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6/01/04 20:15:54
Name   트린
Subject   또 다른 2025년 (20)

20.

엄청난 고함과 연속된 발사 소리는 닫힌 차 안에서는 그리 크게 들리지 않았다.
방독면 차림의 기현은 화풀이처럼 잠 깨는 껌을 세게 씹었다. 옆에서 보는 운전 부사관이 혀라도 깨물까, 볼이라도 크게 다칠까 우려할 정도였다. 누가 뭐라든 매너 깔끔하고 양식 있는 상관이다. 걱정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일이 잘 안 풀리시나 봅니다."

기현은 말을 붙이길 기다렸다는 듯 재빨리 대답했다.

"특전들 때문에 못 살겠어요 진짜."
"그쪽이 괴짜를 많이 모아놨죠. 힘든 병종을 지원해서 찾아가다니."
"미쳤어요. 아니, 국방장관이랑 우리 대빵이랑 한편이잖아. 그럼 업무 협조 요청했을 때 좀 들어줘야죠. 내가 진짜 위험하게 만드나? 아니죠. 707이 포위당하면 현장을 급습할 명분이 생기니까 수방사 체포조에 형사들 쫙 보내면 군중 속에서 안수진도 잡고, 김보민도 잡고 근무 끝 행복 시작인데 이것 참."
"맞습니다. 소령님도 근무 평정 플러스, 저도 플러스. 그런데 마음대로 안 되네요."
"제 생각인데."

기현의 눈빛이 오싹하게 빛났다. 부사관은 처음으로 그에게서 뭔가 섬뜩함을 느꼈다.

"707은 이미 박안수 쪽에 줄을 선 것 같습니다. 안수진 어머님이 한 말이 맞는 것 같아요. 그렇지 않고서야 우리한테 협조를 안 할 필요가 없어요."
"그, 런가요."

선후, 진위를 잘 모르는 대화 속에서 그는 의문이 생겼다. 707이 뭘 했다고 소령이 저렇게 미워할까?
대답을 고민하는 중에 구급차 차체를 누가 훑는 게 느껴졌다. 기현과 운전 부사관 모두 입을 다물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자는 옆면까지 시간 들여 쓸다가 천천히 조수석으로 다가와 경례를 붙였다.
방독면 차림에 오렌지 색 옷을 입은 키 큰 남자였다.

"세종로 119 안전 센터 소속 최민석 소방위입니다. 선탑자가 누구십니까?"

김기현은 당황하지 않고 경례를 붙이며 대답했다.

"정보사 김기현 소령입니다. 소속을 물어보시려고 오셨나요?"
"그렇습니다."

최민석 소방위는 차량을 눈으로 노려보며 말했다

"여기는 저희 구역인데 소속 불명의 구급차가 있다는 제보를 받았습니다. 해서."
"그러셨군요. 저희는 현재 계엄령에 의거 특수 작전입니다. 사전 고지 없이 위장한 것은 사죄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긴요한 작전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어요. 너무 노여워하지 마세요."
"...알겠습니다."

민석은 누가 봐도 짜증이 난 상태였다. 그래도 그는 끝까지 정중하게 경례한 뒤, 최루탄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운전 부사관이 물었다.

"체포할까요?"
"무슨 죄목으로요? 저 사람은 저 사람 할 일을 한 거잖아요. 내버려두세요."
"언론이나 인터넷에 말하면."
"그때 체포하면 되죠. 그리고 무서워서라도 못 말할 겁니다. 아무리 그래도 계엄이잖아요."
"네, 알겠습니다."
"대신 자리는 좀 바꾸죠. 바깥에서 잘 안 보이는 쪽으로."
"네, 알겠습니다."

