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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6/05/22 07:14:23
Name   틸트
Subject   [26주차] 죽는 건 꽤 억울한 일이겠지만 말입니다.
주제 _ 선정자 : 지환
두 명이서 어디론가 가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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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람 맞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고.

선배가 저 사람에게 휘적휘적 걸어가며 건성으로 말했다. 나는 선배를 제지하며 목록을 다시 확인했다. 다행히 저 사람이 맞았다. 억울한 일을 만들지 않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죽는 것도 억울한데 억울하게 죽는 건 얼마나 더 억울한 일인가. 다행히 저 사람이 맞다. 뭐가 좋을까. 그래. 오늘은 날도 춥고 도로도 얼고 했으니까, 교통사고나 실족사 정도가 좋겠군. 하지만 실족사하기에는 너무 건강한 느낌이지? 내 원칙에 맞지 않아. 역시 교통사고가 좋겠어. 선배는 그렇게 말하며 주머니에서 장치를 꺼내다 돌연 몸을 웅크리며 신음했다.

아야. 아, 나 죽겠다.
나는 한심한 눈으로 선배를 보았다. 아니 그거 이제 익숙해 질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선배는 내 머리를 쥐어박으며 말했다. 어디 니가 내 짬 되도 그런 말 하나 보자. 이게 익숙해 질 것 같지? 나도 너만할 때는 금방 익숙해질 줄 알았다 임마. 아야. 아이고 나 죽겠네.
더 아파요?
아니, 그런 건 아니야. 그냥 딱 옛날만큼 아파. 그런데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매일 이렇게 아픈 건 참 짜증나는 일이라고. 고통은 쉽게 익숙해지는 게 아니라니까. 억울함 같은 거지. 빨리 처리하고 진통제나 빨자. 마침 저기 차도 온다. 덤프트럭이잖아. 이거면 확실하지.

선배는 좋은 자리에 앉아 장치를 가동했다. 덤프트럭은 제 갈 길을 갔고, 저 사람도도 제 갈 길을 갔다. 원래 각자의 갈 길로 갔다면 서로 만날 일이 없었을 덤프트럭과 그가 도로 한가운데서 마주쳤다. 당연한 말이지만 덤프트럭이 승리했다. 제동력을 잃은 덤프트럭은 그의 위를 지나 교차로의 전봇대에 부딪혔다. 빙판 위의 스키드 자국을 따라 원래 저 사람이었던 여러 가지가 놓여 있었다.

이거 뭐, 냉동고 바닥에 눌러 붙은 민치까스 같은데. 선배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이야기했다. 나는 그런 선배의 위악이 싫었다. 죽음을 다루는 일은 신중하고 엄숙해야 한다. 나는 저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선배는 말을 이어나갔다. 그거 알아? 추운 날에는 고양이들이 자꾸 세워 둔 자동차 바퀴에 몸을 대고 자더라고. 엔진의 잔열이 그렇게 따듯한가. 아무튼. 중학생 때였나. 아빠가 또 엄마를 패고 화를 풀러 나가더군. 트럭에 시동을 걸고, 1단을 넣자마자, 팡. 바퀴에 깔린 고양이가 풍선처럼 터져버렸지 뭐야. 아빠 가지 마세요 하고 말리러 나간 내 얼굴로 피가 핑 튀었단 말이지. 젠장. 그날도 다를 건 없었어. 또 술에 진탕 취해 오더니 날 두드려 팼지. 개새끼. 엿이나 먹으라는 심정으로 바닥에 햄처럼 으깨진 고양이 시체를 주워다가 손질해 아빠 술안주로 내드렸는데. 아빠, 어제 요리책에서 본 민치까스에요. 내가 이렇게 요리도 잘 해주니 나를 때리지 마세요, 하면서. 잘도 처먹더라고. 그리고 또 나를 때렸어. 요리책 볼 시간에 공부나 하라고. 아, 대체 나는 왜 그런 재수 없는 집구석에서 태어나서.

선배의 집 이야기는 언제나 나를 찜찜하게 했다. 내가 잘못한 건 없지만 내가 뭔가 잘못한 느낌이었다. 내 아버지는 트럭 운전사도 아니었고 나를 때린 적도 없었으니까. 나는 그렇게 억울하지 않은 삶을 살았다. 그래서 지금도 덜 억울한 건가. 선배는 일을 서두르자고 했다. 나 원. 쓸데없는 잡담으로 시간을 낭비한 것은 내가 아닌 선배다.

그래요. 치우죠. 그동안 수고 많았습니다, 선배.
오냐. 너도 수고 많았다. 기억하마.
선배는 저 사람의 으깨진 시체로 가 코를 박았다. 그러면 영혼의 일부를 좀 받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쓰읍, 하. 죽인다니까. 이제 이 짓도 안녕이로군. 어라. 야. 이 새끼 냄새가 왜 이래. 야. 명부 다시 확인해봐.

