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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6/11/01 21:46:13
Name   SCV
Subject   [한단설] Once In a Blue Moon
처음부터 어울릴 수 없는 사이였다. 과외도 구하기 힘든 가난한 지방출신 고학생 남자와 상장사 사장의 딸인 여자라니. 시작하자마자 결말이 정해져있는 이야기 같았다. 어떤 장르일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살고 있는 곳이 현실인 이상, '그후로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로 끝나지 않을 것은 분명했다.

그녀를 처음 만난 곳은 친구 녀석이 주선한 소개팅 자리에서였다. 심리학 수업을 듣는 나에게 관심이 있었다며, 그녀가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공학용 계산기를 들고 다니는 심리학과 복수전공생에게 쏟아진 그녀의 관심은, 이내 사람의 마음 이야기로 옮겨갔다. 인지와 계량, 무의식과 의식, 프로이트와 구스타프 융을 넘나들며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첫눈에 반할 만큼 매력적이진 않았지만, 말과 글로 사람을 홀리는 재주가 있었다. 예지원의 살방살방한 눈빛을 닮은 그녀는, 가끔씩 짓는 알듯 말듯한 미소로 나를 홀렸다.

어쩌면 그녀와의 사이에 느낀 신분적인 벽이 내가 그녀를 태연하게 대하는데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내 사람이 될 사람이 아니다, 라고 생각하니 조급함도 욕심도 사라지고 눈덮힌 흰 들판만 남았다. 대화는 무미 건조하기 이를데 없었지만, 순진하고 착한 여학생의 지적 허영심을 가득 채우기에는 충분했고, 나는 지적으로 보였다. 그래서 우리는 연애도 아닌, 그렇다고 친구도 아닌 미묘한 관계의 나날을 이어갔다.

- 오늘 한잔 할래?
- '왠일로?'
- 과외비 들어왔는데 한 잔 쏠까 해서.
- '네가 먼저 술을 산다니 별일이다 야. 어디에서 볼까?'
- 글쎄, 대충 압구정?

압구정과 강남보다 성신여대 뒷골목 이조감자국이 더 땡기는 날이었지만, 과외비를 받은 날 만큼은 여자랑 그런데서 술을 마시고 싶진 않았다. 그녀는 별로 개의치 않아할 일이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손톱만큼의 곤조는 남아 있었다. 우리는 향했다.

[Once In a Blue Moon]

어디에서 봤더라. 아니, 들었더라. Just Two of Us 가 연주되고 있었다. 이 이후로 평생 이 곡은 내 플레이리스트에서 내려가질 않았다. 적당히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고 술을 시켰다. 나는 빌 에반스. 그녀는 빌리 할러데이.

- 여기 와봤어?
- '어... 전에 현욱이랑 정민이랑'
- 그렇구나. 난 여기 처음인데 참 괜찮다.
- '응. 종종 생각나면 와.'

칵테일 두 잔과 안주에 한 달 생활비가 날아갔다. 내가 이런 생각하고 있는걸 알면 그녀는 구질구질하다고 할까, 아니면 불쌍하다고 할까. 어느 쪽도 연민을 벗어나기는 어렵겠지. 음악은 달콤한데 술이 쓰다. 그녀는 적당히 취기가 올랐고 적당한 조명을 받아 적당히 빛나고 있었다. 어느새 밴드의 음악을 듣느라 우리는 꽤 가까이 붙어있었다. 그녀의 향기는 느껴지지만 숨소리는 들리지 않을 만큼. 나는 그녀의 뺨에 가볍게 키스했다.

- '뭐야~'
- 뭐가?
- '귀엽다 크크'

어깨를 움츠리고 웃는 그녀의 얼굴을 잡고 제대로 키스했다. 그녀와의 키스는 그렇게 길지도 짧지도 않았고 질펀하지도 유치하지도 않았다. 딱 통속소설에 나오는 남녀가 시작하는 느낌의 아주 적당한, 최적화된 키스랄까. 그녀가 키스의 여운을 즐기느라 가슴 두근거려 하며 남은 빌리 할러데이를 들이키는 동안, 나는 심드렁하게 안주를 마저 씹어 삼켰다. 더 이상 아무 일도 없었다. 내가 기대하던 일들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그녀에게 키스했다. 만약 내가 우리의 관계에 일말의 기대라도 있었다면, 그녀에게 그렇게 아무런 감정 없이 키스하진 않았겠지.

그렇게 연애일듯 말듯한 그녀의 뒷모습은 칵테일 한 잔에 날아갔고, 나는 여기 남아 Just Two of Us 를 따라 부르며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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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 이야기가 오가길래 생각이 나서 써봤습니다. 오늘도 실화와 픽션을 대충 반반 섞어 버무려봤습니다.
가지 않은 길 처럼,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 이야기가 여운을 가장 오래 남기는 법입니다.
이루어진 사랑은 매일 상영중인 아침드라마 혹은 일일드라마가 되거나 전쟁 드라마가 되곤 합니다.
이루어지지 않은, 이루어질 수 없었던 사랑 이야기는
먼지가 켜켜히 쌓인 오래된 DVD 처럼 쳐박혀서 그녀의 이름이 혜영이었는지 혜연이었는지 분간도 안가게 만들었습니다.
일어날 수 없었던 기적처럼, 그녀의 마음은 저에게 왔지만 저는 그 결국 그 마음을 견뎌내진 못했습니다.

안녕, Once In a Blue M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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