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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6/05/18 21:06:00
Name   우너모
Subject   [조각글 26주차]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주제 _ 선정자 : 지환
두 명이서 어디론가 가는 이야기

조건
평소보다 조금 더 길게 써주시면 좋겠어요

합평 방식
분량은 자유고 합평방식은 자유롭게 댓글에 달아주시면 좋겠습니다.

합평 받고 싶은 부분
이야기의 전개는 걸림이 없는지, 주인공의 처지가 와 닿는지. 문장은 마음에 드시는지. 사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평해주시면 됩니다.

하고싶은 말
마감을 넘겨 급하게 쓰다보니 엔딩이 카페베네급입니다. 글에 부족한 감성을 한 스푼 첨가하기 위해서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라는 곡을 켜고 읽으면 좋을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별로 안 어울리더라구요.
https://www.youtube.com/watch?v=HUCJkwBNtTE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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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All tickets are sold out. Please visit the ticket box.”
여자는 가슴을 두 번 쳤다. 반나절 뙤약볕을 맞으며 줄을 서서 기다린 결과가 매진이라니. 연착을 하고도 제대로 된 사과 공지 한 줄 없던 스페인 항공사, 승차구를 잘못 적어준 시외버스 터미널 직원. 여자는 원망할 사람들을 머릿속으로 하나씩 줄 세워본다. 그 줄 끝에도 화가 나 숨을 몰아 쉬고 있는 여자 자신이 있다. 애초에 계획도 조사도 없이 스페인으로 훌쩍 떠난 게 잘못이었으리라. 알함브라 궁전에는 예약 없이 들어갈 수 없다는 것도 터미널에 내리고서야 알게 된 참이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궁전 앞에 급히 뛰어와 줄을 섰지만, 역시나 허탕이었다.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내일 오전에 일찍 다시 나오는 수밖에. 여자는 다시 배낭을 고쳐 매고, 핸드폰을 꺼냈다. 미리 캡쳐해둔 이메일에는 숙소가 알함브라 궁전에서 걸어서 이십오분 정도 걸린다고 쓰여 있었다. 한숨을 푹 쉬고 지도에 표시해둔 방향으로 돌아서던 여자는 낯선 개와 눈이 마주쳤다. 개는 귀를 쫑긋하고는 여자에게 다가왔다. 여자는 못 본채 가던 길을 재촉했다.

여자는 고개를 돌려 개를 바라보았다. 개는 자꾸만 여자를 따라왔다. 고르지 못한 돌길에 캐리어가 살짝 튈 때마다 개도 팔짝 팔짝 뛰었다. 가방에 든 것은 대부분 가벼운 여름 옷이었지만, 그래도 2주 동안 입을 옷으로 눌러 채운 가방은 깡마른 여자에겐 꽤 무거웠다. 해가 어깨 너머로 높아지면서 여자의 귀 밑에도 땀이 고이기 시작했다. 오전 11시에도 이베리아 반도의 햇살은 따가웠다. 여자는 잠깐 앉을 곳을 찾다, 길 옆 화단에 엉덩이를 걸쳤다. 개도 가방과 여자가 만든 그늘에 다가와 앉았다.

여자는 어깨를 누르던 백팩을 풀어 화단 위에 얹었다. 배낭이 누르던 등골에 바람이 들자 땀이 축축하게 흐른 게 느껴졌다. 배낭 윗 쪽에 달린 지퍼를 열어 조금 짓눌린 샌드위치와 생수병을 꺼냈다. 점심 때 먹으려고 산 것이었지만, 앉은 김에 뭐라도 먹어야 숙소까지 걸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옆을 돌아보니 개는 아직 여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샌드위치를 조금 떼어서 바닥에 내려놓았지만 개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개는 분홍색 혀를 내밀고 목구멍이 다 보이도록 숨을 쉬었다. 여자가 손바닥에 물을 붓자 그제야 다가와 핥았다.

