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 SNS, 달콤창고와 홍차상자
어라운드(Around)라는 SNS가 있습니다. 자신의 실명을 바탕으로 활동하는 페이스북, 자신의 아이디를 바탕으로 활동하는 트위터와 달리 어라운드는 개별화 된 아이디가 드러나지 않기에 다른 SNS보다 훨씬 익명성이 강합니다. 익명성이라는 조건은 여러 가지 방향으로 작용합니다. 그 중 하나는 일상적인 인간관계망에 포함되어 있지 않기에 보다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다른 하나는 같은 이유로 관계망 속에서의 처벌에 대한 두려움 없이 타인을 공격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익명 SNS라는 말을 듣고 많은 분들이 떠올리는 가능성은 후자에 가까울 것입니다. 이 가능성을 어떻게 다루느냐는 이 공간의 이용자들이 서로에게 어떠한 방향으로 상호작용하는지에 영향을 끼치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어라운드는 익명성 악용을 사후에 처벌하는 것 외에도, 초창기 게시판 분위기를 조성할 때 신경을 많이 써서1) 호혜적인 문화를 정착시키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입니다. 2016년 12월 기준으로 140만명의 이용자가 앱을 이용하고 있다2)고 서비스 제공자 측에서는 밝히고 있는데, 실제 그 중 게시판을 활용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서비스 시작 초창기 밝혔던 자료에서는 "시작한 지 3주가 넘은 사용자의 2개 주간 평균 방문율이 37.2%"3)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자료를 바탕으로 추산할 때 약 50만명이 방문하고 있고, 그 중 실제 글을 올리는 사람은 더 적을지라도 규모가 상당하다 볼 수 있지요. 이용자가 적고 실명이여서 서로 대면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거나 하는 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감정과 경험을 밝히고 서로를 위로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우리가 익명화 된 공간에 대해 지니는 우려들은 공간 구조와는 다른 부분에 기인하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 필요가 있습니다.
달콤창고는 어라운드에서 시작된 활동(혹은 익숙하지 않은 표현을 빌린다면 실천practice)입니다. 달콤창고는 어라운드의 한 이용자가 2015년 5월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는데4), 지하철 사물함을 대여해서 간식이나 서로를 위로하는 쪽지를 공유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온라인 상으로 보고 읽던 선의를 만지고 느낄 수 있는 물질적 매개의 영역으로 끌어온 실천이라 볼 수 있습니다. 온라인으로 올려도 되는 메세지를 구태여 쪽지에 손글씨를 써서 창고에 넣어두는 것은 생각해보면 신기합니다. 한 편으로는 그 편이 훨씬 더 우리의 감각을 풍부하게 활용하기 때문에, 다른 한 편으로는 같은 불특정 다수라 하더라도 창고 이용자들로 한정지을 수 있기 때문이라 추측합니다. 물론 물질적인 이익을 취득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사후 처벌 가능성은 낮기에, 처벌을 통해 얻는 손해가 이익보다 커져 나타나 실천이 이어지지 않고 파괴되는 경우도 존재합니다5). 다만 기사를 통해 드러나는 양상을 일반화 하기는 조심스럽습니다.
홍차넷 사이트에서도 달콤창고와 같은 방식의 '홍차상자'를 2017년 2월 14일부터 3월 14일까지 종각과 인천터미널역 사물함에서 운영하고 있습니다. 홍차넷 사이트가 일종의 SNS 서비스인 '타임라인'을 운영하고 있으며, 이 타임라인에서 이용자들이 어라운드의 달콤창고와 같은 방식으로 홍차상자를 제안 및 이용하고 있다는 점은 눈길을 끕니다.
