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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7/11/18 06:18:51
Name   Erzenico
Subject   [번외] Chet Baker - Let's Get Lost
이번에는 역시 제 생각대로 쿨 재즈를 쓰고 나서 탄력을 받아 빠른 속도로 연재 글의 작성에 돌입할 수 있었습니다.
정신을 차리게 해준 쿨몽둥이에 다시 한 번 감사를...

이번 글과 다음 글에서는 웨스트 코스트 재즈 최고의 스타였던 - 물론 약간 제 주관도 작용했습니다만
[쳇 베이커 Chesney Henry "Chet" Baker Jr.][스탄 게츠 Stanley Gayetzky "Stan Getz"]의 삶을 간략하게 조명하고
그들의 음악을 들어보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연주자인 쳇의 이야기를 짧게 다루게 되어 다소 아쉽지만
사실 홍차넷 여러분들께 그리 자세히 알려드릴 만큼 뭔가 많이 아는 건 아니라서 어쩔 수 없어요.
(알면 책을 쓰거나 평전을 번역해서 수입을...)


말년의 쳇 베이커는 어떤 뛰어난 연주자도 쉽게 갖지 못하는 쓸쓸함이 묻어나는 음색을 갖고 있었습니다.
80년대에 유럽에서 활동하던 시절 만난 [엘비스 코스텔로 Elvis Costello]의 작품인 Almost Blue는 말년 대표곡이 되었습니다.

부모가 모두 음악을 그만둔 집안에서 태어난 쳇은 교회 합창단으로 처음 음악을 시작하였고,
이후 아버지가 처음엔 트롬본을 시켜보았으나 아이에게는 너무 크다는 이유로 트럼펫으로 곧 바뀌었습니다.
쳇은 어린 시절 라디오를 통해 몇몇 곡들을 듣고 익혔으며 자연스럽게 트럼페터로서 성장하였습니다.
중학교에서 다소간의 음악 교육을 받은 그는, 1946년 16세의 나이로 학교를 떠나 입대하게 됩니다.
베를린으로 파병을 간 쳇은 그곳에서 군악대에 들어갔으며 2년 뒤 제대하여 LA의 El Camino College에서 음악 교육을 받습니다.
그러나 학교가 잘 맞지 않았던 탓일까요, 2학년이 된 후 그는 학교를 떠나 재입대를 신청하고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부대에서 다시 군악대에 들어가 1년간 활동하였고, 이후 전업 연주자로서의 길을 걷고자 1951년 전역합니다.

데뷔까지의 과정에서 보셨듯 쳇 베이커는 지금까지 소개한 그 누구와도 달리 뉴욕의 재즈 씬을 거치지 않았고
그가 처음 두각을 드러냈던 [제리 멀리건 Gerald Joseph "Gerry" Mulligan]과의 피아노 없는 쿼텟도 LA를 중심으로 활동하였습니다.
이는 앞서 쿨 재즈에 대해 적은 글에서처럼, 이 '톤 다운된 비밥'은 느긋한 서부의 분위기에 더 잘 어울렸기 때문에
제리나 스탄 게츠가 이를 빠르게 읽고 LA로 넘어온 영향도 있겠지요.
그리고 왜인지 이 시류와 전혀 관계없는 길을 걸었던 쳇의 트럼펫이 쿨 재즈에 매우 잘 묻어나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고
제리의 바리톤 색소폰과 쳇의 트럼펫은 마치 버드와 디지의 그것과 같은 시너지를 내었습니다.


쳇 베이커의 시그니쳐와도 같은 곡이 된 스탠다드 넘버 [My Funny Valentine] 역시 이 시기에 처음 레코딩하였습니다.

제리 멀리건의 약물 혐의로 인한 구속이 반복되면서 이 쿼텟은 해체와 재결성을 반복하였고,
그 사이 쳇은 자신의 쿼텟을  만들어 활동하면서 다운비트나 메트로놈 같은 잡지의 독자투표 1위를 수상하는 등 인기를 이어갔습니다.
또한 1956년에는 [Chet Baker Sings]라는 음반을 발매하면서 흐느끼는 듯, 읊조리는 듯한 독특한 보컬을 선보였고
전통적인 재즈 비평가들에게는 소외되었으나 청중들은 이런 그의 보컬도 좋아하여 그의 커리어 내내 노래를 겸업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트럼펫 실력과 특유의 보컬이 좋은 조화를 이루는 레코딩 There Will Never Be Another You 입니다.

