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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7/12/12 19:37:56 |
Name | 와인하우스 |
Subject | 히키코모리의 수기. |
1. 무의미한 하루가 또 시작됐다. 눈 뜨고 하는 활동이라곤 오직 식욕과 성욕의 해소뿐인, 그야말로 말초적인 동물의 삶이다. 아니, 적어도 짐승에겐 규칙적인 일과와 분명한 목표의식이 있다. 방구석 폐인. 볼 장 다 본 놈. 종말의 인간. 이게 내가 나를 부르는 별칭이자, 또 남이 나를 보며 하는 생각이겠지. 나의 하루는 누구보다 빠르게 지나간다. 지루함 자체가 일상이 된 나에겐 역설적으로 따분함을 느낄 겨를이 없다. 재미와 흥미가 어떤 건지, 언제 느꼈던 적이라도 있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니까. 나는 삶이 문득 권태로워졌다는 사람들이 무척 사치스럽다고 생각한다. 삶은 그 자체로 원래 권태와 동일한 것이 아니었던가. 얼마나 풍요를 누리고 있으면, 혹은 어떤 착각을 하고 있으면 불타오르는 열정과 꾸준한 노력 등을 지닐 수 있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 못하겠단 말이다. 다시 말해 나는 뿌리부터 뒤틀려있고 세상에 반기를 들고 있는 셈이다. 나처럼 반골적인 성향이 있는 사람들은 대개 비주류적인 분야ㅡ문화예술이나 사회운동 등ㅡ에서 나름의 재능을 발휘하는 것 같다. 한때는 나도 '모든 사람의 재능의 총량은 비슷하다. 단지 두각을 드러내는 분야가 다를 뿐이다' 같은 허황된 소리를 진심으로 믿고 나의 아직 드러나지 않은 재능을 사랑했던 적이 있었다. 심히 무미건조하지만 그게 나의 질풍노도의 시기였던 건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밑장까지 다 까발려진 지금은 모든 분야에서 F나 D 밖에 받을 수 없는 인간이 (당연하게도) 실재함을 알고 있다. 그게 바로 나라는 사실이 슬프지는 않다. 나는 망가진 게 아니라 태초부터 실패자가 될 운명이란 것을 깨닫게 되었으니까. 슬픔과 불행도 역시 행복을 아는 사람만이 절절히 느끼는 감정이다. 태생이 똥통인 놈은 똥냄새를 못 맡는다고 했다. 나를 위로해주는 것은 이 세계에선 없다. 그래, 여자. 여자는 잠깐이나마 삶을 잊게 해주는 것들이다. 현실 세계의 여자는 물론 아니다. 그건 내가 극도로 혐오하는 족속들이지. 그 더럽고 추악한 것들과 나의 성녀들이 같은 종류라는 것이 때로 믿기지 않는다. 절대 다수가 못난 외모에 성적인 심벌은 없다시피 한 주제에 괴상한 사고구조와 행동양태를 지닌 저 천한 종족을 보며 역겨움을 느끼다가 결코 굴욕감을 주지 않는, 병신 같은 심리싸움을 안 해도 되는, 미의 극치에 다다른 여신들을 마주하면 그럴 만도 한 것이다. 나는 요염함을 뽐내는 모니터 속의 야동 배우와 레이싱걸을 숭배한다. 어느 소설가는 남자의 인생을 여자의 두 다리 사이에 있는 그것에 도달하는 여정이라고 표현했다. 그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그로테스크한 현실의 그것에 도달해봤자 공허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시대와 자본이 만들어준 유토피아로 고통 없는 여행을 떠날 수 있다. 헤엄은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다. 2. 나는 비범하거나 특출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평범한 인간, 즉 거름 주제에 그걸 자부심으로 여기는 삶은 더욱 혐오한다. 다시 말해서 나는 재능도 없으면서 노력도 하고 싶지 않은 거다. 왜냐하면 내가 보기엔 이리 가나 저리 가나 주저앉으나 똑같은 지옥과 권태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인데, 그렇다면 힘을 빼는 것 말고 대체 무엇이 가능하단 말인가? 이것은 평생토록 해결되지 않을 의문이자, 내가 영원히 세상에 녹아들 수 없는 이유일 것이다. 어렸을 적부터 늘 그랬다. 나는 하고 싶은 건 도무지 없으면서 하기 싫은 건 잔뜩 있는 골치 아픈 아이였다. 부모님은 이런 나를 이해하지 못했고, 나 역시 '나를 뭔가 하고 싶게 만들려는' 주변의 여러 시도를 감당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내가 부모님, 선생님, 친구들이라는 외부 세계에 맞서 선택한 방책은 바로 익살이었다. 