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6/04/01 04:53:00
Name   틸트
Subject   [20주차] 처음 함께 만났던 언젠가의 어느날처럼.
당신의 핸드폰이 몸을 흔들기에 나는 자리를 피했다. 당신의 귀로 여자의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애인일까. 그렇다면 나는 훌륭한 선택을 한 것이다. 당신은 대충 말을 지어내 대답하고 전화를 끊어버린다. 나는 손을 뻗어 당신의 볼을 쓰다듬는다. 당신은 화가 났다. 빌어먹을 선거 같으니라고. 매일같이 설문 조사가 오는군. 나는 아무에게도 관심이 없는데. 나는 당신을 꼬옥 끌어안는다. 당신의 마음이 조금 나아진 것 같아 다행이다.

나도 선거를 싫어하기로 마음먹는다. 빌어먹을 선거 이전에 당신의 전화기가 울리는 일은 별로 없었기에. 요 근래 당신의 시간은 곧 나의 시간이었다. 나와 당신은 쉴 새 없이 사랑을 나누었다. 모든 관계는 시한부적이니 우리는 다급해야 한다. 나는 당신이 헤어지는 것을 대여섯 번 정도 보았다. 당신은 헤어질 때마다 내게 오더니 손쉽게 나와 헤어지고 다른 사람을 만났다. 그것도 당신이 젊었을 적의 이야기다. 당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젊은 시절의 성욕을 나는 똑똑히 기억한다. 당신은 때로 하루 종일 나를 끌어안았다. 당신은 때로 하루 종일 나를 밀어냈다. 멀리서 나는 들었다. 당신이 얼마나 그녀들을 사랑했는지. 당신은 단 한번도 나를 사랑한다고 입밖으로 내지 않았다. 하지만 괜찮다. 나는 당신의 첫사랑이니. 그리고 요 근래 당신의 시간은 곧 나의 시간이었으니. 우리는 어쩌면 영원할 것이다.

또다시 전화기가 울린다. 당신은 발신자를 확인하고 나를 밀어낸다. 오랜 친구의 전화다. 당신이 나를 알기 전부터 알았던 친구다. 당신이 내 존재를 숨기고 싶어하는 친구다. 그럴 수밖에. 나는 언젠가 당신의 친구와 잔 적이 있다. 나의 잘못도 당신의 친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친구에게 이야기를 들은 당신은 기묘한 질투에 휩싸였었다. 몇 살 때였지? 당신은 친구에게 그렇게 물었다. 당신의 친구는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은 당신도 마찬가지다. 당신은 언제 나와 처음 잠에 들었는지 기억하는가? 얼버무릴 생각 하지 말도록. 자리를 피해줄 테니 오랜 친구와 편하게 통화하도록. 그리고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피하도록 하려무나. 당신에게나 당신의 친구에게나 유쾌한 기억이 아닐 테니까.

당신은 친구와 약속을 잡고 나간다. 이런. 나는 며칠간 당신을 만나기 힘들어질 것 같다. 당신이 나를 원하지 않을테니 말이다. 나는 어제 당신이 옛 연인의 전화를 받았을 때처럼 그렇게 금방 사라지도록 하겠다. 조금 뒤에 혹은 며칠 뒤에 다시 당신을 찾기로 한다. 아니 그 전에 당신이 나를 찾을 것이다. 일종의 숙명이다. 기억나는가? 당신은 어제 전화를 받은 연인과 함께 있는 동안에도 나를 떠올렸다고 내게 고백한 적이 있다.

-

나는 외로움이다. 나는  금방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조만간 당신을 나를 찾을지니 나는 덤덤하게 당신을 안아줄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몇 년 전처럼 숨가쁜 신음을 토해낼 것이다. 우리가 처음 함께 만났던 언젠가의 어느날처럼. 무엇도 구체적이지 않던 어느 시공간처럼.



2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공지 티타임 게시판 이용 규정 2 Toby 15/06/19 31949 7
    15155 일상/생각청춘을 주제로 한 중고생들의 창작 안무 뮤비를 촬영했습니다. 2 메존일각 24/12/24 336 5
    15154 문화/예술한국-민족-문화의 정체성에 대한 소고 meson 24/12/24 278 2
    15152 정치이재명이 할 수 있을까요? 72 제그리드 24/12/23 1562 0
    15151 도서/문학24년도 새로 본 만화책 모음 6 kaestro 24/12/23 351 5
    15150 게임최근 해본 스팀 게임들 플레이 후기 1 손금불산입 24/12/23 279 5
    15149 사회그래서 통상임금 판결이 대체 뭔데? 7 당근매니아 24/12/23 600 11
    15148 정치윤석열이 극우 유튜버에 빠졌다? 8 토비 24/12/23 824 9
    15147 정치전농에 트랙터 빌려줘본 썰푼다.txt 11 매뉴물있뉴 24/12/22 1069 3
    15146 의료/건강일종의? 의료사기당해서 올려요 22 + 블리츠 24/12/21 971 0
    15145 정치떡상중인 이재명 56 매뉴물있뉴 24/12/21 1846 15
    15144 일상/생각떠나기전에 생각했던 것들-2 셀레네 24/12/19 575 9
    15142 일상/생각플라이트 시뮬레이터로 열심히 걸어다니고 있습니다~~ 7 큐리스 24/12/19 507 2
    15140 정치이재명은 최선도, 차선도 아니고 차악인듯한데 43 매뉴물있뉴 24/12/19 1849 7
    15139 정치야생의 코모도 랩틸리언이 나타났다! 호미밭의파스꾼 24/12/19 383 4
    15138 스포츠[MLB] 코디 벨린저 양키스행 김치찌개 24/12/19 135 0
    15137 정치천공선생님 꿀팁 강좌 - AI로 자막 따옴 28 매뉴물있뉴 24/12/18 747 1
    15135 일상/생각생존신고입니다. 9 The xian 24/12/18 613 31
    15134 일상/생각산타 할아버지는 알고 계신데.. 5 Picard 24/12/18 440 7
    15133 도서/문학소설 읽기의 체험 - 오르한 파묵의 <소설과 소설가>를 중심으로 1 yanaros 24/12/18 300 4
    15132 정치역사는 반복되나 봅니다. 22 제그리드 24/12/18 759 2
    15131 여행[2024 나의 이탈리아 여행기] 0. 준비 7 Omnic 24/12/17 368 7
    15130 정치비논리적 일침 문화 7 명동의밤 24/12/16 878 7
    15129 일상/생각마사지의 힘은 대단하네요 8 큐리스 24/12/16 791 7
    15128 오프모임내란 수괴가 만든 오프모임(2) 50 삼유인생 24/12/14 1885 5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