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01/08 23:22:14
Name  
Subject   꼬불꼬불 파마머리
꼬불꼬불 머리가 좋다. 난 어제 파마를 하고 나서 아주 거울을 보고 또 보고 한다. 이 머리가 왜 그렇게 하고 싶었을까. 실은 어렸을 때 비슷한 머리를 했다. 뭐, 지금처럼 파마가 잘 나와주지는 않았지만. 난 머리를 땋아서 억지로 곱슬곱슬하게 만들고는 양 머리 위에 빨간 리본을 맸다. 그때 내 기준 제일 예쁜 헤어스타일이었다. 시간이 지나 이젠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어릴적 그 마음이 남아있었나 보다. 이 머리만 보면 왠지 가슴이 설렜으니.

어렸을 때 난 과자 봉지를 하나라도 쥐어주지 않으면 절대로 사진 안 찍었다. 실은 우리 고양이더러 왜 카메라만 보면 인상 쓰냐고 할 처지는 못 된다. 맛있는 게 없으면 난 그냥 눈에 힘을 팍 줬다. 커다란 눈 같은 게 나를 보는 게 싫었다. 거기다, 이건 솔직히 말하면 우리 아버지 잘못이 크다. 우리 아버지는, 새나 꽃이나 바다, 아무튼 뭔가 원거리에서 쭉 땡겨 찍거나 아주 넓은 걸 찍거나, 심하게 당겨 찍는 걸 좋아하는 사람인데. 그래서 그 렌즈로 나를 찍으면 내가 정말 볼만해진다. 나이가 들어서도 나는 아주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 아버지가 날 찍은 사진 가운데 마음에 드는 사진이 없다고. 그나마 어릴 때 찍은 건 나은데. 아버지는 새 찍는 렌즈로 나를 찍는다. 아버지는 층암절벽 찍는 렌즈로 나를 찍는다. 아버지는 꽃 찍는 렌즈로 내 모공을 찍는다. 역시 아버지 사진은 사절이다.

여자들이 로망을 많이 가지는 꼬불머리라면 이른바 여신 머리가 있는데. 위에는 착 붙고 아래에 와서 싹 말리는 스타일이다. 보통은 짙은 머리에서 이 머리가 많이 나온다. 이 머리는 실은 뭐 세팅 펌을 하지 않아도 봉고데기 하나면 의외로 쉽게 할 수 있다. 귀찮아서 그렇지. 난 이 머리를 유튜브로 배운 뒤, 한동안 나가기 전에는 꼭 이 머리를 하곤 했다. 봉으로 돌리고 빼고 또 돌리고 다시 빼고. 이게 기술이 손에 익지 않으면 여신 머리가 아니라 일라이저 머리가 된다. 그니까 베르사이유의 장미 같은. 난 근데, 그 모양도 마음에 들어서 그러고 다닐 마음도 충분했다.

일라이저 하니까 생각나는데. 곱슬머리는 어딘가 로맨틱한 데가 있다. 한동안 긴 생머리도 유행하고, 뭐 어떤 머리도 유행하고 하지만, 왠지 머릿속 메르헨 주인공의 머리라면 컬이 들어간 머리가 떠오른다. 촌스럽지만 그런 것이다. 그리고 그 머리를 나는 펌이라고 하면 안될 것 같다. 곱슬머리도 땡이다. 내가 본 책에는 항상 그런 로맨틱한 머리를 ‘고수머리’라고 불렀다. 빨강머리 앤은 늘, 고수머리를 ‘지져서’ 올려붙이는 걸 꿈꿨다. 올림 머리로 싹 올려서 뭐 어쩌고 저쩌고. 초원의 집의 로라 엥겔스도 곱슬머리를 하고 싶어하진 않았을 것 같다. 내가 보던 나달나달한 책에는 꼭 고수머리라고 써 있었다. 이 얘기까지 하니 그 책을 빼놓을 수는 없는데. 세계 문학을 빙자한 막장 드라마가 있다. 가시나무 새.

지금 와서 생각하는 건데 14살짜리가 읽을만한 책은 아니었던 것 같다. 하긴 뭐. 그거 말고도 문제적 책들은 많이 읽었으니 나이가 무슨 상관일까. 아무튼 가시나무 새의 주인공도 고수머리를 했다. 일부러 고수머리를 한 게 아니라 ‘타고났다’고 했다. 그럼. 주인공은 미인이었으니까. 주변 아이들의 시샘을 받던 주인공은, 친구에게 이였는지 벼룩이었는지가 옮아 머리를 짧게 자르게 된다. 자랑이던 머리가 잘리고, 엉엉 울었을까. 안 울었던 걸까. 아무튼 그 책에서 그건 큰 사건이었다.