구급차로 위장한 작전 차량은 시동을 걸고 서울 광장에서 서울 시청 쪽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계엄군 진영을 떠나는 민석은 올 때와 다르게 구급낭이 가벼워졌다. 처음과는 다르게 활기가 가득해진 수진은 하나는 대포폰, 또 하나는 자신의 폰이라고 설명했다. 그녀는 도착한 뒤에 납 상자를 열고 핸드폰을 켜달라고 했다.
민석은 흥분하지 않고 구급낭 안에서 그대로 이행한 뒤, 도색을 살피는 척하면서 청테이프로 끈끈이를 만들어 붙인 핸드폰들을 차량에 붙이는 데 성공했다.

'정정. 아예 흥분을 안 한 건 아니지.'

원래는 관등성명을 다르게 말해야 하지만 민석은 구급차를 악용한 점이 화나 따지듯 물었다. 자신을 옳은 방향으로 인도한 조직의 대표적 상징이 바로 구급차이다. 그런 차를 계엄군이 감시와 정찰을 위해 바꿔 사용한다는 사실은 참을 수 없었다.
민석이 처음부터 소방사로서의 임무를 자각하고, 생명을 지킨다는 맹세를 무겁게 여긴 건 아니었다. 그저 점수가, 체력이, 경력이 되어 돈을 벌러 들어온 직장이었다. 그러나 해가 갈수록 자신이 살린 사람들이 늘어났다. 밤에 기분 좋게 잘 수 있었고, 아침에 기분 좋게 일어날 수 있었다. 순전히 옳은 편에 서서 항상 칭찬받는다는 사실은 이렇게나 유쾌했다.
같은 맥락에서 민석은 수진과 보민의 부탁을 들어주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다. 젊은 친구들이 어떻게든 살아보겠다는데 어른 된 입장에서 빨리 나서지 않은 게 부끄럽기도 했다.

'...하나에게도 떳떳하고.'

하나는 여고생인 민석의 조카로 시위 도중 진압봉에 눈을 맞아 시력이 마이너스대로 떨어졌다. 나중에 이 이야기하면 아주 좋아할 것이라 생각하며 민석은 안전히 아수라장을 빠져나갈 타이밍을 노리기 시작했다.


강주경 상사는 핸드폰 게임을 가지고 노는 것도 지쳐 아예 탁자 위에 누워 자고 있었다. 요새 밤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누가 깨우지 않았다면 두 시간은 더 잘 수 있었다. 흔들어 깨운 건 한영교 중위였다.

"상사님, 움직였습니다."
"응?"

주경은 고양이처럼 사뿐하게 지면에 발을 디디며 물었다.

"뭐가 움직인다는 거야?"

노트북 한 대와 패드 두 개, 핸드폰 한 개를 번갈아 사용하던 영교는 잔뜩 흥분한 상태였다.

"보십쇼."

주경은 영교가 내민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영교의 모니터에는 광화문 일대 지도가 펼쳐져 있었고, 그 위로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박힌 수백 개의 기지국 아이콘이 떠 있었다. 그 사이로 타깃 1, 2라고 적힌 마커가 붉은색으로 점멸하였다. 타깃 1에는 ahn, 타깃 2에는 park이라 적혀 있었다. 두 개는 겹쳐 있었는데 그냥 봐서는 영교가 왜 흥분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총이랑 폭탄 빼고는 모든 기계에 약한 주경은 투덜거렸다.

"이게 다 뭐야?"
"추적 중인 핸드폰을 보여주는 겁니다. 원래 상시 추적 중인 핸드폰은 두 개, 즉 안수진 중위와 김보민 중사 소유 핸드폰입니다. 그런데 40초 전부터 안수진 중위의 핸드폰과 대포폰 경고가 함께 떴습니다. 심지어 두 대는 같은 자리에 모여 있습니다."
"대포폰? 들어는 봤는데 정확히는 몰라."
"타인의 명의로 개통되고, 정작 쓰는 사람은 다른 사람입니다. 보통 치매에 걸린 노인이나 노숙자 명의로 개통하죠. 해당 번호는 비리 혐의로 낙마한 박안수 전 자유대한민국수호회의 의장과 관련 있습니다. 그의 보좌관 자택을 군 검찰이 압수수색했거든요? 그때 나온 개설 리스트 중 한 대예요."
"번호는 아는데 기기 자체는 실종된 물건이다?"
"그렇죠."
"그 사람들이 뭐하러 대포폰을 만들었대?"
"당연히 금융 사기는 아닐 테고, 비밀 회동이나 보안 유지에 썼겠죠."

