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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8/01/15 08:02:57 |
Name | epic |
File #1 | _180115_075823_580.png (297.0 KB), Download : 9 |
Subject | 올림픽의 몸값 (오쿠다 히데오, 2008) |
배경은 1964년, 전후 복구를 마치고 도쿄올림픽의 개최를 앞둔 일본입니다. 처참한 패배 후 20년 만에 다시 태어난 일본은 사회 곳곳에 활력이 넘칩니다. 경제 호황과 문화의 발전으로 전후 세대는 한창 자유로운 청춘을 누리고, 막노동꾼과 시정잡배부터 고위관료까지 온 국민이 다가올 올림픽을 기대하고 있죠. 뭐 딱히 개인에게 돌아오는 건 없지만, 어쨌든 기분은 좋고 아시아인의 저력을 보여주자는 자긍심도 부쩍 달아오릅니다. 심지어 대학의 과격한 운동권에서도 올림픽 기간 동안에는 알아서 활동을 자제하자고 할 정도로요. 특별히 교류하는 사람 없이 조용히 마르크스를 연구하는 도쿄대 대학원생 시마자키 구니오는 어느날 15살 위 씨다른 형의 갑작스런 부고를 받습니다. 수재인 구니오와 달리 형은 일찍부터 도시로 돈을 벌러 나가 고향의 가족에게 돈을 부치는 게 인생의 전부였고, 막노동판에서 돌연 죽음을 맞습니다. 구니오는 형의 장례를 치르고 시골의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60년대의 시골은 도쿄와는 아예 다른 나라라고 해도 될 정도입니다. 현대적인 문물은 거의 없으며, 남자는 돈 부치는 기계로 여자는 아이 낳고 농사짓는 가축으로, 그렇게 입에 풀칠이나 겨우 하는 주제에 대를 잇느니 하는 전근대적인 관습은 서로를 옥죄기만 할 뿐이죠.
완전히 현대에 녹아든 도시인이 될 수도 희망 없는 시골에 매몰될 수도 없는 구니오는 특이한 선택을 합니다. 형이 죽은 공사 현장에 들어가 막노동을 하고, 형이 맞았다던 필로폰도 똑같이 맞아보는 등 자신의 온실 같았던 삶에서 벗어나 세상을 겪어보기로요. 그와중에 형의 사인이 마약중독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회사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하청의 하청인 자신들이 피해를 받을까봐 숨겼던 거죠. 그렇게 밑바닥 생활을 하며 급격한 경제발전과 자본주의 문화 융성 아래에 은폐된 지방에 대한 도시의,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국가 차원의, 자본 권력의 착취를 글이 아닌 현실로 체감하게 된 구니오는 냉정하게 끓어오르는 분노를 도쿄올림픽에 돌립니다. 프롤레타리아트에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올림픽은 이 착취 시스템의 절정이고, 그 개최를 자신의 힘으로 막을 순 없어도 순순히 죽어주는 양이 되지는 않겠다고요. 구니오는 경찰에 ‘올림픽은 필요없다’는 메세지를 던지고, 사제폭탄 만드는 법을 익혀 테러리즘 활동에 나섭니다. 인명피해가 날 상황은 최대한 피해가면서요. 그러나 경찰은 구니오의 활동 목적을 외부에는 단순 화재 같은 것으로 알리는 등 극비에 부칩니다.