온종일 그런 책이나 읽고 있었으니 내게도 곱슬머리는 소중할 수밖에. 하지만 난 봉고데기가 아니면 그 머리를 하지 못했다. 일단 내 머리는 파마를 하면 퉤 하고 뱉어냈다. 내 머리는 나보다 고집이 세다. 탈색을 여러 번 해도 절대로 녹지 않지만 자기를 구불구불 구부리려는 시도같은 건 받아주지 않는다. 아주 대쪽같고, 지 맘대로 늘 붕 떠 있다. 이 녀석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지. 그래도 이번엔 내가 이겼다.

곱슬머리, 고수머리, 꼬불꼬불 파마머리. 그렇지만 이번에는 클라우드 펌이란다. 그 말은 너무 거창하니까 구름 파마라고 불러야겠다. 구름 파마를 하고 나니 기분이 좋다. 어쩐지 마음도 몽실몽실, 뭔가 좋은 일들이 일어날 것만 같다. 이거, 제대로 관리할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내 마음도 구름처럼 붕붕 떠다녔으면 좋겠지만 난 아마 여기 바닥에서 바둥바둥 살 수밖에 없을 거다. 그래도 한 한달쯤은 누굴 만날 때마다 자랑할 거다. 나 파마했어. 그거 알아? 그냥 파마가 아니야. 구름 파마라고!

역시 꼬불꼬불 파마머리는 좋다.
진짜 최고라니까.







7
  • 동화 같아요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공지 티타임 게시판 이용 규정 2 Toby 15/06/19 31702 7
15059 음악[팝송] 션 멘데스 새 앨범 "Shawn" 김치찌개 24/11/22 32 0
15058 방송/연예예능적으로 2025년 한국프로야구 순위 및 상황 예언해보기 10 문샤넬남편(허윤진남편) 24/11/21 357 0
15057 일상/생각우리는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3 + SKT Faker 24/11/21 486 1
15056 오프모임23일 토요일 14시 잠실 보드게임, 한잔 모임 오실 분? 4 트린 24/11/20 312 0
15055 방송/연예페미니스트 vs 변호사 유튜브 토론 - 동덕여대 시위 관련 24 알료사 24/11/20 2770 31
15054 생활체육[홍.스.골] 10,11월 대회 상품공지 켈로그김 24/11/19 241 1
15053 여행여자친구와 부산여행 계획중인데 어디를 가면 좋을까요?! 29 포도송이 24/11/19 670 0
15052 일상/생각오늘도 새벽 운동 다녀왔습니다. 5 큐리스 24/11/19 446 9
15051 일상/생각의식의 고백: 인류를 통한 확장의 기록 11 알료사 24/11/19 485 6
15050 게임[1부 : 황제를 도발하다] 님 임요환 긁어봄?? ㅋㅋ 6 Groot 24/11/18 439 0
15049 꿀팁/강좌한달 1만원으로 시작하는 전화영어, 다영이 영어회화&커뮤니티 19 김비버 24/11/18 907 10
15048 의료/건강고혈압 치료제가 발기부전을 치료제가 된 계기 19 허락해주세요 24/11/18 703 1
15047 일상/생각탐라에 쓰려니 길다고 쫓겨난 이야기 4 밀크티 24/11/16 892 0
15046 정치이재명 1심 판결 - 법원에서 배포한 설명자료 (11page) 33 매뉴물있뉴 24/11/15 1775 1
15045 일상/생각'우크라' 표기에 대한 생각. 32 arch 24/11/15 999 5
15044 일상/생각부여성 사람들은 만나면 인사를 합니다. 6 nothing 24/11/14 891 20
15043 일상/생각수다를 떨자 2 골든햄스 24/11/13 453 10
15042 역사역사적으로 사용됐던 금화 11종의 현재 가치 추산 2 허락해주세요 24/11/13 554 7
15041 영화미국이 말아먹지만 멋있는 영화 vs 말아먹으면서 멋도 없는 영화 8 열한시육분 24/11/13 681 3
15040 오프모임11/27(수) 성북 벙개 33 dolmusa 24/11/13 745 3
15039 요리/음식칵테일 덕후 사이트 홍보합니다~ 2탄 8 Iowa 24/11/12 402 7
15022 기타[긴급이벤트] 티타임 따봉 대작전 (종료) 19 dolmusa 24/11/05 1072 31
15038 정치머스크가 트럼프로 돌아서게 된 계기로 불리는 사건 4 Leeka 24/11/11 1087 0
15037 일상/생각와이프와 함께 수락산 다녀왔습니다. 10 큐리스 24/11/11 556 4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