머리가 크고 <인간 실격>을 읽으며 나는 나와 요조가 평범하게 살지 못하도록 태어난 인간이자 익살이라는 수단을 똑같이 선택했다는 점에 깊은 동질감을 느꼈다, 나는 요조의 미래가 나의 미래라는 생각에 완전히 사로잡혔다. 나는 마흔이 되기 전에 죽을 것이고 서른 즈음엔 구제불능의 폐인이 될 것이다. 그만큼 절망은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었다. 신이 있다면 묻고 싶다. 무능력은 죄입니까? 아니, 무의욕은 죄입니까? 유아기에서 청소년기를 거치면서 자연스레 세워진다는 자아실현의 의지와 구체적인 꿈 혹은 목표라는 것을, 나는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었다. 물론 꿈이 없는 청소년은 흔하디흔하다. 하지만 성공, 부, 노력, 연애 등의 초자아 자체를 납득하지 못하는, 그리고 그것이 청소년기의 일탈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그렇게 구성되어 있는 인간은 아직까지 나 이외에는 본 적이 없다. 오직 몇몇 문학 작품만이 내가 미쳐있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해줄 뿐이다. 그래서 나는 외롭다. 사람들 사이에선 그 외로움을 견딜 공간이 너무나도 비좁았기에, 나는 숨통을 트기 위해서 보다 넓은 나만의 방으로 도망쳐왔다. 하지만 역시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었다. 한심하다 여기지 마라.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거기에 남았다간 더 일찍, 더 광적으로 미쳐버렸을 게 분명하니까. 3. 나는 늘 관계의 공포 속에서 살았다. 나는 늘 잡아먹히는 것이 두려웠다. 나는 날 때부터 약자의 낙인을 지고 태어났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약자가 생존하는 법은 권력 구도에서 철저하게 멀어지거나, 배를 내보이며 굴종의 자세를 취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택한 익살의 방식은 명백하게 후자였다. 권력을 가진 강자들은 내게 호의와 떡고물을 던져주며 이너 서클의 말석에 끼워주었고, 나는 그렇게 생존 방식을 찾아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학교와 부모님의 품이라는 온실을 벗어나자 그것은 더 이상 효과를 발휘할 수 없는 방식이었고, 견딜 수 없는 모멸감, 특히 여자들로부터 받는 경멸적인 시선이 어린 정신을 가득 메웠다. 내 본연의 모습이 드러나기까지 나를 그나마 움직였던 건 오직 인정욕구였다. 이미 서로를 지배하는 초자아가 다르다는 것을 어렴풋이 인식한 상태에서, 나를 타인과 엮어주던 유일한 조건이 사라지자 급격한 소진 증상이 발생했던 것이다. 나는 살아야 했고, 살고 싶어서 도망쳐 나왔다. 누군가는 너에겐 아직 돌아갈 길이 있다고 눈치 없이 말한다. 그러나 그건 이미 끊긴 길이다. 어디 한 번 네가 걸어가 보란 말야 씨발아. 강자들은 약자의 정신이 어떤 것인지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약자는 비열함과 추악함을 약함 속에 감추고 있다. 착한 왕따란 없다. 왕따들이 머릿속에서 만큼은 일진들을 어떻게 찢어발기고 굴복시키고 고통에 차게 만들고 있는지, 그 심연을 들여다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나 역시 복수심으로 처음 몇 년을 버텼다. 아, 시도하지도 못할 복수의 계획을 짜는 것은 얼마나 아드레날린을 돋웠는지. 똥물에 빠트리는 상상, 사제폭탄을 터뜨리는 상상, 으슥한 골목에서 패버리고 강간하고 눈물범벅이 된 채 잘못을 싹싹 빌게 만드는 상상. 가끔 그런 것을 실제로 시도하는 멍청이들이 있다. 최소한의 인과율도 따지지 못하는 멍청이들이지만, 짧은 승리의 순간에 그들이 느꼈을 쾌감이 어떠할 지 궁금하기는 하다. 어쩌면 그 멍청이들이야말로 본질에 조금이나마 다가선 녀석들일지도 모른다. 사회, 관계, 애정. 내가 닿고자 했지만 결코 도달할 수 없었던 것. 그 안에서도 고통의 목소리는 메아리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의 아픔을 나누고 있다. 적어도 같이 아파하는 이들이 존재함을 안다. 나로선ㅡ앞서 말한 복수심 역시도 지루하게 사그라진 지금ㅡ연민과 격려, 위로를 나누는 저들에게 질투심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내겐 그 모든 것들이 가당찮은 소리로 들린다. 