어라운드와 홍차넷 타임라인이 공유하고 있는 요소는 일종의 상담소 같은 특유의 분위기입니다. 홍차넷 이용자들은 자신의 메세지가 향하는 공간이 특정한 문화를 향해 정향되어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고, 이러한 분위기가 형성된 원인에 대해 나름대로 논의를 했습니다. 하나는 어라운드의 그것과 마찬가지라는 주장입니다. 초창기 이용자들이 자신의 감정, 경험을 내비치고 서로를 위로하는 분위기를 조성해놓았고, 일종의 누적적 인과관계가 만들어지면서 문화가 형성되었다는 이야기이지요. 다른 한 편으로는 사이트를 이용하는 구성원이 인터넷 공간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평균 연령대보다 높고, 고학력이라는 주장을 따라 특정 계층의 에토스6)가 반영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각각의 주장을 여기서 검증해 볼수도 없고, 제가 그럴 능력도 없지만 언급한 사이트 이용자들의 자기 이해는 검색을 통해 금새 확인할 수 있습니다.
허나, 홍차넷 타임라인은 어라운드와는 다른 구조를 지닙니다. 정체성을 식별할 수 있는 아이디가 있으며, 차단한 이용자를 제외하면 이용자들이 올리는 모든 글이 눈에 들어오고, 한 페이지에 나오는 글에 한계가 있습니다. 메세지가 불특정 다수를 향하는 점을 페이스북보다 크게 느낄 수 있고, 메세지가 불특정 다수에게 읽히리라는 점을 트위터보다 뚜렷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페이지가 존재하기에 뒤 글을 읽는 불편함이 커 글의 휘발성은 커집니다. 그러면서도 하루에 올릴 수 있는 메세지의 숫자를 한정해놓아 특정 이용자가 공간을 독점하는 것을 방지해놓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정 이용자에게 관심이 더 쏠리는 등 사용자들끼리 서로의 아이디를 기억하고, 이를 바탕으로 네트워크를 맺는 양상은 두드러집니다. 타임라인 이용자 규모가 인간이 인식 가능한 관계망 숫자 보다 적어 나타나는 현상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라운드의 달콤창고 이용 내역은 기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확인하는 것 외에는 살펴볼 수 없었고, 종각 홍차상자 이용 내역은 2017.2.14일부터 2017.03.06 20:10분까지 살펴보았습니다.
표 하단에 주석을 통해 밝히듯이 정확한 자료는 아닙니다. 허나 확인할 수 있는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하나, 시장 가치로 전환하여 볼 때 자신이 홍차상자에서 가지고 간 것 이상을 상자에 놓고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둘, 자료를 검색할 수 있다는 그 자체가 알려주듯이 이용자들은 자신이 홍차상자를 이용했다고 타임라인에 올립니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가져가기만 한 경우에도 이용했다는 글은 올립니다. 거꾸로 말하자면 위 조사는 온라인 인증을 살펴보아 정리하였기에 아무 글도 남기지 않고 이용한 사람들은 누락되어 있습니다. 셋, 자신이 아무것도 남기고 가지 않았다고 밝힌 적이 있는 12사례의 이용자를 따로 살펴봤을 때, 무언가를 채워놓은 적이 없는 사람은 1명 밖에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중에 다시 방문하여 이용하면서 채워넣기만 하든, 무언가를 가져가고 채워넣든지 했습니다. 넷, 한 번 방문 때 무언가를 가져가고, 놓은 것이 확실한 경우는 조사한 112개의 사례 중 59 경우입니다. 가져가는 것이든, 놓고 가는 것이든 어느 한 쪽에 뚜렷한 설명이 없는 경우는 100 경우이니, 무언가를 가져가고 / 놓은 경우는 59에서 100 사이에 있을 것입니다. 이 숫자는 정확하지 않으니 숫자 자체에 주목하기보다는 전반적인 흐름을 봐주시면 됩니다. 마지막으로, 2월 14일에 시작한 이러한 선물 교환은 조사 시점까지 계속해서 이어졌습니다.
