아 "대영 퀵 용달"이라고 적힌 사무실에 도착했다.
사무실 옆에는 화물 하적장이었다. 새벽이라 팔레트에 실린 화물과 지게차, 포터, 파란색 다마스 들 모두 제자리에 놓인 채 단 한 사람만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다.
졸려 보이는 오십대 남자는 컵라면과 믹스 커피를 사무용 책상에 놓고 번갈아 먹고 마시다가 수진이 유리문 앞에 서서 인사하자 눈이 커졌다. 그가 벌떡 일어나서 다가와 손수 문을 열어주었다.

"아이고, 어떻게 여기를 다."
"차가 한 대 필요해서요."

사장은 수진과 보민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표정과 복장에서 따로 말할 필요없는 궁함이 드러났으리라.
수진이 덧붙였다.

"중구를 가야 해요."
"오늘 거기 장난 아니라던데요?"
"네?"
"시위하던 노인 분이 밤에 살수차 살수에 맞아 사망하셨대요. 안 그래도 오늘 주말이잖아. 대규모 인원이 모인다고 아주 난리예요. 방송에는 짧게 한 줄로만 처리되고 인터넷에는 관련 글이랑 관련 영상이 밤새 올라갔다 지워졌다를 반복했대요."
"그랬군요."
"아예 안 보셨구나."
"네에."

현대인들에겐 거의 중독 같은 핸드폰과 인터넷을 둘 다 접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사장은 또 하나를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사장은 아무 말 않고 벽면에 걸린 수많은 키 중 하나를 빼 건넸다.

"기름은 절반쯤 있으니 충분할 거예요. 수동 몰 줄은 알죠?"

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나가려다 말고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그런데 차를 어떻게 돌려 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그냥 서울 시내 아무 데나 두세요. 한 일주일 뒤에 고지서가 오겠죠, 뭐."
"...이렇게까지 해 주시다니요."
"조카놈 살려주신 분인데 괜찮아요. 그것 하나만 해 줘요. 어디서 해명할 일 있으면 자는 사람에게 훔쳤다고요. 저도 그렇게 말할게요. 더 해 드릴 건 없나요?"

수진은 대답 대신 깊게 고개를 숙였다. 사장도 마주 숙여 뻣뻣이 서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그 분위기에 당황한 보민도 정중한 예의를 표해야 했다.
밖으로 나오며 보민이 물었다.

"뭔가 엄청 잘해 줬나 봐."
"조카가 부대 운전병이었는데 전복 사고를 작전 중 차량 파손으로 바꿔줬어."
"와!"
"밤샘을 엄청 시키는 데라서 그 친구 책임은 아니라고 봤어."
"폭로에 완벽히 성공해야겠네."

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조사를 빡세게 하면 저 사장님의 호의가 금세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저분의 고생을 막으려면 폭로로 여론의 힘을 등에 업어야 했다.
다마스는 담배 냄새가 조금 나고 낡았지만 그 외에는 이상없었다. 선팅은 아예 없었다. 두 사람은 전면의 햇볕 가리개를 내려 어떻게든 얼굴 반 이상을 가리려 애썼다. 차가 출발하는 동안 사장은 이쪽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손을 흔들어주었다.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동안 벌써 CCTV를 두 개는 보았다. 보민은 어제까지만 해도 아무 관심없던 물건이 하루만에 이렇게 소름끼친다는 사실에 놀라웠다.  
많은 게 변했다.

'그리고 앞으로 많은 게 또 변하겠지.'

그걸 살아서 봐야 한다. 수진과 함께해야 한다.


강주경 상사는 옵스코어 스타일의 하이컷 헬멧, 소음 차단 헤드셋, 주무기로는 소음기와 이오텍 광학조준경을 단 HK416, 부무장으로는 글록 17, 멀티캠 위장색 군복 위에 뛰기 편한 플레이트 캐리어 방탄조끼 차림으로 완전무장한 상태였다. 그는 총은 멜빵을 조절해 편하게 푼 상태에서 헬기 도어에 걸터앉아 패드로 안수진과 김보민의 데이터를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지금쯤 어딨을까.'

