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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6/12/15 00:39:19 |
Name | nickyo |
Subject | 17171771 - 2 |
아래 글에서 이어집니다. =========================================================================== "오빠 왜 저한테 거짓말 했어요?" "응?내가? 뭘?" "..노래 못한다면서요." "어. 아 , 응 그렇지. 응." 당황스러웠다. 내가 예상한 이야기는 '오빠 저한테 관심있어요? 관심 갖지 마세요 블라블라 연습도 불편하니까 앞으로 안만났음 좋겠구요 블라블라 솔직히 메인보컬도 아니시니까 굳이 안 오셔도 되잖아요 블라블라'같은 이야기였으니까. 흔히 짝사랑을 하는 남자들의 불길한 망상. 그러나 그녀는 내 입장에서는 다행스럽게도 그런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진지한 이야기 도중에 내심 마음이 한결 가벼워 졌다. 그녀는 이런 내 마음을 눈치채지는 못한 듯, 한껏 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근데 어제 연습 때 보니까 노래 되게 잘하던데요." "어? 아냐; 나 잘 못해;” 나는 반사적으로 겸손을 떨었다. 실제로도 스스로 노래를 잘 한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말이 그녀에게는 전혀 좋게 들리지 않았던 것 같다. 그녀는 아까보다도 더 냉랭하게 빈정대듯이 말을 이어갔다. "그럼 오빠 노래 잘한다고 한 저는 뭐죠?" "어; 아니 그게.." 나는 기습적인 공격에 당황했다. 이성과 이렇게 말로 다투어 본 경험도 없었을 뿐 더러 이 상황에서 ‘그래 나 노래 좀 해’ 따위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답은 아닌 것 같았다. 대체 뭐가 문젠지 알 수 없어서 반사적으로 ‘미안하다’고 이야기했다. 뭐가 미안한지는 나도 몰랐다. 그녀는 그 얼빠진 사과를 들은 체 만 체 하더니 점점 더 비꼬기 시작했다. "오빠 처음 저 연습할 때 보면서 엄청 웃겼을 텐데 노래도 그렇게 잘하면서 그 동안 티 안 내시느라고 짜증나셨겠어요. 뭐라고 막 하고 싶으셨을 텐데 제가 참 주제를 몰랐네요. "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뭐가 문젠지 모르겠는데 난 너랑 이러고 싶지 않아.” 나는 그녀의 신경질 적인 반응이 황당했고 이해가 가지 않았고, 무엇보다 이 상황을 빨리 종결시키고만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우리가 서로에게 몰이해의 영역 속에서 관계를 점점 가라앉히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듯 계속해서 말했다. “네 네, 제가 잘못이죠. 죄송해요 제가 좀 자뻑이 심해요.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는 제가 바보 같아 지네요. 오빠가 사과할 게 뭐 있겠어요. 이상한 거 저도 알아요. 아는데.. 잘 모르겠어요.그냥.. 오빠가 지금 저한테 사과하는 것도 싫구요. 제가 노래를 못 하는 것도 싫어요. 그런데요. 그 동안 오빠가 그런 날 어떻게 보고 있었을 지 생각하면 정말 비참해 진다구요.” 그제서야 비로소 약간 상황파악이 되었다. 내 생각보다 쩡이는 굉장히 자존심이 강했던 것 같다. 내가 노래하는 것을 들은 쩡이는 그 동안 마치 노래를 잘 하면서도 쩡이를 진지하게 연습에 임하는 동료이자 멤버라고 생각하지 않은 채 '못하는 자신'을 동정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굳이 자신에게 노래를 못 한다며 살갑게 굴 이유가 없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어쩌면 귀여운 후배의 재롱을 보고 있었던 것처럼 느꼈을 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쩡이는 나름대로 이제까지 우리를 동료이자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마음 깊이 간직했는데, 막상 내가 연습하는 모습을 보니 자신이 못하는 걸 잘 아는데도 우스꽝스러운 광대마냥 오냐오냐 소리를 듣는 사람처럼 여겨진 기분이 들었다고 했다. 