합리적 인간, 게임, 최후통첩/독재자 게임7)
위에 정리된 위의 이타적이고 협력적인 결과는 인간이 자신의 이익 극대화를 추구한다는 경제학의 모형과는 들어맞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의 사례 뿐만 아니라, 개인이 이타적으로 협력하는 상황은 현실에서 자주 목격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을 설명하기 위한 이론적 기반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여기서는 인간에게 이타적 행동이 나타나고, 유지되어 온 것을 설명하기 위해 최정규(2009)의 책에 기반하여 진화적 게임 이론을 일부 소개하고자 합니다. 진화적 게임이론이란 '사회의 복잡한 현상들을 모형화하여 진화라는 패러다임하에 게임으로 구성하고, 사람들의 다양한 상호작용의 결과가 어떻게 규범이나 관습이 되어 다시 사람들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가에 관한 이야기'8)입니다. 진화와 게임이론이라는 두 요소가 한데 묶이는 고리는 게임이론 그 자체의 정의에 나와있습니다. 게임이론이란 '행위자들 간의 전략적 상호작용을 분석하는 이론(p. 316)'이며, '어떤 행위자에게 돌아오는 보수(報酬, payoff)가 그 자신의 행동뿐만 아니라 다른 행위자들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을 때, 우리는 그 행위자가 전략적 상황에 처해 있다(p. 316)'고 봅니다. 여기에 특정 전략을 통해 얻은 보수가 그 전략(혹은 전략을 지닌 행위자)의 생존 및 전파 가능성에 영향을 미친다고 본다면, 게임이론을 진화적 패러다임에 놓게 됩니다.
여러 게임 중 최후통첩 게임과 독재자 게임을 소개하면서 우리의 행동을 확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음과 같은 상황을 머릿속으로 그려봅시다. 방 한가운데에는 멋진 탁자가 놓여 있고 그 주위로 나를 포함한 세 사람이 앉아 있습니다. 모임의 주관자로 보이는 아주 자상하게 생긴 사람이 나와 다른 또 한 사람을 둘러보더니 탁자 위에 만 원짜리 한 장을 올려놓습니다. 그러고는 내게 말을 꺼냅니다. "여기 만 원이 있습니다. 이 돈을 당신께 드리겠습니다. 제가 드린 만 원 중 일부를 여기 앞에 앉아 계신 분과 나누는 겁니다. 얼마를 건네주든 상관없습니다. 1원도 좋고, 100원도 좋고, 만 원을 다 드려도 좋습니다. 앞에 앉아 계신 분이 그 금액을 흔쾌히 받아들인다면 당신이 제안하신 대로 금액을 서로 나눠 가질 수 있습니다. 단, 앞의 분이 그 제안을 거절하신다면 제가 만 원을 도로 가져가는 것으로 하겠습니다."'(p. 257, 종결어미는 흐름에 맞게 수정)
[최후통첩 게임]이라 불리는 이 상황에서 우리는 제안자와 응답자로 역할을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제안자라면, 얼마를 제안하느냐에 따라 가져갈 수 있는 금액은 달라질 것입니다. 고려해야 할 것은 상대방이 나의 제안을 거부한다면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얼마를 제안하실 것인가요?
반대로 응답자가 되었다고 생각해봅니다. 상대방에게 제안의 우선권이 있지만, 나에게는 거부를 할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상대방이 얼마를 제안할 때 받아들이고, 얼마를 제안할 때 받아들이겠습니까?
각자의 답이 무엇이든지 간에 합리적/이기적 인간이라는 정의에 기반할 때 펼쳐지는 상황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제안자일 때는 상대방의 전략을 예측하여 나의 대응 방침을 세워야 합니다. 제안자와 응답자 모두 이기적이여서 서로 이익을 극대화 하고자 한다고 할 때, 상대방은 나의 제안을 무조건 수용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내 제안이 얼마이든지 간에 수용하면 돈을 얻지만 거부하면 한 푼도 얻지 못하니까요. 이런 상대방의 입장을 알고 있기에, 내가 제시할 합리적인 금액은 0보다 큰 최소한도의 금액입니다. 응답자의 입장에 섰을 때도 답은 동일합니다.
실제 결과는 예측과는 다릅니다. 최후 통첩 게임을 시켰을 때 제안자들은 평균적으로 4~50%에 해당하는 금액을 상대방에게 건네주었고, 응답자들은 제안 금액이 20% 보다 낮으면 거부 했습니다. 게임 결과는 이론이 예측하는 바와 달랐지만 설명할 수 있는 여지는 있습니다. 상대방이 제안을 거절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면, 자기가 한 푼도 못 받을 위험성을 고려하여야 하니까요.