개의 주둥이는 길었고, 온 몸에 난 갈색 털은 짧고 뻣뻣했다. 크게 벌린 입에서 묽은 침을 뚝뚝 흘리는 걸 보니 털은 짧아도 더위는 많이 타는 모양이었다. 여자는 질긴 빵을 씹으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거리에는 아직 걸어다니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스페인 사람들은 아침 잠이 많다. 혹시 주인이 근처에 있지 않을까, 하고 여자는 생각했지만 그나마 주변에 걸어다니는 사람은 관광객들뿐이었다. 구겨진 카고 반바지를 입은 미국 남자 하나가 개에게 손을 흔들다 반응이 없자 가버렸다. 개는 여자만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어쩌면 개는 별 이유 없이 여자를 따라 오는 지도 모른다. 여자가 별다른 이유 없이 그라나다를 여행지로 선택한 것처럼. 굳이 이유를 찾아보자면, 알함브라 궁전을 직접 보면 좋지 않을까, 하는 아주 단순한 생각이었다. 아마 여느 사람들처럼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라는 연주곡 때문에 그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을까?  하지만 여자는 그 곡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사실 여자는 태어나서 한 번도 기타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개가 짖는 소리도, 자동차의 경적 소리도, 엘리베이터 좀 잡아달라고 외치는 소리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개에 물릴 뻔한 적도 있었고, 차에 치일 뻔한 적도, 이웃들의 오해를 산 적도 많았다.

여자는 샌드위치를 먹은 후, 다시 15분 정도를 걷다 오래된 건물 앞에서 멈춰 섰다. 여자는 캐리어를 끌던 손을 반바지에 비벼 땀을 닦고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미리 캡쳐해둔 지도에는 이 건물에 호스텔이 있다고 그려져 있다. 회갈색 벽에는 아무런 간판이 없었다. 손을 흔들어 입구 옆 의자에 걸터 앉은 스페인 남자를 쳐다보게 했다. 남자는 털이 곱슬곱슬한 팔을 반갑게 맞흔들어 주었다. 스페인 남자들은 여자에게 친절했다.

여자는 건물의 입구를 가리키며, “오,스,텔?” 이라고 또박또박 말했다. 남자는 빙긋 웃으며 뭔가 말했다. 스페인어를 하나도 모르는 여자는 입 모양을 읽을 수 없었다. 다만 마지막에 개를 가리키며 한 말은 알 것 같았다. 건물 안에 개는 들이면 안 된다는 말이겠지. 개도 그 말은 알아들었는지 그늘에 자리를 잡고 엉덩이를 깔았다.

엘리베이터는 건물의 다른 부분들처럼 낡아 있었다. 여자는 어둑어둑한 복도와 엘리베이터 안에서 이전에 맡아본 냄새를 맡았다. 엄마를 떠나 보낼 때 맡았던 퀴퀴하고 습한 곰팡내였다.

여자가 처음으로 유럽 여행을 꿈꾸었던 것은 스물 여섯이지만, 여자의 엄마는 몸도 불편한 애가 혼자 해외로 나가는 걸 반대했다. 서른 한 살 때, 그녀는 눈 딱 감고 런던 행 티켓을 예매했지만 취소해야 했다. 그 날 저녁, 여자의 엄마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5년 동안 딸과 함께 살던 집을 찾지 못해, 엄마는 엉뚱한 골목을 밤새 헤맸다. 몇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엄마는 요양원에 가야 할 정도로 상태가 나빠졌다.

여자가 서른 세 살이 되던 해에, 엄마는 요양원 침대에서 잠을 자다가 세상을 떴다. 그녀의 장례식은 요양원 근처 작고 오래된 식장에서 치러졌다. 사람은 많이 오지 않았다. 여자는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직장을 그만 두고 스페인행 비행기를 탔다. 낡은 엘리베이터에서는 그 때 그 장례식장의 냄새가 났다. 삐걱대던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철문이 좌우로 열리자, 벽에 붙은 “Hostel El Granado”라는 간판이 보였다.


#2
개는 문이 건물 바닥을 끼익하고 긁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한시간이 지나고 나온 여자는 나풀거리는 하얀 블라우스와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여자는 개에게 다가와 허리를 낮추었다. 손가락으로 길 너머를 가리키기도 하고, 한 손을 뻗어 바닥을 짚기도, 양 손을 펼쳐 개의 앞을 막기도 했다. 손바닥에서는 옅은 화장품 냄새가 났다. 개는 고개를 한 번 갸웃하고는, 그 손바닥을 핥아 주었다. 옆에 앉아 있던 스페인 남자가 하하 크게 소리내어 웃었다. 여자도 살풋 웃었다.

어느새 머리 꼭대기 위로 뜬 해는 사방으로 정신 없이 빛을 쏘아댔다. 바닥이고 벽이고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쨍하니 하얗게 보이는 한낮이었다. 개는 여자보다 두 걸음 정도 앞서 걸었다. 여자는 피곤한지 발을 약간씩 끌며 걸었다. 뒤따라오는 여자의 발소리가 끊어지면, 개는 잠시 그늘에 기대 쉬었다. 그라나다는 걸어서 구경하기에는 제법 큰 도시였지만, 여자는 어디를 정해서 가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기에 버스를 타지 않았다. 둘은 쉬엄 쉬엄, 하얀 벽과 낮은 갈색 지붕 사이를 걸었다.

