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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6/09/12 02:40:43
Name   기아트윈스
Subject   서원(書院)에서 한문 배운 썰 (2): 디제이디제이 드랍 더 비트
서원학습은... 상상하던 것과 달랐어요. 낭만적인 그림을 품고 도착한 곳은 산등성이에 허름한 한옥 몇 채, 그게 다였어요. 가장 최근에 지은 2층 양옥집이 유일하게 사람 살 만한 공간이요 선생님들 숙소이자 본부였어요. 30여 명의 학생들은 최소한 수십 년은 된 주방 건물 하나, 한옥 셋, 이렇게 네 동의 건물에서 묵었구요. 

때는 12월 하순, 전 경남의 겨울이 그렇게 추울 줄은 몰랐어요. 한옥의 창호지문은 그냥 장식품이에요. 아무리 메꾸려고해도 어딘가엔 틈이 있어서 몰아치는 북풍이 방으로 그대로 들이닥쳤어요. 실내 기온이 꼭 한 겨울 새벽녘 경계초소 같았지요.

난방은 바닥에 깔린 전기장판이 전부였어요. 이게 또 문제인게, 온돌도 히터도 아니고 전기장판인지라 최대출력으로 올려봤자 누운 그자리만 불지옥이지 기온은 그대로 그린란드거든요. 매일 밤 몇 차례씩 등이 뜨거워서 깨거나 코가 추워서 깨는 탓에 제대로 잔 날이 손에 꼽았어요. 분명 실내인데 코가 추워서 깨는 그 기분은 정말 짜릿해요. 제 코가 낮아서 다행이지 양놈마냥 고도가 2센티만 높았어도 분명 동상으로 잘라내야 했을 거예요. 몽골리안 만세.

화장실은, 아휴. 겨울이라 다행이었죠. 푸세식이 얼어 붙은 동안은 쓸 만해요. 여름이었으면 생지옥이었을 텐데 ㅎㅎ. 학생용 샤워실은 단 한 곳이었어요. 부엌에 딸려 있었는데, 전기 온수기로 온수를 뎁혀서 저장해놓고 거기 달린 샤워기로 씻는 식이었어요. 온수가 넉넉하지 않아서 서른 명의 학생들이 하루 종일 돌아가면서 씻었어요.

선생님 숙소인 양옥에는 딱 일반적인 양옥집에 기대할 수 있는 온수/난방/변기/욕조가 있었어요. 하지만 그게 탐나서 거기 잠입해서 샤워하고 올 만큼 간이 부은 학생은 없었지요. 아, 1 학년 여학생들은 문제의 양옥 2층에서 지내면서 그 모든 문명의 이기들을 누렸어요. 갸들을 한옥집에 던져놓으면 충격으로 탈주할까봐 그랬는지 어쨌는지 여튼 특혜라면 특혜였지요. 

하지만 다른 학생들이 그걸 부러워하진 않았어요. 감시자들과 한 곳에서 생활한다는 데는 또 말 못할 고통이 있었거든요. 양옥과 한옥에서 모두 생활해본 2~3 학년 여성 동지들은 "수세식 돼지가 되느니 푸세식 소크라테스로 살겠다" 고 했고 남성 동지들은 "미칬나. 니는 시설 좋다고 주임원사랑 같이 살래 ㅋㅋㅋ" 라고 했어요.

이 열악한 생활환경에 경탄을 금치 못하던 즈음에 드디어 문제의 [피치 못할 사정]이 뭐였는지 알게 되었어요. 1학년에서 2학년으로 넘어가면서 우리 기수 장학생의 수는 15명-->10명이 되었어요. 그런데 여름 서원학습 기간 도중 그 10명 중 한 명이 더는 못해먹겠다고 서울로 탈주(!!)했다는 거예요. 하긴. 탈주자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환경이긴 했어요. 그 탈주 학생은 장학생 명부에서 제명됐고, 그래서 겨울 서원학습 땐 일반 학생 중에 하나를 승격시켜서 땜빵으로 데꼬오자고 결정하고 절 데려온 거래요.

음...

