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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7/03/16 18:37:54
Name   세인트
Subject   불결한 글. (1)
* 미리 말씀드렸습니다. 이 글은 매우 불결하고 불결하며 또 불결합니다.
거기다 필력도 구립니다. 또한 절단신공도 쓸 겁니다.
이것이야말로 더러움의 삼위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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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의 첫 키스는, 연초 맛이 났다.
그러니까, 그닥 좋진 않았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담배라면 질색을 하니까.

내가 무엇에 홀려서 그를 좋아하게 되었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어설프게 내 집이 멀다고 차를 태워 줄 때에, 그가 멋진 팔근육을 보여주며 한 손으로 후진하는 멋짐을 보여주었나?
아니, 그는 지하 주차장에서 차를 뺀다면서 어설프게 벽에 너무 붙어서 우회전을 하다가 차 옆문을 다 긁어버리는 모습을 보여줬었지.

주말에 레포트 복사본 찾으려고 들른 동아리방에서, 그의 옷갈아 입는 모습에서 멋짐이 느껴졌나?
아니, 그는 종일 운동을 하고 와서 엄청난 땀냄새를 풍겼고, 무엇보다, 윗옷을 벗은 그 사람을 보면서 아기곰 푸우가 떠올랐었지.
저 배 봐라... 세 쌍둥이는 배셨나 쯧쯧.

평소에 매너가 좋고 다정다감한 사람이고 자상하게 이야기를 잘 들어 주는 사람이었나?
아니, 평소엔 별로 말도 없으면서, 남자애들 끼리 있을 땐 또 뭔 말을 그리 많이 하는지...

친절하고 배려를 잘 했던가?
아니, 그건 아닌데... 여기까지 생각하다보니 학창시절 기억이 하나 떠오른다.


담배 한 대.

지금처럼 담배가 비싼 시절도 아니었는데, 그 선배의 별명은 '담배 한 대' 였다.
거의 10년 가까이 대학을 다니면서, 졸업도 안하는 그 선배... 이게 무슨 여고괴담도 아니고, 학교에 늘 있는데 졸업을 안해. 어휴.
운동권 선배들이면 이해라도 갔을 것이다. 그쪽은 나보다 열댓학번 이상 차이나는 분들도 학교에 정말로 지박령처럼 붙어 있으면서
학생회실에서 숙식을 해결하던 분들이었으니까.
근데 그 선배는 그런 사람도 아니었다. 뭐 듣기로는 새내기 때부터 한 2~3년 간은 그쪽 활동도 열심히(?) 하셨다고 들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 선배는 동아리방에서 애들 밥이나 사주고 혼자 만화책만 읽던 존재였다.

이야기가 이상하게 흘러갔네. 의식의 흐름대로 쓰는 거라 그런가.
아무튼 그 선배의 별명은 담배 한 대 였다.
정말, 담배 한 대면 그 선배는 어떤 부탁도 들어 주었다. 여학우들한테만 그런 것도 아니고, 별의 별 괴상한 부탁도 어지간하면 다 들어 주었고,
결과물도 훌륭했다.
내가 처음 도움을 요청한 건, 기말고사 대신 제출하는 레포트였다.
CC였던 남자친구와 같이 들은 교양수업이었는데,  그 남친과 헤어지게 되면서 마지막 두 번의 수업은 출석도 하지 않았고, 기말과제도 제출하지 않고
F를 받고 드랍해버릴 요량이었는데, 초창기 수업시간에 남친과 닭살 행각을 벌이는 나를 교수님께서 기억하신 듯 했다.

"그 교수님, 너 왜 막판에 안 나왔냐고 하더라. 일부러 D 줄거래."

이뭐... 까지 말하고 급히 입을 닫았다. 학교에서 나는 항상 착하고 올곧고 명랑한 그런 이미지였다. 2년 넘게 쌓아올린 가면이다.
아무리 당황했다고 해서 입 밖으로 쌍욕을 할 수는 없지. 황급히 머리속 익숙한 욕설들을 급히 한켠으로 밀어내고 곤란한 표정을 짓던 내 눈에 들어온 건,
언제나처럼 동아리방 저 구석에서 혼자 만화책을 읽고 있던 그 선배의 옆모습이었다.

에이, 그래도 부탁해도 될까? 저 선배, 날 안 좋아하는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 먼저 든 것도 사실이다.
남학우 여학우 안 가리고 후배들 부탁은 항상 담배 한 대에 들어주고, 밥도 자주 잘 사주는 선배인데, 그랬는데...

사실 난 저 선배에게 한 번도 밥을 얻어먹지 못 했다고!!