하긴 법치가 없어진 상황에서 세력 다툼을 하는 세력은 상대의 도청이나 핸드폰 추적을 걱정할 만했다.

'배남이 안수진에게 박안수 얘길 했다는 증언이 완전 거짓말은 아닌가 보네. 그럼 더 복잡해지는데? 뭐 일단 잡아서 물어보면 확실해지겠지.'

완전히 이해한 주경이 물었다.

"그럼 안수진은 어디에 있어?"
"바로 근처입니다. 오차 범위는 100미터."
"뭐야, 100미터면... 시위대 사이에 있나? 결국 시위대 안에 들어가야 하는 건 똑같잖아."

현재 끓는 기름처럼 출렁이는 이 인파에서는 100미터 안에 200명 이상 모여 있다고 봐야 했다. 심지어 그들은 적의와 쇠파이프로 무장하고 최일선의 수방사와 싸우는 중이었다.    

"광화문은 그래도 다른 지역보다 기지국이 촘촘해서 쉽게 잡은 편입니다. 계속해서 갱신 데이터를 알려드릴 수 있고요."
"무전기로?"
"그렇습니다."

김기현 소령이 말했던 말도 안 되는 지령을 떠올려볼 때 이 정도면 준수한 조건이었다. 그 전에는 백사장에서 바늘 찾기라면 지금은 건초가 담긴 큰 상자에서 바늘 찾기였다.
정 안 되면 국회에서 했던 것처럼 가로막는 자는 모조리 쏴죽이면 해결이었다.

"알았어. 얘들아! 가자!"
"네!"

부하들이 대답하며 장비를 챙기기 시작했다. 추가로 동원할 인원을 고민하며 먼저 나간 주경 앞을 김기현 소령의 구급차가 천천히 지나쳤다. 밴 형태라서 이미 탄 사람, 전자 장비 빼고 두 명은 너끈히 탈 수 있는 차였다.

'잠깐.'

텐트 안으로 다시 들어온 주경이 영교에게 물었다.

"그거 위치 말고 속도도 나와?"
"물론입니다. 속도가 더 정확한 편입니다. 타깃 1과 2는 시속 8킬로미터로 움직이네요. 어? 이러면 차량 탑승입니다. 시위 현장에 웬 차량? 짚이는 데라도 있으세요?"

주경은 HK416 소총을 움켜쥔 채, 구급차 쪽으로 향했다. 부하들은 바깥도 아니고 왜 구급차로 가는지 의아해했지만 일단 방탄모를 쓰고 그 뒤를 따랐다.  


같은 시각 붕대로 머리를 잔뜩 감고 얼굴에는 방독면을 쓴 보민은 크레인 차를 찾아갔다.
크레인 차는 시위가 격화되는 상황에서 더 이상 있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모양인지 크레인 대를 천천히 내리고 있었다.
보민은 발판을 밟고 운전석으로 올라가 차창을 두들겼다. 물 묻힌 수건으로 입을 가린 차주가 보민을 바라보았다.  

"누구...?"
"일시 징발입니다!"
"네?"
"특수 군 수사대입니다."

보민은 아직까지 가지고 다니던 배남의 군 부대 통행증을 내밀었다가 얼른 감췄다.

"저희 부대가 한두 시간 이걸 써야 합니다. 대 다시 올리세요. 제가 올라갔다가 내려올 때까지 그대로 대기하세요."
"올라간다고요? 발판도 없는데 어떻게요? 위험해요. 그리고 시위가 난리잖아요."
"알아서 할 테니 그대로만 대기하세요. 20미터 올리세요."

