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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8/01/02 03:42:35
Name   epic
Subject   밑줄치며 책 읽기 (1) <하류지향> (우치다 타츠루, 2013)


0. 들어가며, 서문

10여년 전 인터넷을 강타한 밈이 있었습니다. 그 이름하야 [일하면 지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분(니트족, 2004년 당시 24세)이 뒤에 덧붙인 말은 더 걸작입니다. [지금의 저는 승리자라고 생각해요.] 우와, 서태웅 뺨치는 저 자신감을 보세요.
사람들은 저걸 보고 미친거 아니냐며 비웃었지만, 사실 저분은 정말 진지하게 대답한 거예요. 심지어 저게 바로 '니트 정신'의 정수라고 할 수 있지요.
이들은 도스토예프스키식 지하생활자나 가난한 언더그라운드 예술인과는 다른 부류입니다. 현재의 삶을 만족스러워하고 딱히 고뇌도, 열등감도 없는 편안한 삶을 즐기고 있으니까요. 오히려 어떻게보면 이들은 인생을 아주 '효율적'으로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본서는 기존의 '열심히 공부하고 일해서 인정받아 먹고 산다'는 도식을 나몰라라 하고 제멋대로, 말초적인 현재만을 좇는, 심지어 어쨌든 막 사는 건 나쁘다는 인식은 있던 기존의 양아치들과 달리 도덕적, 경제적으로 우월감까지 느끼는 이들 집단이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또 그것이 단순한 별종이어서가 아니라 현대 일본 주류 사회에 어떻게 녹아들어 있는지 탐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익 상반이 가장 첨예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영역이 바로 교육입니다. 학교는 애당초 국민국가의 내부장치입니다. 학교의 설립 목적은 ‘차세대 국가를 책임질 수 있는 성숙한 시민의 육성’입니다. 제대로 된 어른을 계속해서 길러내지 않으면 사회는 유지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른을 키운다’는 것은 100년의 안목으로 볼 때는 아주 합리적인 행동이 됩니다.
하지만 글로벌 자본주의는 그런 것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일단 다음 4분기의 수익을 올리는데 필요한 인재 육성입니다. 능력 있고, 임금이 낮고, 체력이 있고, 권리의식이 희박하고 비판정신이 결여되어 상사의 밑에 순종하고, 어떠한 공동체에도 귀속되지 않고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아 회사의 전근 명령 하나로 곧바로 해외 지점이나 공장에 부임할 수 있는(이를 일본의 교육계는 글로벌 인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 청년을 대량으로 공급해줄 것을 학교에 요구합니다. (...)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학교교육을 글로벌기업을 위한 체제로 변화시킴으로써 국민국가가 장기적으로 입게 될 피해’를 신경 쓴다는 것은 ‘앞으로 10억 년 후에 태양이 소멸할 때 지구가 받을 피해에 대해 끙끙거리며 걱정하는 것과 본질적으로는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p.16-17)

저자의 주장이 서문에서 바로 드러납니다. 최소 한 세대(30년)에서 일생(80년)을 바라봐야하는 국민국가의 교육체계가 단기적(10년 이하)이고 가시적인 성과를 내기 급급한 자본주의 정신에 완전히 놀아나고 있다는 것이죠. 때문에 자라나는 젊은이들도 지극히 단기적인, 효율을 따지는 사고방식에 익숙해져있다는 것입니다.