일본의 60~70년대는 전공투를 비롯해 유럽 못지 않은 좌익 학생운동이 있었지만 구니오의 동기는 그들과 다릅니다. 좌파들이 ‘체제 전복’을 꿈꾼다면 구니오는 ‘체제에 대한 저항’ 자체로 움직인다고나 할까요. 때문에 구니오는 잠시 운동권 아지트에 몸을 숨기지만 그들과 섞이지 못합니다. 애초에 사회의 많은 것을 목격한 구니오가 보기에 노동을 해 본 적도 없고 모든 걸 내던질 각오도 되어 있지 않은 그들은 부잣집 도련님이나 따님들이 반항심에 스릴 삼아 활동하는 것일 뿐이기도 하고요. 또 조직이란 것은 태생적으로 보수적이 될 수 밖에 없다고 봐 자기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깁니다. 경찰의 추적에 도주를 반복하며 이뤄지던 구니오의 테러행각은 개회식 날 성화대 앞에서 미수로 그치며 끝납니다. 오른쪽 가슴에 경찰이 쏜 권총을 맞고 앰뷸런스에 실려가는 게 마지막 모습이죠. 개회식은 아무 이상 없이 진행되고, 관객들과 TV를 시청하는 국민들은 테러시도가 있었다는 것도, 올림픽에, 체제에 저항하는 목소리가 있었다는 것도 알지 못한 채 올림픽의 개최를 기뻐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개최 전 경기장의 완공을 위해 많은 노동자들이 무리하게 굴려져 다치고 죽어갔다는 사실 (“도카이도 신칸센에서만 200명, 고속도로에서 50명, 지하철 공사로 10명, 모노레일로 5명, 빌딩과 그 밖의 건물까지 합치면 300명이 넘을 거예요." (2권 p.65)) 또한 역시 알지 못하죠. 구니오의 생사가 드러나지 않는 건 이것을 표현하려는 작가의 의도일 듯합니다.
구니오는 혁명가나 사회운동가라기보다는 그저 허무주의자에 가깝습니다. 비전이 있는 것도 아니고, 체계적인 계획이나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경찰 당국에 돈을 요구하지만 딱히 필요한 건 아니라 떠돌아다니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뿌려주겠다고 말합니다. 올림픽을 방해하겠다는 기개는 좋지만 학내 운동권을 비롯한 기성 좌파들의 입장에선 ‘그래서 뭐 어쩌려는 거지?’라는 질문이 나올만 합니다. 운동권 서클 리더가 ‘전략적으로 효과적이지 못하다’고 구니오를 비판한 것은 단순히 그들이 겁쟁이라서는 아닌 거죠. 그리고 구니오도 이걸 순순히 인정합니다. 하지만 이거 저거 그렇게 재다간 아무 것도 하지못하고 조직주의에, 보수주의에 녹아갈 수 밖에 없기에, 구니오는 당장에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그저 행합니다. 이 시마자키 구니오라는 인물에 매력을 느끼는 건 그 반정치적인 허무주의와 더불어 인간에 대한 연민이 깃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구니오는 계몽주의적인 의도로 막노동판에 뛰어들지 않았고, 덕분에 대체로 동료들에게 신의를 얻습니다. (왜 이런 대우를 받으면서도 분노하지 않는가? 하는 의문을 갖기도 하지만 마지막에 가선 ‘그들은 단지 싸울 방법을 모를 뿐이다’라는 결론을 내리죠) 심지어 구니오의 계획에 동참하는 건 처음에 형의 조의금을 훔치려고 했던 소매치기 아저씨입니다. 전혀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라며 궤변을 늘어놓는 아저씨에 마음이 휩쓸려 그냥 놓아줘 버리고 말지요. 자기의 재능에 뿌듯함과 우월감을 느끼는 보통의 청년들과 달리 시골 깡촌에서 홀로 남다른 대우를 받은 구니오는 그에 부채의식을 갖고 있는 거죠.
이론은 누구나 배울 수 있는 거지만, 선구자적 의식이 아니라 이런 연민을 가지 자기의 뿌리를 인지하는 이들이 오늘날 몇이나 될까요. 그렇게 생각하니 지금의 여러 사회 운동(가)들도 필히 회복해야 할 것이 바로 이런 애틋한 마음이 아닐까 싶네요. 그리고 운동과 관련 없는 우리 모든 사람들 또한 말이죠. 그렇다고 순정만 넘치는 감상주의자가 되자는 건 아니니 체게바라의 유명한 말을 조금 바꿔 되새김질 해봅니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렇지만 가슴 속엔 인간에 대한 애정을 놓지 말자,’ * 그러고보면 88올림픽의 숨겨진 역사도 알아보면 참 파란만장하죠. 평창은...패스 * 오쿠다 히데오 커리어 최고작이라고 생각하는데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 듯. 근작들은 완전 별로.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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