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6/06/21 15:33:52
Name   나나
Subject   시궁창

어제 저녁, 마지막으로 제주도에서 일몰을 보려고 했던 때였다. 두 시간 넘게 카페에서 기다렸지만 해는 구름 속에 풍덩 빠져 버렸다. 그제와 같은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붉은 햇빛이 바다와 하늘에 짙게 감돌아, 따뜻해 보이던 그 모습이 다시 한 번 보고 싶었는데. 아름다운 건 한때였다. 같은 자리에 똑같은 시간에 그곳에 머물러도 늘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너와 만났을 때, 나는 항상 이 년만 시간을 돌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 이상 바라는 건 욕심 같아서 말하지 못했지만 시간을 더 돌이킬 수 있다면 대학생 때 즈음이 좋겠다. 난 너와 만나면서 결혼을 생각했다. 그리고 우습게도 난 그게 참 싫었다. 늘 그렇듯 네가 날 바라보면서 웃고 나는 시답지 않은 농담이나 하며 시간을 보냈으면. 그때 나는 내 미래를 생각했다. 어쩌면 기억할지도 모른다. 내가 너를 바라보며 웃다가, 왠지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는걸. 그런 일들이 차츰 늘어나면서, 너도 나만큼 두려워했던 것 같다.

“약속해줄 수 있어?” 내가 그렇게 물었다. 너는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내가 무얼 바라는지 너도 나도 이미 알고 있었다. 무서워서 말을 꺼내지 않았을 뿐이다. 서로 생쥐처럼 굴 속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을 뿐이다. “몇 년 뒤라도 좋으니까, 반드시 행복하게 만들어주겠다고.” 그렇다면 결혼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결혼 약속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은 행복할 수 없는 건가? 나는 스스로 행복할 수 없는 사람이란 말인가? 멍청한 말이다.

너라면 단칸방에서 살아도 행복할 것 같았다는 말은 반은 거짓말이었다. 난 불안했다. 자주 임금이 체불되는 너의 회사도, 그러면서도 결코 그 회사를 떠나려고 하지 않는 네 태도도, 전부 나를 시궁창으로 끌고 갈 것 같아 숨이 막혔다. 나는 그런 불안함을 약속으로 채우려 들었다. 너를 위해 전부를 내놓을 수 있을 것처럼 말했지만 너에게 나를 감출 수는 없었다. 친구가 말했다. “그 자식은 비겁해. 네가 그만큼 좋아할만한 사람이 아니야.”

난 네가 나를 바라보는 얼굴이 좋았다. 상냥하게 웃는 눈도,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손도 좋았지만,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귀 기울여 듣는 그 얼굴이 무엇보다도 좋았다. 네 옆에 있으면 나는 차분해졌다. 우린 이따금 일없이 그냥 걸어가고는 했다. “오늘은 뭘 할까?” 네가 그렇게 물으면 나는, “몰라.” 라고 말했고, 너는 내 손을 꽉 쥐었다. 함께 버스에 탈 때면, 집에 갈 때까지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을 때도 많았다. 나는 네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드물게 네가 말을 걸어오기도 했다. “졸려?” 그러면 나는 언제나, “아니.” 하고 대답했다.

너와 산다는 건 나에게 그렇게 느껴졌다. 따뜻하고 조근조근한 햇살이 온 몸을 내리쬐게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 네 곁에 있을 때 나는 안심할 수 있었다. 그건 꽉 짜인 데이트코스나 조각 같은 얼굴보다 중요한 무언가였다. 네게 느끼는 애정은 ‘무언가’나 ‘막연한 것’, 혹은 ‘정의할 수 없는 것’이었고 동시에 타인에게 이해시키기 너무 어려운 것이기도 했다.

너는 대답하지 않았다. 술병을 앞에 두고 침묵했다.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너는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에게 너를 뚜렷하게 이해시키지는 못했어도 나는 대부분 네 침묵의 의미를 알았다. 비겁했던 것은, 나는 괴로운 동시에 안심했다는 것이다. 이게 나 또한 시궁창에 빠지지 않는 길인 것만 같았다. 그런데도 나는 기다렸다. 네가 절대로 입을 열지 않은 거라는 걸 잘 알면서도.

