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7/03/08 01:38:11
Name   Vinnydaddy
Subject   야밤에 쓰는 개인적인(?) 교향곡 이야기 - '합창'과 브람스 1번
탐라에 쓰다가 너무 길어져서...

https://youtu.be/sJQ32q2k8Uo

명작 중의 명작이고, 어떤 분은 지겨워하실, 그리고 어떤 분은 시계태엽 오렌지를 떠올리실지도 모를, 베토벤 9번 '합창' 입니다. 2012년 Proms에서 바렌보임이 지휘한 버전입니다.

* 어디까지나 제가 들은 걸 꿰어맞춰서 생각한 거니까 틀린 부분은 사정없이 좀 얘기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사실 4악장과, 그에 시를 얹은 5악장이 베토벤이 가장 하고 싶었을 이야기인 게 뻔하죠. 그런데 이 4악장을 전개하는 방식이... 1, 2, 3악장에서 나왔던 주요 멜로디를 불러온 후, '응 그거 아냐' 하고서 슥슥 지우고 새로운 멜로디를 아주 조용하게 꺼냅니다. 베이스와 첼로가 시작하고, 바순이 제가 제일 좋아하는 대선율을 연주하며, 비올라와 세컨 바이올린, 퍼스트 바이올린, 그리고 오케스트라 전체가 살아납니다. 그 순간, 합창단이 '언어'를 멜로디 위에 얹기 시작하며 이 모든 것이 새로운 의미를 띠기 시작합니다.

"오, 친구여, 이 노래가 아닐세! 좀 더 즐겁고 기쁜 노래로 노래하세!(O Freunde, nicht diese Töne! Sondern laßt uns angenehmere anstimmen, und freudenvollere!)"

바리톤의 이 서두로부터, 베토벤은 '인간의 승리'를 선언합니다. '천사 케룹은 신 앞에 서고', '그대의 날개 머무는 곳에 모든 인류는 하나가 되며', '백만인이 서로 손을 잡고' 말입니다. 사실 4악장 서두에 왕의 1악장, 신의 2악장, 문학의 3악장을 모두 부정하고 이성의 멜로디를 세운 시점에 이건 예견된 사태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https://youtu.be/InxT4S6wQf4?t=6m51s

사실 그는 이미 3번 교향곡 '에로이카'에서 이 짓을 한 적이 있습니다. 신을 찬양할 때나 썼던 Eb major로 1악장을, 그나마도 서두마저 생략하고 빵! 빵! 때린 후 신적인 영웅을 찬양했다가, (그에게 실망했는지 어떤지 모르지만) 2악장에서 그를 장사지낸 후, 4악장에서는 뜬금없이 자신이 전에 써먹었던 '프로메테우스'에서 테마를 가져온 멜로디를 늘어놓습니다. 신에게 대항해 인간의 이성의 승리를 찬양한 것이지요.
그리고 그는 20년 후 더 이상 완벽할 수 없는 형태로 이성의 승리를 선언합니다. 이 시점에서 더 이상, 고전적인 양식으로는 새로운 것을 말할 수 없는 시점이 되었습니다. 당연히 새로운 음악이 나왔죠. 인간은 이미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는데요. 그 승리를 더 찬양해 봐야 무엇하겠습니까. 즐겨야죠. 새로운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찾아 나선 사람들이 바로 낭만파 음악을 만들었고, 인류의 진보에 대해 낙관적이었으며, 서로에게 갈등이 생겨도 '뭐, 귀찮으면 그냥 다같이 크게 한 번 싸우자. 모든 싸움을 없애기 위한 큰 싸움을 하고 나면 더 이상 싸우지 않겠지' 이런 낭만적인 생각을 한 족속들이었습니다. 그러다가 1차대전이 터졌죠. 그리고 나서는 '아 시바, 인간은 원래 위대한 존재가 아니었나봐' 하면서 온갖 것들이 새롭게 나오기 시작합니다...라고 생각합니다. 대충 끼워맞추다보니 이렇게 맞더군요.

하려던 얘기는 이게 아니었는데... 음. 브람스가 내놓은 1번 교향곡의 4악장입니다. 고 클라우디오 아바도 지휘 LP복각판입니다.

https://youtu.be/QDkTTpn04U4?t=35m45s

베토벤 9번 4악장과 너무도 닮았죠. 9번을 오마주하면서도 나름 다르게 하려고 몇십년을 애쓴 브람스였지만 저 같은 막귀가 보기에도 너무 뻔한 오마주였습니다. 한스 폰 뷜로가 "이건 베토벤 10번인데?"라고 말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죠.

어... 뭐랄까. 베토벤 9번과 브람스 1번의 4악장을 들을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다르면 같은 이야기도 이렇게까지 다른 방식으로 전개해서 말할 수 있구나 하고요.

https://youtu.be/sJQ32q2k8Uo?t=47m50s

같은 교향곡의 4악장입니다. 베토벤은 직선적이기 이를데 없습니다. '이것이 진리요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라고 강렬하게 때립니다. 그 강렬함은 너무나 압도적입니다. 반박이 불가능합니다. 한 시대를 끝내고 다음 시대를 열어젖힐 힘조차 갖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9번 4악장에서 그 멜로디의 제시 방식이 그러합니다.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것을 '부정'하고 새로운 진리를 제시합니다. 그 진리에 의해 인류는 '신 앞에 서서' '환희를 느낍니다'.

반면 브람스는 대놓고 부정하지 않습니다. 아마추어에서 브람스를 연주하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모든 사람이 제 소리를 제 때에 제 크기로 정확하게 내어서 모든 것이 앙상블되지 않으면 정말 어설프게 들리기 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 1번 교향곡부터 거의 완성된 형태로 자신의 이야기를 내놓았던 브람스니만큼 1번 교향곡에서도 그 솜씨는 더할 나위 없습니다. 모든 멜로디, 모든 악기가 포용되고 넓게 전개되다가, 저 천상에서 들려오는 것 같은 호른 소리와 함께 승리의 선언이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그 승리의 선언은 베토벤처럼 강하지 않습니다. '자 우리 다 같이 이겼다' 싶은, 다독다독거리는 느낌이랄까요...

그래서인지 요즘은 후회되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재작년에 제가 소속되었던 동아리에서 OB YB 할 것 없이 창립 10주년 기념으로 이 브람스 1번을 올렸는데, 저는 무모한 짓 한다고 생각하고는 참여하지 않았거든요. 현실적인 여러 난관도 있었고요. 그때 무리해서라도 한 번 시도해 볼 걸 그랬나... 하고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 쓸 때는 이런 잡다한 횡설수설을 쓸 계획이 없었는데, 글이란 게 그러네요. 제 스스로 가지를 붙여버리네요. *
* 여기까지 읽어주신 분 있으시다면 대단히 죄송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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