특히, 다른 사람보다도 내게 그런 것을 더 느꼈던 건, 다른 멤버들에게는 꼬치꼬치 따지면서 자기를 지적하지 않았던 기억들이 다시금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지적 할 부분을 ‘몰라서’ 지적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저 동정 받았을 뿐이라고. "야 네가 생각하는 그런게 절대 아냐 진짜.. 내가 너한테 왜 그러겠어.." 나는 이 오해를 어떻게 풀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내가 널 좋아해. 하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마땅히 그럴 듯 한 변명을 떠올릴 수 없어서 바보처럼 같은 사과를 반복해야 했지만 쩡이는 여전히 기분이 풀리지 않은 듯 했다. "그럼 대체 뭐에요? 같이 연습하는데 이제까지 싫은 소리 한번도 안하고, 제가 녹음한 거 들려줘도 괜찮다고만 하고. 저는 오빠가 노래를 못해서 그냥 그렇게 말씀하시는 줄 알고 몇 번이나 솔직하게 이야기 해 달라고 했는데. 저도 제가 솔직히 무슨 밴드 보컬 이런거 주제넘는거 아는데요, 그래도 열심히 하려고 연습하고 그러는데 오빠는 제 성의를 완전 무시하신거 잖아요." 또박또박 묻는 쩡이의 눈동자를 차마 마주할 수 없었다. 진짜로 '동정'같은걸 한 게 아니었지만, 이걸 설명하려면 나는 마음을 다 드러내야만 했다. 그건 쩡이가 화내는 것 보다 더 무서운 것이었다. 몇 번이고 자기에게 이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기회가 있지 않았냐며, 내가 오빠한테 듣고 싶었던 이야기는 사과가 아니라는 말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결국 쩡이는 그 자리에서 내게 '다시는 나한테 마음 없이 괜찮다고, 잘한다는 소리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고는, 조금 마음이 풀렸는지 ’지금 저 완전 기분 다운됐는데 안 풀어 줄 거에요? 앞으로도 오빠랑 잘 지내고 싶은데.' 라고 되물었다. 아까보다 조금은 누그러진 표정으로 새초롬하게 서 있는 쩡이를 보니 조금 건방진 너의 모습도 너무 괜찮네 라고 생각하며 '...라뽂이에 후식 아이스크림까지' 를 제안했다. 쩡이는 잠시 고민하더니 아이스크림 받고 오빠가 노래 10개 녹음해서 보내줘요. 라고 말했다. 나는 '콜!'을 외치며 가슴을 쓸어 내렸다. 여자애와의 갈등은 난생 처음이었고, 그건 정말 많은 기력을 소모하는 일이었다. 10곡의 노래 정도야 이미 녹음해 둔 게 있었기 때문에, 라뽂이를 먹고 쩡이를 데려다 준 뒤 바로 집에 와 시디를 구웠다. 이걸 언제 줄까 고민하던 차에 마침 형이 문자로 '형 오늘 집에 못 들어가니까 엄마아빠 몰래 그 버스정류장 옆 여성 전용 속옷가게에서 내 이름 대고 형이 부탁한 물건 좀 찾아놔'라고 sos를 보냈다. 나는 '치킨 사줄거야?' 라고 물었고, 형은 '공짜가 없어요 강아지야 오키'라고 답장을 보냈던 것 같다. 치킨이다! 하며 곧바로 밤 8시에 다시 머리를 감고 왁스를 바른 뒤 나갈 채비를 했다. 나가는 김에 이 핑계로 쩡이 얼굴이 보고 싶어서 오늘 시디 구웠는데 잠깐 나올 수 있냐고 물으니 선뜻 그러자고 하였다. 9시에 쩡이네 아파트 놀이터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속옷가게에 가서 형이 부탁한 선물을 받았다. 그치만 핑크색으로 포장된걸 쫄래쫄래 들고 다니기는 좀 민망했기 때문에, 바로 옆 슈퍼에서 까만 비닐 봉다리를 음료수 두 캔을 사며 얻어 시디와 함께 넣었다. 쩡이는 9시가 조금 넘어서 쫄래쫄래 나왔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여자의 트레이닝 복은 진짜 작살나게 이쁘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말이었다. 턱에 어퍼컷을 맞은 느낌? 맞아본 적은 없지만.어쨌거나 그건 마음에 다이렉트로 꽂혔는데, 몸의 태가 다 드러난다는 건 정말 야한 느낌이었다. 