1. 공부로부터 도피하기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누구나 처음엔 글자와 수를 배운다. 1학년 교실에서 글자를 막 가르치려는데 누군가 손을 번쩍 든다.
‘‘선생님, 이걸 배우면 뭐가 좋아요?" 나이가 좀 든 사람들 중에는 어릴 적 초등학교 1학년 교실에서, 말 그대로 태어나 처음으로 학교라는 곳에서 수업을 듣는데, ‘‘이건 어디에 필요한 거예요?" 같은 매우 급진적인 질문을 한 사람은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이런 질문이 있다는 것조차 몰랐을 것이다. (...)
이러한 질문에 교사들은 선뜻 대답하지 못한다. 대답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 질문이 아이들한테서 나올 수 없다는 것이 교육 제도의 전제이기 때문이다. ‘의무교육이라는 말을 지금 아이들은 ‘교육을 받을 의무가 있다’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물론 이 말은 틀렸다. 아이들에게 ‘교육받을 의무’ 같은 것은 없다. 아이들에게는 ‘교육을 받을 권리만 있을 뿐이다. ‘보호하고 있는 자녀에게 보통교육을 받게 할 의무를 지는 사람은 부모다. 아이들에게 교육을 받을 권리는, 자신의 삶의 가능성을 넓혀가기 위한 가장 중요한 권리다. 이 권리 당사자인 아이들 쪽에서 ‘‘어째서 이 권리를 행사하지 않으면 안 되나요?"라는 질문이 나올 줄은 헌법을 기초했던 사람들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설명을 제대로 잘 해주면 권리를 행사하겠지만, 설명이 납득되지 않으면 교육받을 권리 따위는 필요 없다“고 아이들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
아이들은 일찍부터 사사건건 “이게 어디에 쓸모가 있나요? 이것을 하면 나한데 어떻게 좋아요?"라고 묻는다. 당신의 대답이 마음에 들면 ‘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안한다'. 이러한 판단 기준을 인생을 막 시작한 즈음부터 몸에 새기게 된다. 이렇게 '등가교환하는 아이들'이 탄생한다. (p.44-48)

그게 효율성을 따지는 것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학창시절을 돌아보면 분명히 저희 때도 그랬습니다. 교육은 강제였고 아무도 이걸 왜 배워야 하는지 가르쳐주지 않았고 교육받지 못하는 아프리카의 아이들을 생각해보라는 말은 프로파간다로 들렸었죠. 저는 억지로 수업을 방해하는 것까진 아니었고 그냥 관심없는 수업엔 (지금 생각해보면 좀 의도적으로) 퍼질러 자는 게 다였지만 온몸으로 지랄염병을 하는 양아치들도 분명 있었죠. 저자는 그게 (수업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모종의 이유로 생기는) 집중력 부족때문이 아니라, [수업을 듣지 않으려는 노력]을 하는 거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불쾌함을 화폐 삼아 수업시간의 가치를 깎는 활동을 하고 있다는 거죠. 아하, 그러니까 재미없는 (그리고 만만한) 선생님 시간에 일부러 더 소란을 피웠던 건 단순히 치기때문만이 아니었던 겁니다. 인터레스팅.


배움이란 자기가 무엇을 배우고 있는지 모르고, 그것이 어떤 가치와 의미와 유용성을 갖는지도 말할 수 없는 지점에서부터 시작된다. 오히려 자기가 무엇을 배우는지 몰라서, 그 가치와 의미와 유용성을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배움이 일어나는 동기가 된다. (...)
배움의 과정에 던져진 아이들은 ‘이미’ 배우기 시작했다. 이미 배움의 한가운데에 들어가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다시 말해 아이들은 학습에서 주권을 가진 자유로운 주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p.71-72)

저자의 교육관은 어떻게 보면 꽤 보수적이지만, 분명 일리가 있습니다. 배움은 취사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다 보면 배워져 있는 거라, 제가 어렸을 때 몰랐고 지금도 외면하고 있는 진리네요.


"나는 정말 어떤 인간인가?" "나는 정말 무엇을 하고 싶은가?'
조금 미안한 말이지만, 이런 질문이 사람을 성장시키지는 못한다. (...)
내가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려면 “나는 누가 뭐라해도 하나밖에 없는 존재야”라고 선언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당신의 역할은 누구도 대체할 수 없습니다" 하고 다른 사람들이 인정해주었을 때 비로소 확실해진다. 그러므로 진정 ‘자기 찾기’를 하고자 한다면 타인과 무관한 존재로서의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게 아니라, ‘나자신을 포함한 이 네트워크는 어떤 구조이고, 이 속에서 나는 어떤 존재인가'를 묻는 방식을 선택해야 한다. (...)
문제는 ‘자기 바깥에 있는 목표를 향해 행동하기보다도 개인의 홍미와 관심에 따른 행위를 더 바람직하게 여긴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사회적으로 널리 유용하다고 인지된 가치일지라도 내 입장에서 봐서’ 유용성이 확증되지 않으면 미련 없이 버린다. 이렇게 자기중심적으로 가치를 매기는 일이 모든 상황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것이 교육붕괴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p.78-81)