연구자들은 이 부분을 고려하여 게임을 바꿔보았습니다. [독재자 게임]이라 불리는 게임인데, 몇몇 분들은 제목만으로도 감을 잡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독재자 게임에서는 제안자가 얼마의 금액을 상대방에게 제안하는 걸로 게임이 끝납니다. 전략적 상호작용의 한 축을 제거해버린 셈입니다. 이 극단적인 게임의 결과는 최후통첩 게임에서 보았던 것과는 다르지만, 여전히 합리적 인간을 바탕으로 예측했던 것과 더 큰 차이가 있습니다. 4~50%에 해당하는 금액을 건네주는 사람들의 수는 줄었습니다. 허나, 제안자들은 평균 25%에 해당하는 금액을 건네주었습니다. 상대방이 거절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말이지요.
인간 뿐만 아니라 자연을 폭넓게 살펴보았을 때 개체들 간의 이타적인 행위는 종종 발견됩니다. 혹자는 개별 개체가 이기적으로만 행동한다는 가정에 집착하지 않으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허나, 이기적 개체(인간)와 이타적 개체(인간)가 공존한다면, 이타적 개체가 그 사이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가 있는지 설명해야 한다는 문제가 생깁니다. 우연을 통해 이타적인 성향을 지닌 개체가 나타날 수 있다 치더라도, 이러한 성향을 지닌 개체가 특정 집단 내에서 생존하고 자손을 퍼트릴 수 있다는(혹은 인간에 주목해서 이타적 문화적 유전자meme가 전수/확장될 수 있는) 과정은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합니다.
출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2006); 장건화(2010). "의료보험제도에 대한 경제학적 단상: 공동체와 시장" p. 39에서 재인용 (https://www.slideshare.net/gunnajung/-5383057). [우리에게 익숙한 죄수의 딜레마가 보여주듯이, 특정 조건 하에서는 이기적 개체가 일방적으로 승리하게 됩니다]
7가지 가설
학자들은 이타성의 출현/생존/전파를 설명하기 위한 여러 가설들을 고안해 냈습니다. 여기서는 각 가설의 중요 부분만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세부적인 내용 및 각 가설에 연관된 깊은 내용은 언급한 책을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첫째는 혈연선택 가설입니다. 개체가 보이는 이타적 성향은 유전자의 관점에서 볼 때 이기적이고 합리적인 행동을 취한 결과라는 관점입니다. 각 개체와 달리 유전자는 자기 자신을 최대한 많이 복제하는 쪽으로 선택 압력을 받고 있습니다. 유전자는 자신과 같은 성질을 지닌 유전자의 번영과 이해관계를 같이 합니다. 유전적 근친 관계에 있는 개체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협조적 행위는 이를 바탕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타적 행동이 혈연 관계가 있는 개체들 사이에서만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혈연선택 가설은 한계를 지닙니다.
둘째는 반복-상호성 가설입니다. 개체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이타적 행동, 협력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이익을 극대화 하기 위한 행동이라는 점입니다. 게임이 충분히 반복된다고, 혹은 다음 번에 반복될 확률이 충분히 높다고 가정할 때, 협력하는 상대에게는 협력, 배신하는 상대에게는 배신이라는 태도를 취한다면 전략적 상호작용 하에서 보수를 극대화 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떻게든 협력이 일어날 수 있다면 누적된 협력은 배신을 통해 얻는 일시적인 이익을 상회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반복-상호성 가설은 상당히 강력하지만, 실제 사회를 관찰해보면 게임이 반복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이타적인 성향은 나타납니다.