“널 정말 좋아했었어.”

말하는 순간, 그게 얼마나 비겁한 말인지 깨달았다. 네 얼굴도 보지 못한 채로 달려갔다. 잡아 주었으면. 잡지 말아 주었으면. 연달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네가 못한다면 내가 너를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동시에 그게 너무 버거웠다.

너를 좀 더 일찍 만났다면 모든 것이 달라졌을까? 꼭 다시 보고 싶었던 그 날의 풍경처럼, 다시는 보지 못했을 거다. 정말 원했다면 매달렸어야 맞다. 그런 마음이 없다면 몇 년 전으로 돌아가든 똑같았을 거라고. 그래도 딱 한 번만 시간을 돌리게 해 준다면 돌이키고 싶은 순간이 있다. 그때, 좋아했다는 비겁한 변명을 하는 대신 꼭 했어야만 하는 그 말.



그만큼 널 좋아하지 못해서 미안해.



6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3103 정치언론의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22 2Novation 16/06/23 4612 0
    3102 창작[32주차 주제 발표] 연재글 쓰기 1 얼그레이 16/06/22 5156 0
    3101 경제사람의 일자리를 대체하는 산업현장 로봇들 5 Toby 16/06/22 4196 1
    3100 IT/컴퓨터애플뮤직이 한국에 상륙할것 같습니다. 6 Leeka 16/06/22 4164 0
    3099 창작31주차 그대. 3 헤베 16/06/22 4086 0
    3098 일상/생각홍씨 남성과 자유연애 62 Moira 16/06/22 7641 12
    3097 꿀팁/강좌홍차넷 글 쓸 때 본문에 이미지 삽입하기 (imgur.com 사용) 8 Toby 16/06/22 5253 2
    3096 꿀팁/강좌페이스북 동영상 게시판에 퍼오기 3 Toby 16/06/22 5220 1
    3095 스포츠파이널 7차전에서의 클리블랜드 모습 2 Leeka 16/06/22 4373 1
    3094 일상/생각의사 '선생님' 이란 용어는 적절한가? 69 Zel 16/06/22 7984 0
    3093 영화우리들 (2015) _ 윤가은 감독의 단편과 함께 19 리니시아 16/06/22 5018 2
    3092 기타화제의 어떤 사진 25 눈부심 16/06/22 5532 0
    3091 스포츠[6.20] 김치찌개의 오늘의 메이저리그(강정호 1타점 적시타) 1 김치찌개 16/06/22 3256 0
    3090 게임삼국지 13 리뷰 16 저퀴 16/06/22 8326 0
    3089 창작[조각글 31주차] 대답 6 얼그레이 16/06/21 4211 1
    3088 창작[창작] 이상형 이야기 3 레이드 16/06/21 3372 0
    3087 방송/연예왕좌의 게임 9화 감상 11 당근매니아 16/06/21 4191 0
    3086 일상/생각[회고록] 우수에 젖어있던 너의 슬픈 눈망울. 2 수박이두통에게보린 16/06/21 3149 1
    3085 일상/생각시궁창 2 나나 16/06/21 3320 6
    3084 정치영남권 신공항 건설 또 백지화 32 NightBAya 16/06/21 4874 0
    3083 창작쯧, 하고 혀를 찼다. 4 nickyo 16/06/21 3852 2
    3082 일상/생각홍차넷 삼행시 공모전 당선 후기 16 혼돈 16/06/21 5439 4
    3081 방송/연예6/19일 걸그룹 멜론차트 이야기 3 Leeka 16/06/21 3847 0
    3080 스포츠내셔널스의 일곱번째 10경기 3 나단 16/06/21 3869 0
    3079 정치CFR - 인권과 민주주의의 장, 그 규칙을 설정하는 자들(1) 4 커피최고 16/06/20 3566 2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