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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7/02/18 11:21:02
Name   사슴도치
Subject   종이공룡
어렸을 때 마트에 갔을 때 눈에 들어온 건 종이로 만드는 공룡 공작 셋트였다. 종이에 인쇄되어 칼집이 난 각 유니트를 뜯어 풀로 붙여서 만들어 놓은 - 지금 생각해 보면 폴리곤 그래픽을 구현한 듯한 - 공룡들은 꼬리를 움직이면 입이
벌어진다던가. 뿔이 움직인다던가 - 물론 몸통 내에 있는 종이로 된 간단한 트릭장치에 의한 운동 -하는 모습으로 나를 사도록 요구했고, 뭔가 공룡을 만든다는 점에서 부모님을 졸라 그것을 사가지고 집에 돌아왔다.

들어있는 공룡은 대략 12마리 정도의 호화판이었으며 부모님의 손을 빌리지 않고 스스로 만들어 보기 위해 설명서를 보며 꼬물꼬물 손을 놀렸던 것이다. 그러나 애초에 예술적인 무엇인가를 만드는데에는 거의 소질이 없었던, 그리고 야무지지 못했던 나는 제대로 만들지 못했고, 안에 그 단순한 운동장치조차 삽입하지 못하였다. 나름 어린 머리에 잔머리를 쓴다고 테이프의 힘을 빌어 덕지덕지 만들어 놓은 공룡은 마트에서 견본으로 내어 놓은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운동장치가 기본적인 뼈대 노릇을 하던 그 공룡들은 공룡이라고 보기에는 흉물스런 모습으로 방치되어 결국엔 세마리의 흉물을 남기고 아홉마리는 그 상태로 책꽂이에 박혀있다가 이사가면서 버려졌던가 어쨌다던가 하는 이야기.

어린아이의 영악성으로 대충 모양만이라도 잡으려던 공룡은 차마 그 모습조차 갖추지 못하고 그대로 쓰레기가 되어버렸다. 사실 지금도 마찬가지인지라,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 있으면 남에게 맡겨버리고, 해야 할 일들은 선택적으로,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서 갖가지 요령을 다 부린다. 되도록이면 지름길로, 되도록이면 편한 길. 뭐 그래서 결과가 좋은 일은 하나도 없었고, 나 스스로에게도 딱히 손에 잡히는 확연한 결과물은 아무것도 없었다. 일이든, 사람이든. 무엇이든 간에 언제나 말했다시피 나는 게으르고 무뎌서 뭔가를 쟁취하기 위해 열심히 자신을 불태우는 사람들이 참 신기할 따름이다.

그래서 언제나 비극적인 - 아 너무 단어선택이 비장한 것 같다 - 비극적이기 보다는 흉물스러운, 그때의 그 종이공룡같은 사태가 Da Capo하여 돌아오고 또 돌아오고 뭐 그런 것. 물론 그래서 Fine는 없다.

몇년 전 롯데리아 감자튀김 커버에는 영국 러셀버뱅크산 감자로 감자튀김을 만든다고 쓰여 있었다. 감자튀김 주제에 엄청 있어보이는 설명이다. 영국산 감자라니! 기펜재의 대명사 감자! 기펜재의 고향 영국에서 온 감자! (생각해보면 음식에다가 '영국'이라는 글자를 붙인 것 자체가 실패한 마케팅이었지만). 오늘 오랜만에 간 롯데리아 감자튀김에는 그런 설명이 사라지고 없었다. 러셀버뱅크 감자튀김은 실패한 걸까. 마치 내 종이공룡처럼. 문득 감자튀김을 집어먹다가 그때의 종이공룡이 갑자기 생각났다. 좀 뜬금없지만. 원래 생각이란 그렇게 점프하는 법이다.

이렇게 점프하는 생각, 의도, 행동들 때문에 정석적인 루트로 무엇인가를 해본 적이 없어서 공부할 때도 시험에 나올 (것 같은) 부분만(아이러니컬하게도 내가 찍는 부분들은 시험에 나오지 않는다. 여러분 제가 공부하는 부분 이외의 부분을 공부하세요), 겉으로 그럴싸해 보이는 눈속임들로 처리를 하는 경우가 많다. 공연을 할 때도, 어려운 코드는 모두 동일 스케일의 쉬운 코드로 바꿔쳐버려서 연주를 한다던가(예컨대 7코드를 몰래 빼버려도 딱히 티가 나지는 않는다.), 하는 방법으로 말이다.

나이를 먹어도 완성이 보장되는 확실하게 보장되는 정석적인 길과 완성이 보장되지 않는 쉬운 길 중에 후자에 자꾸 눈이 가고 그러는 걸 보면 난 아직 어른이 되려면 한참 멀었나 보다.

도대체 올해는 몇마리의 종이공룡을 만들려고 시도해서 몇마리가 나무 시체가 되어버릴 지 모를 일이다.

"종이접기는 기분이 착 가라앉는 놀이다. 특히 처음 접어보는 것일 때는 책의 지시에 충실히 따르는 게 중요하다. 그렇게 집중하다보면 머리가 텅 빈다." <소란한 보통날>, 에쿠니 가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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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썼던 글을 우연히 찾아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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