위 두 가설들은 여전히 개체 차원이든, 유전자 차원이든 주체가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 시키는 방향으로 행동한다는 관점으로 접근합니다. 이는 '보수대응적' 인간이라는 표현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언급했듯이 보수대응적 인간관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행태가 존재합니다. 무임승차자에 대한 보복 실험은 자신의 손해가 명백한 상황에서도 무임승차자를 징계하려는 성향이 있다는 사실도 보여줍니다. 이러한 현실을 설명하기 위해 학자들은 상호적 인간homo reciprocan이라는 관점을 발전시킵니다. 상호적 인간은 '행위대응적'인 성향을 지닙니다.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만 행동하지 않으며, 상대방이 어떤 행동을 하는가에 따라, 즉 상대방이 자신에게 호의적으로 나오거나 사회적 합의나 규범을 충실히 따른다면 이에 대해 보상하고 상대방이 사회적 합의나 규범을 어기면 보복(p. 162)'합니다. 여기서의 상호성을 앞선 반복-상호성 가설에서의 상호성과 구분하기 위해 '강한' 상호성이라 부릅니다. 이후의 가설들은 강한 상호성을 설명하기 위한 가설들입니다. 앞선 두 가설에 비하자면 다소 엉성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듯합니다.
셋째는 유유상종 가설입니다. 이타적인 사람들은 이타적인 사람들끼리, 이기적인 사람들은 이기적인 사람들끼리 만나서 상호작용을 한다면 이타적인 성향이 생존, 유지될 가능성이 높다는 가설입니다. 동일인과의 반복적인 상호작용이라는 가정을 제거한 상황에서, 나올 수 있는 자연스러운 대안 중 하나입니다. 실제 우리는 비슷한 부분이 있는 사람들을 선호하는 경향을 지니는데, 이러한 경향과 유유상종 가설을 연계한다면 상호적 특징이 사회에서 유지되는 것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넷째는 값비싼 신호 보내기 가설입니다. 서로의 능력을 알려주는 정보가 비대칭적인 상황에서, 능력에 대한 정보를 알리고자 하는 쪽은 신호를 보내야 합니다. 상대방이 이 신호를 신뢰하기 위해서는 능력이 없는 사람은 흉내낼 수 없는 정도로 비용이 큰 신호를 보내야 합니다. 이 가설 하에서 강한 상호성은 자신을 과시하기 위한 행위입니다. 타인에 대한 선행이나, 불의에 대한 용기 모두 자신의 능력에 대한 신호를 보내는 것이라 보는 관점이지요.9)
다섯째는 의사소통 가설입니다. 전략적 상호작용에 참여하는 사람들끼리 의사소통을 하게 된다면 상호적인(강한 상호성) 행위가 증가한다는 가설입니다. 하지만 몇몇 실험을 통해 의사소통과 강한 상호성 사이의 연관이 확인되었지만, '의사소통이 구체적으로 어떤 경로를 통해 사람들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확립된 이론은 없(p. 198)'습니다.
여섯째는 집단선택 가설입니다. 자연선택이 개인 단위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집단 단위로도 일어난다는 주장입니다. '어떠한 특성이 집단 전체에 혜택을 준다고 하면 그 특성을 가진 개인을 더 많이 둔 집단이 그렇지 않은 집단보다 더 성공적이거나 생존에 더 유리(p. 202)'할 수 있습니다. 이타적인 특성이 집단 전체에 긍정적인 효과를 준다고 본다면, 집단 내 선택 과정에서는 이타적인 특성이 경쟁에 취약할지라도 집단 간 선택 과정을 통해서는 이타적인 특성이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 가설은 학자들 사이에서 상당한 논의가 있었는데, 회의적인 학자들은 개인 선택과 집단 선택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고 하더라도 둘이 진행되는 속도에는 차이가 크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허나, 저자는 '사회에 존재하는 제도가 개인선택 과정의 속도를 늦추고, 집단 선택 과정의 효과를 증폭시킴으로써 우리 사회의 이타적인 행동의 진화에 영향을 미친다(p. 214)'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어 '소득 재분배 정책은 이타적 행위 전략을 가진 사람들이 집단 내에서 사라지는 속도를 줄이는 효과를 갖(p. 216)'습니다.