차주의 눈빛에 짜증과 불신이 어렸지만 민간인 누구나 그렇듯 군인이라는 자의 명령을 대놓고 거부할 수는 없었다. 크레인이 원 상태가 되었다. 보민은 X자로 엇갈린 프레임을 타고 꼭대기까지 순식간에 올라갔다. 차주가 그 광경을 보고 혀를 내두를 정도로 빠른 움직임이었다.
정상에 올라간 보민은 우선 수진의 가방에서 챙긴 등산용 로프를 크레인 프레임에 알맞은 매듭을 걸어 단단히 묶었다. 덩어리는 언제든지 아래로 내려뜨릴 수 있도록 정리해 옆에 두었다. 그 뒤 프레임에 찰싹 달라붙은 채 정면을 바라보았다.
수진의 생각대로 이곳은 완벽한 관측 장소였다. 공기보다 무거운 가스의 특성상 최루 가스는 그를 방해하지 못했다. 그는 탁 트인 시야로 건물숲 사이를 내달려 충돌하는 결사대, 결사대의 투석, 그들을 밀어내려는 살수와 최루탄을 바라보았다. 벽을 이룬 수방사 너머에는 분주하게 움직이는 계엄군들과 장비, 그리고 선명하게 보이는 119 구급차가 있었다. 구급차는 느리게 서울 시청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제발 멈춰라. 소동이 일어나라.'

보민은 품속에서 글록 17과 민석이 준 무전기를 꺼냈다. 혹시 관측수가 있을 수 있어 아직 겨누지는 않고 둘 다 목도리로 가렸다. 하지만 언제든지 겨눌 수 있도록 손을 번갈아 겨드랑이에 넣어 녹이고, 다리로는 프레임을 꽉 껴안아 떨어지지 않도록 조처했다.




1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5952 창작또 다른 2025년 (20) 트린 26/01/04 138 1
    15946 창작또 다른 2025년 (19) 트린 26/01/02 171 2
    15941 창작또 다른 2025년 (18) 1 트린 25/12/31 232 3
    15936 창작또 다른 2025년 (17) 4 트린 25/12/29 270 3
    15933 창작만찢캐 그림 만들기 5 토비 25/12/29 400 0
    15930 창작또 다른 2025년 (16) 트린 25/12/28 233 4
    15927 창작또 다른 2025년 (15) 트린 25/12/26 285 1
    15924 창작또 다른 2025년 (14) 2 트린 25/12/24 293 1
    15918 창작또 다른 2025년 (13) 1 트린 25/12/22 283 2
    15914 창작또 다른 2025년 (12) 트린 25/12/20 327 4
    15908 창작또 다른 2025년 (11) 2 트린 25/12/18 343 1
    15900 창작또 다른 2025년 (10) 1 트린 25/12/16 340 3
    15894 창작또 다른 2025년 (9) 2 트린 25/12/14 469 3
    15892 창작또 다른 2025년 (8) 3 트린 25/12/12 444 1
    15887 창작또 다른 2025년 (7) 2 트린 25/12/10 475 2
    15884 창작또 다른 2025년 (6) 4 트린 25/12/08 482 3
    15880 창작또 다른 2025년 (5) 6 트린 25/12/07 539 4
    15879 창작또 다른 2025년 (4) 2 트린 25/12/06 583 2
    15878 창작또 다른 2025년 (3) 3 트린 25/12/04 722 5
    15876 창작또 다른 2025년 (1), (2) 9 트린 25/12/03 927 10
    15695 창작따뜻한 것이 있다면 1 SCV 25/08/28 1222 9
    15560 창작평행 세계에서의 인터넷 역사 5 nothing 25/06/29 1603 0
    15542 창작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5 Cascade 25/06/22 2393 10
    15415 창작탐라를 지키는 100명의 회원들 MV 14 수퍼스플랫 25/05/01 1854 13
    15291 창작윤석열의 천하 구밀복검 25/03/01 2466 2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