이들에 대한 체포는 방첩사가 전담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707은 같은 부대 소속 배남 중사가 사망한 사건이면서 테러 용의점이 있단 핑계로 이 사건에 발을 들인 상태였다. 평소 같으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계엄 상황, 권력을 가진 집단은 무엇이든 가능하였다.
상부에서는 총기가 탈취된 사실에 엄청난 무게를 싣고 모든 수사 인력을 급파해 그들을 뒤쫓았다. 박안수 전 자유대한민국수호회의 회장 건으로 다툼이 있었다는 증언도 빼놓지 않았다. 당장 배남은 이십여 명과 함께 박안수를 만난 적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에게 업무를 시킨 주경은 무엇이 문제인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배남이 맨날 찍는 인증 셀카와 휴대폰 GPS 데이터를 정보사 출신 안수진이 이용 안 할 리가 없었다.

'내가 미쳤지.'

뻔히 인스타에 미친 놈인 걸 알면서 그날 배남에게 가지 말라고 안 시켰으면. 혹시 모르니 그 녀석만 숙소 근신을 시켰다면. 아니면 하사 한 놈 붙여서 운전수 겸 감시역으로 붙여만 놓았다면.
주경은 벌떡 일어나 심호흡을 하면서 몸을 활짝 폈다. 방탄 헬멧은 헬기 바닥에 던져놓았다.

"으어어, 짜증난다."

바로 뒤에서 내부 공조 히터를 튼 채 잡담 중이던 부하 대원들이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움찔했다. 지시라도 하려는 줄 안 모양이었다.
겨울 바람이 강주경을 거세게 몰아쳤다. 주경은 전후좌우 어딜 보나 서울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롯데 타워 주변 절경을 바라보며, 스트레칭을 했다. 부하 대원들은 이해한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 대기는 좀이 쑤시는 일이고, 여기는 쉽게 올라올 수 없는 곳이었다. 독수리가 된 듯, 서울의 지배자가 된 듯 하였다.
주경은 찬바람에 정신이 좀 들었다. 뜨거워진 머리가 식었다.
지난 다음 과거를 후회하는 건 패배자의 사고이다. 자신은 그러지 말아야 했다. 항상 먼저 돌진하여 쟁취해야 했다.

'안수진의 사고를 따라가 보자.'

안수진은 조밀한 CCTV 망을 피할 정도의 인재이다. 똑똑하다. 그럼 이 자료를 폭로하여 살인을 무마하려 들 것이다.
그럼 믿을 건 언론인데 일단 개인 언론은 사실상 종말이었다. 일개 유투버를 모두 막지는 못하지만 공신력 있던 인기인들은 모두 죽었거나 죽기 직전이었다. 사이버 검열도 횡행했다. 인터넷3사의 협조를 받아 특정 단어를 필터링하는 AI들은 인터넷 방송 속 키워드를 훑어 지연하거나 차단하였다.
매스 미디어도 뚫기는 쉽지 않았다. 현재 모든 방송사에는 AI처럼 계엄사 요원이 상주하여 기사를 검열하고 방송 관제실에서 방송을 꺼버릴 수 있었다. 그러니 이메일로 보내든 기자에게 제보하든 방송은 나가기가 쉽지 않았다. 설사 한 기자가 내보낸다고 해도 바로 딥페이크로 몰아가며 AI 조작 영상으로 매도해 덮어버릴 수 있었다.

'그럼 답은 시위뿐이야.'

쉽게 제어되지 않는... 일테면 군인과 경찰관을 싫어하는 대규모 군중 속에서 연단에 올라간다면? 모든 사람들 보는 앞에서 데이터를 설명하고 스크린에서 보여주면서 선동한다면?
물론 예전 광주에서 하던 대로 그렇게 데이터가 퍼지든 말든 모두를 죽여서 입을 막는 방법도 있겠지만 21세기에는 불가능하였다. 당장 지금도 살수차니 뭐니를 동원해도 시위에는 100만 명이 모이고, 잡아도 잡아도 시위 조직 위원들은 자취방 곰팡이 피듯 계속해서 생기고 있었다. 데이터 복사와 공유도 쉽고, 프로젝터 같은 영상 장비도 싼 것도 확산에 한몫했다. 특히 오늘은 사망자도 생겼고 주말인 토요일. 시간이 흐를수록 압박당하는 수진은 바로 지금을 노릴 것이다.
막아야 한다.
결심을 마친 주경은 헬기로 걸어가 내부 통신이 가능한 헤드폰으로 파일럿에게 말을 걸었다.