일곱번째는 공간구조 가설입니다. 한 개인은 물리적 거리이든 사회적 거리이든 국지적인local 상호작용을 합니다. 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을 늘어놓고 무작위로 한 명을 뽑아서 그와 상호작용을 한다고 보는 것은 비현실적입니다. 국지적인 상호작용을 전제한 상황에서, 각 개인이 상호작용 이후 더 나은 보수를 얻은 이웃을 따라서 전략을 수정한다고 가정해봅시다. 달리 말하자면 국지적인 전략수정입니다. 사회 내에 이타적인 사람과 이기적인 사람을 반반씩 나누어 무작위로 배치시킨 후, 국지적인 상호작용/국지적인 전략수정 모델에 따라 죄수의 딜레마 상황에서 시뮬레이션을 돌려보면 흥미로운 결과가 나옵니다. 2회차 시뮬레이션까지만 하더라도 이타적인 사람들이 급격하게 줄어들었다가, 3회차 이후 증가하여 60% 선으로 비중이 늘어난 상태로 유지됩니다. 2회차 때 살아남은 이타적인 사람들은 운 좋게 끼리끼리 모여 살고 있던 사람들인데, 이 사람들이 평균적으로 높은 보수를 얻게 되면서 그 근처에 있는 이기적인 사람들이 전략을 수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기적인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끼어든다면 죄수의 딜레마 모델에 따라 이기적인 사람의 평균 보수가 급격하게 커지니, 모두가 이타적인 사람으로 채워지지 않는 결과도 설명이 됩니다.
다시 상자로 돌아와서
달콤창고/홍차상자를 게임으로 바꿔서 생각해봅시다. 상자를 늦게 이용하는 사람은 앞에 이용하는 사람이 남기고 간 것들만을 이용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한 쪽의 일방적인 수용이라는 점에서 독재자 게임과 달콤창고/홍차상자의 이용은 같은 구조를 지닙니다. 가져간 이후 무언가 채워넣어야 게임이 유지된다는 점에서 독재자 게임보다도 더 이타성을 요구하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어요. 제안한 사람들이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재미있는 사회적 실험입니다. 결과는 살펴보셨듯이 꾸준한 유지 뿐만 아니라 가져간 것 이상을 채워넣기도 한다는 거예요. 독재자 실험에서 손해볼 여지를 추가하되, 강제 장치는 만들어 두지 않았는데도 사람들은 기꺼이 손해를 봅니다.
홍차상자의 실험에서 나타나는 상호성은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위의 가설들을 종합하여 받아들인 후, 인간 사회에서 상호적인 특성이 진화했고 어느 정도 유지되어 있으니 설명이 충분하다는 입장이 됩니다. 여기에 한국 사회라는 특수성을 끼얹을 수 있지요.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실험은 없다고 하지만, 일본인을 대상으로 한 실험은 있습니다. 최후통첩 게임을 시켜본 결과 도쿄 사람들은 평균 45%의 금액을 제시했고, 20%의 이하의 제안 네 건 중 두 건을 거부했다고 합니다(p. 275, 책의 주석 37) 다만 이 경우, 어라운드 커뮤니티에 기반한 달콤창고이든, 홍차넷 커뮤니티에 기반한 홍차상자이든, 기타 다른 커뮤니티에서의 그것이든 한국이면 비슷한 결과가 나타나리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정말로 그럴지 안 그럴지는 모르겠습니다. 좀 더 많은 데이터가 있다면 비교해 볼 수 있겠지요. 둘째는 홍차상자를 둘러싼 국지적인 맥락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실천에 참여한 사람들이 그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중요한 영향을 미칩니다. 최후통첩 게임 이전에 문제를 풀게한 후 문제를 맞춘 사람에게 제안자의 역할을 주었을 경우, 응답자들은 매우 낮은 금액을 제안해도 받아들입니다(p. 270). 홍차상자에 참여하는 사람이 자신 눈앞에 있는 초콜렛 등을 당연한 보상으로 받아들이기는 힘들 것입니다. 사물함 비밀번호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타임라인을 들어가야 하고, 제안자가 올린 글을 확인하여야 하니까요. 절대적이지는 않지만 그 과정에서 제안자가 말한 취지를 확인할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참여자 중 얼마나 인증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100여 건이 넘는 타임라인 인증이 있다는 점도 고려해봐야 합니다. 이 인증은 한 편으로는 값비싼 신호 가설과 연결됩니다. 타임라인을 이용하는 집단 전체에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가져간 것이 적고, 내놓은 것이 많을 수록 더 큰 능력이 증명됩니다. 여기서 능력은 재력으로만 환원할 수는 없습니다. 손해를 감수할 수 있는 태도라든지, 타인에 대한 배려는 그 자체로 능력으로 여겨지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인증은 반복-상호성과 연관하여 볼 수도 있습니다. 홍차상자라는 실천에 참여한 사람은 같이 참여한 사람이든, 인증을 통해 구경할 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이든 향후 다른 형태로 그들과 상호작용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여 상호적인 태도를 취할 수도 있습니다.