너희들과 달리 나는, 나는 단 한 번도 이해받아본 적이 없단 말이야. 아니, 나같이 모든 것에서 완전히 분리된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너희들은 알기나 할까? 배불러 빠진 것들. 네깟것들이 뭘 안다고. 참회의 여지조차 없는 인면수심. 그런 분개의 목소리와 함께. 닿고 싶어. 사랑해줘. 조금이라도 좋으니까 제발. 게워낼 수 없는 노예의 의식. 이렇게 나는 영원히 이 혼돈에서 헤어날 수 없는 형벌에 처한 것이다. 4. 거의 모든 사회적 관계가 단절된 나에게도 가끔씩 예전에 알았던 누군가(대개는 학창시절 친구들)의 소식이 찾아올 때가 있다. 직장을 얻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또는 어떤 성취를 이뤘다는 당연한 흐름이. 이제 나와는 아무 관련이 없지만 그럼에도 아직까지 그런 이야기들이 폐부를 찌른다. 학교를 다닐 시절 우리는 근본적으로 동등했다. 강자건 약자건, 부자건 빈자건, 공부를 잘하건 못하건 간에 그 모든 것은 온실 안에서의 서열이었고, 가장 높이 있는 아이도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아이를 일단은 ‘친구’라고 호칭했다. 그러나 바깥세상은 그런 어린애 장난이 아니다. 세상은 승패를 가르는 곳이고, 패배의 기록은 영원히 낙인찍힌다. 그러므로 전장에 나서기도 전에 패배해 버린 나야말로 진정 최하의 인간인 것이다. 물론 패배를 겪지 않는 인간은 없다. 그러나 보통 사람이 패배 속에서 크고 작은 희망을 찾아 양분으로 삼고 그걸 토대로 자기의 영역을 꾸리는 반면, 나의 패배는 그럴 여지마저도 없는 너무 치명적이고 근원적인 곳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또한 나는 이 패배를 일으킨 주체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나는 사회에게 진 것인가? 인간에게 진 것인가? 아니면 나 스스로 고꾸라진 것인가? 어떻게도 확답을 내릴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적이 분명하고 또렷하던 옛 시대를, 살아보지 않았음에도 마치 노인처럼 너무나 그리워한다. 누구도, 부모님조차도 내게 손을 내밀어 주지 않았다. 그들은 아들의 절망을 들여다보긴 커녕 왜 빨리 회복되지 않느냐고 재촉하는 눈빛을 보내기 일쑤였다. 그로 인해 나의 죄의식이 더욱 증폭되었다는 것을 그들은 과연 알까? <상실의 시대>를 보면 여자 등장인물이 이렇게 절규하는 장면이 있다. '이미 늦었어요. 돌이키기엔 너무 늦어버렸다구요.' 내가 앓고 있는 병은 정신적인 루게릭병이다. 이대로 나는 퇴화할 것이다. 사멸할 것이다. 단숨에 최후를 맞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 천천히 존재가 투명해지리라. 유령처럼,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이었던 것처럼. 그렇게 모든 부끄러움을 꼭꼭 눌러 담은 채. 딱 하나 소망이 있다. 곧 다가올 나의 종말 이후 5년이든, 10년이든, 언제라도, 단 한 명이라도, 내가 그렇게 나쁜 아이는 아니었다고, 조금만 더 신경을 써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런 악어의 눈물이라도 좋으니, 가끔씩이라도 추억해줬으면. 내게 있는 수많은 두려움 중 버려지는 것, 나쁜 소리를 듣는 것만큼 거대한 것은 없었으니까. 모든 것이 지친다. 이젠 악몽조차도 꿀 기력이 없다. 나는 그저 마지막 잎새가 떨어질 그 날을 기다릴 뿐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그러면 처음부터 뒤틀려 있던 무언가를 다시 끼워 맞출 수 있을까. 진짜에는 영원히 닿을 수 없는 거라면, 적어도 이런 식의 외로운 고통만큼은 더 이상 겪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내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눈을 뜨면 다른 세계로 떠나 있으면 좋겠다는 비참한 기대를 품으며, 나는 매일같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일과를 그렇게 마친다. * 지구-2의 각색임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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