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1/09/01 11:01:13
Name   Vinnydaddy
Subject   군대에서 가장 잊히지 않는 사람
#0.
탐라에서 군머라인 보고 쓰다가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 티타임으로 왔습니다.

#1.
저는 99년어느 포병여단 인사처 부관과에서 사병계로 근무했습니다.
인사명령을 발급하고 아래 15개 대대에 뿌려주고, 신병 받아서 주특기 부여해서 뿌리고,
와중에 간부가 주는 문건 해독해서 타이핑하고, 엑셀작업하고 뭐 그런 일을 했습니다.
일보계 자리 비우면 일보나 제급식 집계도 했고, 일보담당 상황근무도 했습니다.
말년에 일 생겨서 사무실에서 물러나기 전까지 거의 붙박이로 사무실에서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가장 잊히지 않는다고 쓴 사람은,
그렇게 접점이 많았던 것도 아니고, 같은 처부도 아니었던,
군번이 1년 차이나는 작전처 소속 고참이었습니다.

#2.
작전이 핵심 오브 핵심 부서이다보니 그분은 항상 작전처와 그 옆의 상황실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몇백장짜리 PPT 만들다 날밤까기도 일쑤였고,
휴가가는날 작전처 간부가 지프로 쫓아가서 데려와 작업시키는 일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3.
처음에 그 분과 이야기를 나눴던 건 제가 전산과 전공인 걸 보고 같은 전공이었던 그 분이 말을 걸어서였습니다.
별 거 없다는 걸 깨닫고 그쪽의 흥미는 금세 줄어들긴 했지만, 그래도 이래저래 나쁘게 지내진 않았던 거 같습니다.
그 분 성격이 아래 후임들 괴롭히고 하는 성격도 아니고 워낙 바쁘기도 했으니까요.
제가 상황근무를 서면서, 변동되는 병력 상황을 기록하러 매일 상황실을 한 번씩 들르면서부터는
자주 얼굴보고 인사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4.
그 분에게 감탄하게 되었던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제가 근무했던 부대는 구타는 거의 없어졌는데,
병장 달면 청소 같은 거에서 면제된다거나 하는 내무부조리는 남아있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배식 관련한 거였는데,
빵식 나왔을 때 나오는 계란후라이를 병장들은 5~6개씩 집어가서 먹다 버리고 나머지들은 못 먹고,
떡국 나왔을 때 나오는 고향만두를 병장들은 역시 식판 가득 담아다 먹다 버리고 하는 거였습니다.

못 먹어도 죽는 거 아니니 그러려니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떡국이 배식된 날이었습니다.
병사식당에 가 보니 그 분이 직접 국자를 쥐고 계신 겁니다.
병장들 한 명 한 명과 일일이 말다툼해 가면서 떡국을 손수 퍼 주고 계셨습니다.
배식받은 떡국에는 만두가 몇 알 들어있었습니다.

알고보니 진작부터 벼르고 있던 그 분이,
떡국이 배식된 걸 알고는 미리 식당에 내려가서
원래 따로 담겨있던 만두를 국통에 부어버리고는,
다른 병장들이 지랄하지 못하게 국자까지 손수 잡았던 겁니다.

말했다시피 안 먹어도 죽는 것도 아니고 고작 만두 몇 알일 뿐입니다.
그 분이 제대한 후에 만두나 계란후라이 배분이 원래대로 안 돌아간 것도 아닙니다.
아마 저 같으면 그냥 조용히 넘어가는 걸,
철면피처럼 식판 한가득 퍼가지는 않더라도 적당히 많이 집어가며 다들 그러는 건데 뭐 이렇게 넘겼을 겁니다.

그리고 왠지 그 분도 자기가 하는 행동이 결정적인 변화로 이어지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직접 국자를 쥔 그 날의 장면이 제게는 잊혀지지 않는 울림으로 남아 있습니다.
여러가지 의미로도 다가왔지만, '멋있다...'는 느낌이 가장 컸던 것 같습니다.

근데 오늘의 본론은 이게 아닙니다.

#5.
말씀드렸다시피 그 분은 작전처 상황실 근무를 하셨습니다.
밤새 변동되는 상황판을 적고, 그걸 당직사령에게 보고하고,
당직사령이 다음날 아침에 여단장이 주재하는 회의에서 보고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매일 변동되는 병력현황을 적으러 작전처에 한 번씩 들렀습니다.

#6.
포병여단 본부 옆에는 관측대대 2개 중대가 있었습니다.
본부대 병사들은 너무 바쁘다보니 5분대기조나 위병소 같은 임무는 관측대대에서 맡아서 섰습니다.
그런데 1년에 두 번, 유격훈련과 혹한기훈련 때에는 어쩔 수 없이 본부대에서 병사를 추려서 꾸렸습니다.

사건은 제가 아직 짬찌끄레기일 때 벌어졌습니다.
저희 처부에 있던 성격이 더러운 고참 한명이 저희 부서를 대표해 5대기에 들어가 대기중이던 때였습니다.
그 분을 뭔가 말도 안되는 이유로 트집잡아 갈구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무 말도 안하고 혹독한 갈굼을 묵묵히 견디는 그 분을 보며 '저XX 또 시작이네' 이러면서 지나갔습니다.

그날 밤 상황대기가 끝나고 상황판을 적으러 상황실로 올라가니 그 분이 있었습니다.
상황판을 적다가 갑자기 씩 웃고 있었습니다.

#7.
내무실로 돌아와서 잠들었는데, 갑자기 그날 밤 우당탕탕 하는 소리가 들려 잠에서 깼습니다.
"누가 신발 벗고 자래 이 XX야!" "빨리 쳐 안움직여!" "탄약! 탄약 들어 이 XX야!"
옆옆, 좁은 내무실 하나에 모여있던 5대기에 출동 명령이 떨어진 겁니다.
뭐 해 봤어야 하죠. 5대기는 온갖 삽질 끝에 10분 이상이 걸려 출동했고,
담당 간부와 5대기 병사들은 친히 왕림하신 당직사령에게 개박살이 났습니다.

#8.
그리고 이건 저만 아는 후일담입니다.
그 날 아침에 올라가서 사무실 청소를 해 놓고 내려오는데, 그 분을 만났습니다.
그 분과 함께 내무실 쪽으로 걸어내려가는데, 조용히 그러시는 겁니다.

"원래 어제 5대기 점검 다른 데였거든."
"네?"
"원래 OOO대대 XXX대대 였는데 그 밑에 내가 여단본부 라고 적었다 아이가."
"...!"
"지금 그 글씨 슬쩍 지우고 내려오는 길이데이."

완전범죄에 성공했지만 누군가 한 명에게는 말하고 싶으셨던가 봅니다.
물론 저도 그 성격 더러운 고참 뿐만 아니라 그 분이 제대하실 때까지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9.
제대한지 내년이면 20년인데 군대 생각 할 때마다 높은 확률로 그 분이 떠오릅니다.

박정훈 병장님, 건강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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