방향을 뒤집어 타임라인에서 이미 형성된 관계에 주목할 수도 있습니다. 서로에 대한 공감이나 위로로 이미 반복-상호성(직접적 상호작용이든, 평판을 통한 간접적 상호작용이든)에 입각한 호혜적 관계를 형성했고, 이 관계가 홍차상자 이용에 영향을 주었다는 점입니다. 명확한 작동 원리가 알려지지는 않지만 아무튼 영향이 있다는 의사소통 가설을 연결하여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유유상종 가설 또한 홍차넷 커뮤니티 발전 흐름이나 구성원들에 대한 주장들이 맞다면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얘기들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수준의 얘기들이고, 실제 확인을 위해서는 더 많은 자료들이 필요할 거에요. 예를 들어 종각 홍차상자 사물함 이용 건수를 확인할 수 있다면, 제가 암묵적으로 깔아놓은 '홍차 상자를 이용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증을 했을 것이다'라는 가정이 깨질만한 자료가 나올 수도 있을 거에요. 제가 위에 말한 것도 기초적인 수준의 이야기이니, 더 공부를 많이 하신 분들 입장에서는 달리 보이는 것들도 있을 거고요.
1) 정현욱(2015.06.10) "유일하게 살아남은 한국판 익명 SNS, 어라운드" (http://kr.besuccess.com/2015/06/around/)
2) Around Story(2016.12.08) "[채용] 콘버스 디자인 총괄" (https://medium.com/around-story/%EC%B1%84%EC%9A%A9-%EC%BD%98%EB%B2%84%EC%8A%A4-%EB%94%94%EC%9E%90%EC%9D%B8-%EC%B4%9D%EA%B4%84-ad451bedcad8#.ljmydzjyi)
3) Around Story(2015.01.05) "어라운드(Around)를 말합니다" (https://medium.com/around-story/dd-c18c08b08bc6#.wr72oeco1)
4) 한국일보(2015.05.23) "대여료 때문에... 씁쓸해진 '달콤창고'" (http://www.hankookilbo.com/v/3073853f62dc44188b75acba1c934379)
5) 위의 기사
6) 부르디외가 제시한 인간에게 내면화 되어있는 성향들의 체계는 에토스와 액시스로 구분됩니다. 그 중 에토스는 일상의 행위를 결정하는 도덕의 의식적이지 않은 내면화된 형식입니다. 이는 논증을 거쳐 명시화/법규화된 이론적 형식인 윤리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에토스는 우리가 어떠한 행동을 하는 '실천적 상황'에서 원칙과 가치를 제공합니다. 이러한 에토스는 1차 사회화 기관인 가정과, 2차 사회화 기관인 학교를 통해 우리에게 습관으로 누적됩니다.
7) 이하의 내용은 모두 최정규. 2009. 『이타적 인간의 출현』. 서울: 도서출판 뿌리와이파이에 기반합니다.
8) 위의 책, 지은이 소개.
9) 저자는 값비싼 신호 보내기 가설을 보수 대응적 행위가 아닌 영역으로 집어넣고 있지만, 저는 이 부분은 보수 대응/행위 대응 양 쪽 모두로 생각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재력에 대한 신호를 보내 배우자 선택에서 이득을 취하려고 한다는 해석은 보수대응적이라 볼 수 있고, 공동체가 중요시 하는 가치에 대한 헌신을 보낸다면 행위대응적이라 느껴집니다. 아리송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