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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6/03/24 11:53:56
Name   큐리스
Subject   제1화: 금요일 오후 5시의 공습경보
"팀장님, 복지부 고시 건 말인데요."

개발팀 막내의 목소리가 조심스러웠다. 시계는 오후 4시 57분. 금요일이었다.

"병원에서 방금 연락 왔는데요."

"얼마나 남았대?"

"일주일이요."

나는 잠깐 눈을 감았다.

고시가 떴던 건 한 달 전이었다. 우리도 알고 있었다. 병원도 알고 있었다. 근데 병원은 우리한테 말을 안 했다. 한 달 동안. 그냥 알고 있으면서 아무 말도 안 했다.

원무팀장한테 전화를 했다.

"팀장님, 고시 건 언제 아셨어요?"

"저희도 바빠서 놓쳤네요."

잠깐 말이 없었다.

"공문이 이렇게 많은데 어떻게 다 봐요."

할 말이 없었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병원 원무팀도 바쁘다. 공문은 매일 쏟아진다. 우리 회사만 공문 받는 게 아니다. 그걸 안다.

근데 결과적으로, 주말을 날리는 건 우리였다.

나는 익숙하게 넥타이를 풀었다.

2002년 강원도 철책에서 북한군 침투 흔적 발견했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때는 크레모아 격발기만 쥐고 있으면 됐으니까. 격발기 잡은 손이 떨려도,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지키는 것. 딱 그것만.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원천사, 외주사, 복지부. 이 삼각파도 사이에서 욕은 우리가 다 먹는 구조다.

"팀장님! 일주일밖에 안 남았는데 어떻게 할 거예요!"

수화기 너머 원무팀장의 고함. 방금 전까지 "바빠서 놓쳤네요" 하던 그 목소리였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2004년 동남아 해변에서 쓰나미가 몰려올 때도 사람들은 소리를 질렀다. 그때는 무조건 높은 곳으로 뛰었다. 하지만 지금은 도망칠 곳이 없다.

내가 도망치면, 다음 주 월요일 아침 5개 병원 환자들이 앱으로 접수도 수납도 못 하는 대참사가 벌어진다. 아무 잘못 없는 환자들이 병원 입구에서 발이 묶이는 거다. 그게 싫었다. 그래서 15년을 이 자리에 있었다.

"걱정 마세요. 주말 반납하면 됩니다."

전화를 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들 회의실로."

회의실에 개발팀, PM, 운영팀이 모였다. 다들 표정이 굳어 있었다. 금요일 저녁 약속이 날아간 얼굴들. 누군가는 이미 카카오톡으로 약속을 취소하고 있었다.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다들 알고 있었다. 이게 우리 일이라는 걸.

화이트보드에 크게 썼다.

D-7

"일단 현황 파악부터."

개발팀장이 입을 열었다.

"문제는 앱이에요. 서버단은 저희가 바로 반영할 수 있는데, 앱은 스토어 심사가 변수예요. 지금 제출하면 언제 승인날지 장담을 못 해요."

맞는 말이었다.

앱스토어, 플레이스토어. 이 두 개의 심사 타이밍은 복지부도, 병원도, 우리도 컨트롤할 수 없다. 그게 Healthcare IT의 현실이다.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생태계의 문제다.

"그럼 이렇게 가자."

나는 보드에 세 줄을 썼다.

서버단 — 즉시 반영 가능한 것부터
앱 — 스토어 심사 없이 처리 가능한 부분만 우선
UI — 일단 팝업으로 처리
완벽한 해결책이 아니었다. 하지만 다음 주 월요일까지 버틸 수 있는 해결책이었다. 완벽한 것보다 작동하는 게 낫다. 이 바닥 15년이 가르쳐준 것 중 하나다. 완벽을 기다리다가 월요일을 맞이하는 것보다, 70점짜리라도 돌아가는 시스템이 낫다. 환자는 기다려주지 않으니까.

회의가 끝났다. 시계는 오후 7시였다.

다들 자리로 돌아가려는데 내가 말했다.

"잠깐. 오늘 밥은 내가 쏜다."

막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뭐 시킬까요?"

"돼지고기에 소주."

삼겹살이 불판 위에서 지글거렸다. 소주잔을 돌렸다. 아무도 말이 없었다. 다들 묵묵히 고기를 구웠다. 금요일 저녁 술자리인데 아무도 신나 보이지 않았다. 그게 당연했다. 이건 회식이 아니라 전투 전야제였으니까.

첫 잔을 비우고 나서야 개발팀장이 입을 열었다.

"팀장님, 우리 이번 주말도 이러네요."

"응."

"작년 설 연휴도 그랬고."

"응."

"재작년 추석도."

"응."

다들 웃었다. 피곤한 웃음이었지만, 그래도 웃음이었다. 이 웃음을 알고 있었다. GOP에서 기타 메고 철책 순찰하면서 웃던 웃음이랑 비슷했다. 어이없어서 웃는 웃음. 이걸 어쩌나 하면서 웃는 웃음.

소주가 두 병, 세 병 비워졌다. 고기가 두 판, 세 판 나왔다.

누군가 말했다.

"팀장님은 이런 거 안 힘드세요? 진짜로요."

나는 잠깐 생각했다.

힘들지.

GOP 철책 새벽에도 힘들었고, 푸켓 해변에서 검은 벽 보면서도 힘들었고, 냉동창고에서 박스 나르면서도 힘들었다. 힘들지 않은 순간이 없었다. 근데 그때마다 어떻게든 됐다.

"힘들지. 근데 어떻게든 되더라."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걸로 충분했다.

그날 밤, 다들 뻗었다.

사무실 소파, 회의실 바닥, 자기 자리 책상. 삼겹살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채로. 고기 냄새 배고 양말 신은 채로 자리에서 잠든 사람도 있었다. 아무도 집에 가지 않았다. 집에 가면 다시 출근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는 걸 알고 있었다.

토요일 아침.

눈을 떴더니 사무실이었다. 창밖으로 서울 하늘이 보였다. 토요일 아침 하늘. 다른 사람들은 지금 늦잠을 자고 있겠지.

다들 하나둘 눈을 비볐다.

아무도 집에 가지 않았다.

막내가 말없이 편의점 커피를 사왔다. 하나씩 돌렸다. 따뜻했다. 그것만으로도 고마웠다. 이런 거다. 이 바닥에서 오래 버티는 게. 커피 하나 돌릴 줄 아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

나는 노트북을 열었다.

D-6

아직 6일이 남아 있었다.

"자, 다시 시작하자."

심리학과 출신, 비전공자, 국비 학원 출신. 사람들이 '근본 없는' 이라고 부르는 내가 이 바닥에서 15년을 버틴 비결은 하나다.

어떤 재난이 닥쳐도, 나는 기어코 살아남는다는 것.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이번에도 살아남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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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동감 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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