물론, 나는 순수한 고딩 이었으니까 야동을 아무리 봤다 한들 진짜는 다르다 뭐 이런 거였겠지. 나도 설마 내가 그 정도로 여성에 대한 저항기제가 낮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기도 했고. 여하튼 우리는 아파트 벤치에 앉아 캔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었다. 쩡이는 방금 씻었는지 머리카락에서 달큰한 샴푸 향이 솔솔 피어 올랐다. 예전에는 음악밖에 할 이야기가 없었는데, 이제는 성적에 대한 이야기나, 친구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쩡이 친구의 남친에 대한 이야기 같은 소소한 것들까지 떠들었다. 신나게 떠들다 보니 캔 커피는 금새 다 비워졌고, 어느새 시간은 열 시가 넘었다. 쩡이는 집에서 오는 전화를 신경질적으로 받더니 들어가 봐야 할 것 같다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쩡이와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어서 아파트 현관까지 바래다 준다고 하였다. 쩡이는 현관에서 '문자 할게요 오빠 잘 자요~'하고는 종종종 안으로 들어갔다. 아쉽기는 했지만 잘자요 라는 말에 기분이 엄청 좋아졌다. 그때는 머리 속에 쩡이랑 한 이야기만이 가득했다. 같은 이야기를 혼자 계속 되새기며 쩡이의 음성을 몇 번이고 다시 살려보았다.중간중간 웃음짓는 모습이나 희고 고운 피부가 약간 찬 바람에 살짝 붉어진 모습 등이 떠오르자 기분이 마구 좋아졌다. 그렇게 피식 거리며 성큼성큼 집에 돌아와 핸드폰을 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난 뭔가 깜빡 했다는 찝찝함을 느끼지 못했는데, 샤워를 하고 나와서 컴퓨터를 켜고, 핸드폰을 열어 본 뒤 쩡이는 문자가 아직 없네.. 아빠한테 혼나나? 하는 생각을 하며 주고받은 문자 메세지를 되돌려 읽었다. 쩡이의 문자내용을 하나하나 넘기며 즐거워하는 동안 갑자기 중간에 툭 튀어나온 '형'의 문자에서 나는 다시 한번 굳었다. 아! '찝찝함'을 느꼈어야 했다.나는 그날 내가 한 가장 큰, 그리고 치명적인 실수를 떠올렸다. 오 신이시여. 까만봉다리, 시디. 핑크색 포장상자. 그리고.. '속옷!!!!!!!!!!!!!!!!!' 그 순간만큼은 올림픽 대표선수가 된 것처럼 빠른 속도로 뛰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게 답답해서 11층부터 1층까지 단숨에 뛰어내려간 뒤 멈추지 않고 달렸다. 한번에 뛰어가기엔 꽤 거리가 먼 쩡이네 아파트 단지였지만 지금 그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머릿속에는 '내가 쩡이 에게 봉다리 채로 줬나?' '그 자리에 그대로 있겠지?' '설마 쩡이가 그걸 가져가진 않았겠지?' 같은 생각이 온통 엉켜서 혼란스러웠다. 신호도 죄다 무시한 채 미친 듯이 달려 쩡이와 앉았던 벤치에 도착했다. 역시나 아무리 두리번거려봐도 까만 봉다리는 없었다. 벤치 밑에도, 위에도 놀이기구에도 모래사장에도 쓰레기장에도 없었다. 멘붕이 왔다. 오 주여 부처님 알라님 하느님 선생님 엄마 아빠 롹큰롤 호롤롤로롤. 이정도 표현이라면 그 당시에 대한 정확한 심리묘사이지 싶었다. 나는 '정말로' 덜덜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열었다. 쩡이에게는 문자가 오지 않았다. 헐떡거리는 숨을 진정시키며 문자메세지 버튼을 눌렀다. 그런데 차마 어떻게 물어볼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만에 하나라도 쩡이가 그걸 가져갔다면, 핑크색으로 포장된 상자를 봤을 테고 행여나 그게 '선물'이라고 생각했다간.. 끔찍했다. 속옷상자는 생각보다 '크지 않고' 쩡이는 오늘 낮에 내가 사과한 미안함을 깜짝 선물로 전해줄 거구나 라고 생각 할지도 몰라. 그리고 그건, 정말 있어서는 안 되는 일임이 분명했다. 왜냐고? 형은 여자친구가 있었고, 거긴 여성 속옷 전용 가게였으며, 일반적인 속옷보단 매우 야한 속옷을 취급하기로 이미 남고생들 사이에서 소문이 난 '란제리 숍'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서 포장한 속옷은.... 