그렇게 승승장구하던 그에게도 - 이제 약간 예상을 하시겠지만 - 약물 문제가 찾아옵니다.
제리 멀리건과 함께 하던 시절부터 습관적으로 하던 헤로인이 문제가 되었고
1960년대에는 이탈리아와 서독, 영국 등지에서 활동하던 중 약물 사용이 적발되어 수감, 재판등을 겪게 됩니다.
(영화 [본 투 비 블루 Born To Be Blue (2015)]의 배경이 이 이탈리아에서의 수감 직후부터를 다루는 이야기입니다. 에단 호크 짱짱맨!)


영화 이야기를 한 김에 영화에서 나온 마지막 연주 장면을...한 번도 대역을 쓰지 않았다고 해 저를 놀라게 했습니다.

1966년, 캘리포니아 소살리토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연주를 마친 쳇은 마약 거래 중 시비가 붙어 구타를 당하고 앞니가 부러집니다.
트럼펫에서 앞니는 '앙부슈어'(관악기를 불기 위한 각각의 입모양을 의미)를 유지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부위이므로
이 사고로 인해 쳇은 몇 년뒤 틀니를 맞춰 넣을때까지 연주에 큰 어려움을 겪게 되고 이 기간을 거치면서 톤이 더 멜로우해집니다.


74년 '컴백 앨범'으로 봐도 좋을 [She Was Too Good To Me]에 실린 Tangerine. 살짝 바람이 새는 느낌은 들어도 힘찬 블로잉입니다.

70년대 접어들어 새로운 앙부슈어에 적응한 쳇은 뉴욕에 자리를 잡고 기타리스트 [짐 홀 Jim Hall]과 함께 활동하며
앨범 녹음도 남겼는데, 짐 홀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 'Concierto'에도 그의 녹슬지 않은 연주가  담겨 있습니다.



웨스트 코스트 재즈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던 50년대가 그의 인기의 정점이었다고 하면,
음악적인 완성도와 성숙함 면에서는 이 70년대가 그의 황금기였다고 생각하셔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그는 70년대 말 유럽으로 다시 떠나 자신의 정점에 오른 연주와 특유의 멜랑꼴리한 보컬을 선보이며 왕성한 활동을 하였고
이 때에는 레코딩도 꼬박꼬박하면서 괜찮은 앨범들을 많이 남겼습니다.
또한 80년대 초에는 스탄 게츠와도 함께 활동하며 라이브 투어를 하기도 하는 등 꽤 괜찮은 나날을 보냈습니다.


83년 스톡홀름 라이브에서의 'Just Friends', 이 곡 역시 그의 보컬로 불리면 더더욱 아련한 느낌을 줍니다.

그러나 이런 투어를 이어나가던 중 1988년 암스테르담의 호텔에서 그는 추락하여 사망한 채로 발견됩니다.
그의 방에서는 코카인과 헤로인이 발견되었고,
수사 결과는 뚜렷한 다른 이유 없이 약에 취한 상태로 난간에서 떨어진 것으로 추정하며 사건을 종결하였습니다.
그의 죽음 이후 마지막 공연 실황을 담은 앨범이 2장의 CD에 담겨 발매되어 그를 추모하는 재즈 팬들에게 마지막 선물로 남겨졌습니다.

70년대 커리어에 가장 뛰어난 연주를 펼치던 시기를 거치면서도 무엇이 그리 괴로웠는지...

그는 장기적인 약물 사용의 부작용으로 인해 연주를 하다가도 중간에 자꾸 멜로디를 잊어버리거나
레코딩 시간에 반복적으로 지각하는 등 전성기를 맞은 듯한 연주의 이면에는 여러 부정적인 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때 '재즈계의 제임스 딘'으로 불리던 과거의 인기와 영광을 잊고 연주에 집중하여
재즈를 향한 정열을 불태운 그의 열정은 언제나 저에게 큰 감동을 줍니다.


마지막 라이브 앨범에서의 'Look For The Silver Lining', 제가 앨범 내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곡입니다.
'Silver Lining'은 구름에서 햇빛이 비쳐 밝게 빛나는 가장자리를 의미하는데요, 가사를 살펴보더라도
구름으로 하늘이 덮여 어두워도 그 너머에는 항상 해가 빛나고 있다는 걸 잊지 말라는 희망적인 노래입니다.

그의 죽음이 그로부터 멀지 않았다는 걸 생각하면 아이러니하고 의미심장한 선곡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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