여자는 호스텔에서 건네준 지도를 꺼냈다. 클럽과 술집이 관광지와 뒤섞여 알아보기 힘든 조잡한 지도였다. 그나마 어디가 어딘지 알아보는 것은 호스텔 로비에 앉아 있던 남자가 볼펜으로 그려준 동그라미 세 개 덕분이었다. 여자는 “hostel”이라고 적힌 동그라미에 검지를 얹은 다음, 자신과 개가 걸어왔으리라 짐작되는 길을 긁으며 지도에 손톱자국을 냈다. 어느새 둘은 “Albayzin”이라고 표기된 지역까지 걸어와 있었다.

달동네같이 좁은 골목 사이로 관광객들이 가득했다. 여자는 비행기에서 급하게 읽은 여행 책자의 내용을 떠올렸다. 알바이신은 15세기 기독교 세력이 스페인을 다시 탈환할 때,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무슬림 서민들이 모여 살던 지역이라고 했다. 왕은 조상의 땅으로 돌아갔지만, 서민들은 그곳으로 돌아간다한들 먹고 살 길이 없었다. 그들의 운명은 영원히 이교도의 땅에서 이교도로 살아가는 것이었다.

우습게도 여자는 히잡을 쓰고 굽신대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엘리베이터 열림 버튼 하나 눌러주는 게 그렇게도 힘드냐, 젊은 사람이 배려심이 없어서 어쩌냐고 짜증을 내는 아줌마의 목에는 은색 십자가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말이 너무 빨라 입모양을 읽기 힘들었다. 여자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하고 말았다. 퇴근 후 상조 직원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죄송합니다. 여자는 입으로 만들어내는 그 말의 소리를 알지 못했다. 그 날 저녁에는 그 말의 뜻도 잘 몰랐던 것 같기도 하다.

관광객의 행렬은 강을 따라 굽어진 좁은 길을 지나 언덕으로 향하고 있었다. 오후에 접어들며 햇살이 한풀 꺾이자, 그제야 여자의 눈에 건물들의 색깔이 들어왔다. 조금 바랜듯한 분홍, 주황, 노랑색의 집들은 언덕이 높아질수록 점점 보기 힘들어졌다. 여자가 성 니콜라스 전망대에 이를 때쯤에는 주변 모든 건물이 흰 색이었다. 지는 해의 빛을 먹은 하얀 벽돌집들은 노을색으로 은은했다. 골목마다 한 발 두 발 앞서나가며 멀어지던 개는 어느새 시야에서 보이지 않았다.

언덕 위 조그만 광장에 먼저 도착한 개는 왕, 하고 짖었다. 개는 여자가 듣지 못한다는 걸 알지 못했다. 기타 연주를 듣던 관광객 몇이 개를 쳐다보았다. 체구가 조그만 스페인 남자가 광장의 타일 바닥 가운데 앉아 기타를 연주하고 있었다. 개가 또 한 번 짖을 때쯤, 여자는 이마의 땀을 훔치며 나타났다. 광장이라고는 하지만, 조그만 예배당 옆에 사람 키 정도 높이의 하얀 십자가가 세워진 공터가 전부였다. 사람들은 음악가를 둘러싸고 서서 기타 연주곡을 들었다. 모두 알함브라 궁전의 야경을 보기 위해 기다리는 중이었다.

여자는 광장과 사람들을 등지고 도시를 바라보았다. 해가 바닥까지 내려 앉았지만 아직 도시는 어둡지 않았다. 노을은 도심부터 한쪽 끝자락에 올라선 야트막한 산, 그리고 그 위의 궁전까지 드리웠다. 희미하게 빛나는 궁전은 아름다웠지만, 여자의 상상 속에서보다는 못했다. 낮게 솟은 네모난 성벽. 그 너머로 삐죽 올라선 첨탑과 흙색 건물들. 오밀조밀 모인 이 구조물들이 지는 해를 받으면 고향의 사막처럼 금색으로 빛나리라, 여자는 상상했었다. 실제로는 흰 빛에 가까웠다.

기타 가락이 구슬프고 조용하게 끝났다. 사람들이 박수를 치자 개는 놀라서 왕왕, 하고 짖었다. 여자는 돌아보지 않았다. 답답해진 개는 여자의 다리 위에 자신의 앞발을 툭 얹었다. 그제야 여자는 자기를 바라보며 짖는 개에게 살짝, 웃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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