물론 내가 밥 사달라고 부탁을 안 한 것도 있지만, 나름 과에서나 동아리에서나 내가 들어가면 언제든 선배들이 밥 사준다고 하던 나였다고!!
뭐, 남친 있는 동안은 그런 경우는 별로 없었지만. 그건 그거대로 남친이 늘 밥을 사줬고.
근데 저 선배는 한 번도 나에게 먼저 밥 먹었냐거나 밥 먹으러 갈래 같은 이야기를 한 번도, 단 한 번도 꺼내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저 선배에게 단 한 번도 어떤 부탁도 한 적이 없었다. 아무도 모르지만, 나는 저 선배가 껄끄러웠다.

하지만, D학점은 막아야 했다. 대학 들어오면서 나는 나의 모든 컴플렉스들을 하나하나 부수면서 악착같이 살아왔다.
안 긁은 복권이라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 - 그거 솔직히 듣는 사람은 절대 칭찬으로 안 들린다 - 악착같이 살을 빼고 당첨 복권이라는 걸 증명했고
사실은 학창시절 별로 친구도 없던 음침한 애라는 이야기 나오는게 싫어서 늘 활발하게 사람들도 많이 만나고, 애교도 부려 가면서 고백도 많이 받아보고
BL만화만 주구장창 보던 오타쿠라는 소리 듣기 싫어서 - 그래도 만화는 놓기 싫어서 - 만화동아리에 들어갔지만 만화 읽기보단 그리기에 관심 많은 척 하면서
집에서 미친듯이 선긋기 연습부터 파고 또 파서 늘 잘 그린다는 소리도 듣고...
평소에 공부 못 했는데 수능 한 번 대박 나서 운 좋게 들어왔다는 소리를 듣기 싫어서 악착같이 공부했던 나였다.
안 되, 어차피 두 번 빠진 걸로는 낮은 학점을 줄 수가 없어. 과제를 엄청 잘 내는 수 밖에 없다고!!


"저기 선배, 저... 이번에 XXXX의 이해 과제 좀 해 주실 수 있어요?"

"과제만 해 주면 되니?"

심드렁하게 되묻는 그 선배의 표정은 그닥 좋아 보이지 않았다.
아, 역시 이 인간은 날 별로 안 좋아하는 게 틀림없어, 그냥 과제만 해 달라고 하면 안 될 것 같아. 분명히 거지같이 대충 써서 줄지도 몰라. 부탁 안하느니만 못한...
생각이 나쁘게 뻗쳐나갈 때는 왜 이리 가속이 빠른 걸까. 이미 내 머리속에서 재구성 된 그 선배는 망할 교수와, 왜 거기 껴서 서 있는지도 모르는 전남친과 함께 셋이서 사악하게 낄낄대면서 나에게 "D제로!! D제로!! D쁠도 아닌 D제로!!" 라는, 뭔가 기괴한 리듬의 노래를 계속 외치고 있었다. 망할, 그런데 후크송도 아니고, 왜 이리 귀에 착착 감겨. 안되, 안되, 그건 절대 안되. 그래, 저 인간이 날 싫어해봤자 적극적으로 해코지는 안했잖아? 오히려 저 사람의 자존심을 건드려보자. 늘 어떤 부탁이든 다 들어 준다는데, 어디 한 번 보자!!



"ㅂ, 비 플러스!!!"

"...?"

아마 '이건 밑도끝도없이 뭔 개소리야' 라는 말을 설명하기에 가장 적합한 짤방을 만들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없이 그 때의 그의 얼굴 표정을 보여주면 될 거라고 생각한다.

"비 플러스 받을 정도로 써 주세요!! 두 번 무단 결석해서 A를 바라는 건 무리라는 걸 아니까, 만점을 받아야 되요! 부탁은 항상 들어 준다고 하셨죠?"

지금 다시 돌이켜 봐도 어처구니가 없다. 나한테 그렇게 말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아무튼 그 때 나는 헤어진지 얼마 안 되어서
좀 상태가 아니었다고 애써 변명을 해 본다.


"......"

아무 말 없이 느릿하게 일어나는 그 선배를 보며, 새삼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남자, 덩치가 크긴 크구나. 정말 곰 같네. 동아리방 밖으로 나가는 등판이 넓긴 넓구나... 아니 그게 아니잖아, 내 부탁은?!


"...있다가 학번이나 알려 줘."

한 5초 정도 이해를 못 하다가, 그 곰 같은 덩치로 동아리회관을 나가서 중앙도서관까지 가고 있는 그 느린 걸음걸이를 보고 그제서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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