"출발하자."
"어디로 가시렵니까."
"일단 시청에 앉자. 공역이랑 비행장 비워놓으라고 해."
"넵!"


"안수진... 이 미친년이."

김기환 소령은 팀장실의 블라인드를 내리고 문을 잠갔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새벽에 안수진이 배남 중사 살해 용의자로 특정되었다는 긴급 타전이 왔다. 방첩사 수사팀이 들이닥쳐 그녀의 PC와 접속 로그를 압수해 가는 건 시간문제였다.
문제는 그녀가 김기환이 직접 권한을 부여한 기술 정보 검열관이란 사실이었다. 그녀가 호기심, 혹은 의도를 가지고 접근했을지도 모르는 '금지된 데이터'들이 방첩사의 손에 들어간다면?
관리 소홀의 책임은 김기환에게 돌아온다. 단순히 옷을 벗는 게 아니라, 그 또한 '보안 위반자'로 B-1 벙커로 끌려갈 수도 있는 사안이었다.

'놈들이 오기 전에 내가 먼저 봐야 해. 뭘 건드렸는지.'

김기환은 떨리는 손으로 관리자 모드에 접속했다. 안수진의 ID로 로그인 기록을 조회했다.
다행히 외부망 접속 기록은 깨끗했다. 하지만 내부 인트라넷에서 군수 물자 납품 승인 및 검수 로그 탭을 클릭하는 순간, 김기환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수진이 B-1 벙커 공급 목록을 보았다.

"이걸... 왜 봤어."

김기환은 마른침을 삼키며 수진이 열람했던 페이지를 똑같이 띄웠다.
화면에는 그녀가 집요하게 파고든 흔적이 남아 있었다. 김기환은 수진이 교차 검증한 데이터의 흐름을 따라갔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빼낸 수배자들의 지병 데이터. 그들이 매일 먹어야 하는 약품들이 B-1 벙커로 대량 납품되던 시기. 그리고 약품 주문이 딱 끊기는 시점. 여기에 밀폐 가능형 강철 캐니스터 발주까지.
김기환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신음했다. 머리를, 얼굴을 긁고 싶은 마음을 필사적으로 참아야 했다.
이게 방첩사 수사관들 눈에 띈다면? 김기환은 즉시 체포될 것이다. 왜 부하가 이런 1급 기밀을 뒤지도록 방치했느냐고, 혹시 네가 시킨 거 아니냐고 추궁당할 것이다.

'지워야 해.'

김기환은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그냥 삭제하면 내 ID가 남는다.'

방첩사 포렌식 팀은 삭제된 데이터 복구의 귀재들이었다. 단순 삭제는 "내가 범인입니다"라고 자백하는 꼴이었다.
그는 안수진의 열람 기록이 저장된 서버의 특정 섹터를 노려 에러를 발생시킨 다음 기술병에게 노후화된 하드를 교체하도록 지시했다. 당연히 노후화된 하드는 디가우징 처리를 거쳐 완전 파쇄에 들어갈 것이다.
기술병과 통화를 마친 김기환은 땀에 젖은 안경을 벗어 책상에 던졌다. 이제 물리적 증거마저 '전산 장애 처리 규정'에 따라 합법적으로 가루가 될 것이다. 그는 '반역자'가 아니라, 기껏해야 '장비 관리 소홀'로 징계 좀 받는 무능한 장교가 되는 길을 택했다.

'됐어. 이제 전산상으로는 아무도 몰라.'

하지만 그녀의 머릿속에는 진실이 남아 있다. 그리고 그녀가 어딘가에 백업해 둔 파일이 있을 수도 있다.
김기환은 땀에 젖은 안경을 벗어 책상에 던지고 보안폰을 들었다.
이제 이건 국가의 안보가 아니라, 김기환 자신의 생존이 걸린 문제였다. 안수진은 살아서 잡히면 안 된다. 방첩사가 그녀의 입을 열게 해서도 안 된다. 기환이 직접 나서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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