나는 명부를 다시 확인한다. 분명히 저 사람이 오늘 죽을 사람이었다. 사무실에 전화를 한다. 네, 지역 과잉 인원 처리반입니다. 아가씨가 전화를 받았다. 나는 오늘 처리한 영혼에서 이상한 냄새가 난다고 말했다. 그녀는 뭔가를 소리나게 뒤적거렸다. 자신의 귀찮음을 보여주기 위함이리라. 한참을 뒤적거리고 그녀는 이야기했다. 아. 전산 오류네요. 오늘 그 동네 과잉 인구 지역 풀렸는데.

아니 어쩌라고요. 일은 이미 치뤘는데.
괜찮아요. 아직 그 동네에 처리 인원 여유 좀 남아 있어요. 대량 살해는 아니죠?
네, 일단은 한 명이요.
에이, 그거 어차피 근무평점에 들어가지도 않아요. 영혼 수거 할당량이나 제대로 체크하시고 퇴근하세요. 아, 사자 훈련소로 인계하는 거 잊지 마시구요.

선배는 내게 차가운 눈초리를 보냈다. 마지막까지 아주 잘 한다 임마. 나는 조금 억울했다. 내 잘못이 아니잖은가. 전산 오류라고.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말 없이 가만 있을 선배는 아니었다. 야, 내가 선배 모시던 시절에는 전자 명부 이런 것도 없었어. 아침에 명단 확인하고 죽일 놈들 달달 외우는 걸로 하루를 시작했구만. 하여간 요즘 것들은 빠져가지고. 그나저나 이거 어쩌냐?
  선배는 시체에 코를 박고 영혼을 빠는 내게 말했다. 쓰읍, 하. 고통이 천천히 빠져나간다. 매일 영혼을 조금씩 마시지 못하면 온 몸이 조금씩 저린다. 저승사자의 천형이다. 사자의 영혼이 유일한 진통제다.

어쩌긴 뭘 어째요. 다른 방법 있습니까. 훈련소 보내야지.

사자의 실수로 원혼이 된 자는 사자 훈련소로 징집된다. 죽는 것도 억울한 일이고, 누군가의 실수로 죽는 것도 억울한 일이겠지만, 인생이란 삶이란 죽음이란 원래 억울한 일이다. 그렇게 억울하게 죽은 자는 또 한 번의 군 생활 비슷한 것을 해야 하는 건 조금 더 억울한 일이겠지만 역시 할 수 없는 일이다. 원한이 강한 자는 바로 환생시킬 수 없다나 뭐라나. 생각해보면 나 또한 어느 저승사자의 실수로 억울하게 죽었지만, 딱히 세상에 원한이 있지는 않았다. 살아있는 동안 나는 내가 죽이고 싶은 대여섯 명의 배때기에 칼을 쑤셔 넣는 데 성공했으니까. 아니, 일곱 명이었나. 그 시절이 좋았지. 이런 이상한 염력 장치 같은 것보다는 역시 직접 손으로 칼날을 밀어 넣는 쪽이 좋다. 죽인 다음에 죽은 이유를 말해주는 것 보다는 죽기 전에 죽는 이유를 말해주는 쪽이 좋은 것처럼 말이다. 이미 죽은 사람에게, ‘당신은 우연히 과잉 인구 지역으로 결정된 동네를 지나쳤습니다’라고 말하는 건 역시 너무 우스꽝스런 일이 아닌가. 그보다는 ‘당신의 배에 칼을 집어넣어야 내가 오늘 밤에 제대로 발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가 훨씬 합리적이다. 그러는 동안 으깨진 시체에서 나온 영혼이 천천히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아무튼, 그동안 고생 많았다. 나는 이제 할당량 채웠으니까 환생이다. 다음 생은 좀 덜 억울하게 태어나서 좀 덜 억울하게 죽기를 바라주라.
그래요. 내가 바란다고 될 건 아니겠지만.
선배의 모습이 천천히 희미해졌다. 나도 할당량을 채울 때 즈음엔 저런 사자가 되어 있을까. 나는 명부를 확인하고 영혼에게 다가가 발랄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당신은 죽게 되었습니다. 여러가지로 복잡한 일인데, 가면서 천천히 설명하도록 하죠. 질문은 받지 않겠습니다. 따지고 싶은 게 있으면 염라대왕한테 가서 따지세요. 당신 같은 걸 만나주지는 않겠지만 말입니다. 죽는 건 꽤 억울한 일이겠지만 너만 죽는 건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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