끈 쪼가리나 다를 바 없었을 테다. 지금 생각하면 속옷이 야하거나 말거나 하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 아니었지만, 그때는 마치 '평범한 흰 속옷' 정도 였다면 잘 넘어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나 싶다. 나는 여전히 문자메세지에 단 한 글자도 쓰지 못한 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밤하늘은 정말 오지게 맑았다. 서울 같지 않게. 내 마음은, 반대로 시꺼먼 암흑이었다. 여느 때의 별 하나 안 보이는 서울 밤하늘처럼. 홀로로롤롤롤롤. 세상에는 부딪히지 않고 피해갈 수 있는 일과, 부딪혀야만 하는 일이 있다. 전자는 피하더라도 문제가 더 나빠지거나 하지 않지만, 후자는 명백하게 '피할 수록 해결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삶을 이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절대 밟고 싶지 않은 곳에 발을 디뎌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가령, 모든 답안을 하나씩 밀려 쓴 수능 성적표를 집에 들고 가야 하는 기분이라면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여성' 인 것만으로도 힘든데, '좋아하는 여성' 인데다가, 그게 심지어 '성'과 관련된 일이라니. 난이도가 올라도 좀 단계적으로 올라야 하는 거 아닌가? 왜 세상엔 마리오가 먹는 녹색 버섯이 없는 걸까. 목숨 하나 더 놓고 리셋 버튼을 눌렀으면 좋겠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 벤치까지만.. 까먹을 게 따로 있지 이 멍청이 삼룡 등신 빙구시끼야.. 쭈그리고 앉아 수없이 애꿎은 핸드폰 액정만 열었다 닫기를 수 차례, 결국 난 문자를 쓸 각오를 세웠다. 지금이야 별거 아닌 것 같지만, 그 때는 진짜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의 권상우처럼, ‘니가 그렇게 싸움을 잘해? 옥상으로 올라와!’하고 패기를 부리는 정도의 각오를 필요로 했다. 정말이다. [정아, 내가 아까 시디 주는걸 깜빡 했는데 벤치에 두고 온 것 같아. 혹시 네가 챙겼니?] 문자를 몇 번을 다시 썼는지 모르겠다. 처음에는 '오해 할까봐 블라블라', 그 다음에는 '시디 말고 들어있는 거 안 열어봤지 블라블라', '형이 어쩌구 블라블라' 그런데 쓰고 지우고를 반복할수록 마음은 점점 '심플하게 물어보는 것 말고는 도저히 답이 없다'로 기울었다. 그저 정이가 그 까만 봉다리를 찾지 않았기를, 그냥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 내가 모르는 곳으로 떠났기를 빌고 또 빌었다. 심플한 문자메세지의 내용은 상당한 고민을 통해 나온 문장이었는데, 쩡이가 만약 까만 봉다리를 가져가지 않았다면 무난하게 넘어갈 수 있고, 만약 가져갔다고 하더라도 속옷에 대해 전혀 언급을 하지 않음으로써 상대의 반응을 본다. 완벽한 전략을 위해 머리를 굴리며 십분이 넘게 쓰고 지운 문자메세지였지만, 보내고 난 뒤에 속이 빠르게 타들어가는건 어쩔 수 없다. 명치가 지끈 지끈한게 위가 아파오는 느낌이다.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정이는 '네, 제가 챙겼어요. 근데 시디 말고 다른것도 있네요. 아파트 앞에서 뵈요.'라는 짤막한 답장을 보내왔다. 식은 땀이 흘렀다. '대응'하려는 모든 반응들- 화를 낸다거나, 무시한다거나, 실망했다거나, 되묻는다거나- 대신, 정이는 금세 내려온다고 하였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하며 벤치에 주저앉아 초조함을 달래려 문자를 되새기니, '포장된 상자를 함부로 열어볼 만큼 무례한 아이는 아닐지도 몰라'까지 생각이 도달했다. 사람의 간사함이란 끝이 없는 게, 나는 그 와중에도 내가 유리하게 느낄 상황만을 상상하기 위해 애썼다.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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