한문 배운 썰인데 공부 이야기가 아직 안나왔군요. 환경 이야기가 이 정도 분량을 잡아먹을 줄이야. 

학생들은 매일 오후 양옥에 모여서 강의를 들어요. 강의라기보단 윤독(輪讀)에 가까운데, 학생들이 정해진 텍스트를 돌아가면서 읽고 해석하고, 선생님들은 그걸 지적하고 까주지요. 그러면 다들 사각거리며 필기를 하고, 숙소에 돌아와서는 배운 걸 다 외워요. 그렇게 외운 부분은 다음날 아침 조회 때 선생님이 듣는 데서 강(講)을 하는데 이 강이란 게 뭐냐면,


1 . 예전에, 서당이나 글방 같은 데서 배운 글을 선생이나 시관 또는 웃어른 앞에서 외던 일. <비슷한 말> 글강.

젊어서 글공부를 할 때 시관 앞에서 강을 하다가 강이 막혀서 시관에게 창피를 당한 뒤에…. 출처 : 박종화, 임진왜란

(Never 국어사전 中)

...입니다. 강에는 음정과 박자가 있어요. 어떤 음, 어떤 박으로 할 것인가는 출신지역에 따라 달라져서 전라도 출신 선생님이 하는 강을 들어보면 꼭 판소리 하는 것 같고 경상도 출신 선생님이 하는 강을 들어보면 약간 타령하는 것 같아요. 그래도 대체로 음은 5음계에 2옥타브 정도의 높낮이를 두고 박자는 알아서들 찾아서 해요. 이건 고전번역원 홈에 있는 샘플인데 선생님들은 대개 이런 식이에요.





이게 좀 어려워요. 짬이 찬 2, 3 학년은 다들 자기 나름의 음박을 확립해서 강을 하지만 1 학년들은 이거 감 잡느라 고생을 많이 해요. 그래서 첫 강을 할 때 재밌는 에피소드가 많이 나오지요. 


반짝반짝 작은별에 맞춰서 맹자(孟子)를 강했다는 모짜르트 누님부터








디제이디제이 드랍 더 비트를 시전한 힙합전사 형님까지


별의 별 전설의 레전드들이 다 있었대요. 

반야심경(般若心經)을 내용물만 바꿔서 강해서 모두에게 큰 웃음을 안겨준 놈도 있... 모르긴 몰라도 저 말고도 분명 있었을 거예요 ;ㅅ;

강을 할 때나, 윤독을 할 때나, 모두 조선시대 예법을 모방해서 지켜요. 무슨 일이든 시작할 때나 끝낼 때는 반드시 읍(揖)을 해요. 읍이 뭔고 하면



요로코롬..

읍을 하면 선생님이 먼저 아빠다리로 앉고, 학생들은 뒤따라 궤좌(跪坐)를 해요. 궤좌는 또 뭔고하면 




요런거예요. 물론 저렇게 앉으면 선생님들이 "에이 편하게 앉아"라고 하지요. 그러면 다들 아빠다리로 전환해요. 하지만 아빠다리도 열라 불편하기 때문에 다들 아빠다리와 궤좌를 오가며 다리 풀어주느라 바빠요. 유연성 없는 사람이 피도 안 통하면서 억지로 버티면 절름발이가 된대요.

아침 조회 때 모여서 강을 하고 오후에 1~2 시간 윤독을 하는 걸 제외하면 나머지 시간은 대체로 개인시간이에요. 다들 방에 박혀서, 혹은 산책하면서 배운 부분을 강하고 다음날 윤독할 부분을 예습해요. 준비가 끝났다고 생각하면, 놀지요 ㅎㅎ. 재밌는 일들은 이렇게 노는 시간에 많이 생겨요. 청춘남녀들이 모여서 별처럼 아름답고, 슬프고, 많은 이야기들을 만든답니다.


(꼐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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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많은 이야기가 있다는군요!
  • 썰푸는건 추천이야~
  • 이렇게 홍차넷의 킬러콘텐츠가 하나 더 늘어갑니다.
  • 문과 흥하는 이야기 재미있네요!!
  • 강의 세계가 이렇게 즐거운 것이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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