아, 동의할 수 없는 지점 등장. 방금 전 부분까지는 좋았는데, 저자는 여기서 공동체와 커뮤니케이션을 가르치지 않고 개성과 자발성만을 중요시하는 교육과 세태를 비판하는 것으로 나아가네요. 일단 한국 교육은 개성과 자발성과는 안드로메다 은하만큼 떨어져 있고, 그렇다고 일본이 막나갈 정도의 히피적인 교육을 하지는 않을 거 같은데 만일 그렇대도 벤치마킹해야겠다는 생각만 드네요. 그리고 '자기를 찾고 싶으면 주변 사람들한테 물어봐서 찾아야지 왜 혼자 끙끙대거나 이상한 나라 가서 묻고 있냐'고 비꼬고 있는데, 그것이 (이를테면 한비야뽕 맞은 식의) 허세일지는 몰라도 적어도 아까까지 줄곧 비판했던 '효율성'을 따지는 것과는 매우 먼 행동인데요? '내 인생이 그렇게 흘러가는 건 불합리하다'는 정서를 공유한다고 해서 그것을 '효율성=소비주체적 사고'로 뭉뚱그리는 건 올바르지 않습니다. 왜냐면 무모한 도전에 나서는 이들 중 다수가 자기가 분명히 '손해보는 일' 또는 '바보같은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니까요. 물론 나에 대해 묻는 행위가 그 자체로 칭송 받아야 할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공동체에 녹아드는 건 역시 정답이 못되죠. 그러한 자기 성립은 될놈만 되는 거니까요. 다시말해 소양을 갖추는 게 우선이지 방식의 문제가 아니란 말씀. 파편화되어 망가지는 개인이 걱정이라면 조직 아래 짓눌리는(것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구성원들은 왜 걱정하지 않나요.


2. 리스크 사회의 약자들


일반적으로 부유층 가정의 아이들이 빈곤층 가정의 아이들보다 학력이 높게 나온다. 그 이유에 대해 보통 부유한 가정이 자녀교육에 더 많은 투자를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지만 그보다 더 내밀한 이유가 있다. 바로 부유층 자녀들은 높은 학력을 딸 경우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더 많은 이익을 회수할 수 있다고 믿을 수 있지만, 빈곤층 자녀들은 학력의 효용을 더 이상 믿을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학력의 차이'가 아니라 '학력에 대한 신뢰의 차이'가 있다. ‘노력의 차이가 아니라 ‘노력에 대한 동기부여의 차이’이다. (...)
앞서 리스크 사회에서는 노력과 성과 간의 상관관계가 붕괴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실제로 이 상관관계는 전 사회적으로 균일하게 붕괴되는 것이 아니라, 일부 계층에서는 아직도 원활하게 기능하는 반면 어느 한 계층에서는 집중적으로 붕괴되고 있다. 즉, 리스크 사회에서 리스크는 모든 사회구성원들에게 공평하게 분배되는 것이 아니라 계층별로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회가 노력과 성과가 비례하지 않는 리스크 사회이기 때문에 '노력해봤자 소용없다'는 결론을 내는 사람들이 가장 많은 리스크를 떠안는 계층이다. (p.89-92)

노력하도록 동기부여를 하는 데 계층의 차이가 있다고 한다면, 경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일부 사람들은 유리한 위치를 선점한 셈이 된다. 그렇다면 이것은 공정한 경쟁이 아니라 이미 이기고 있는 사람이 계속해서 이기는 것을 정당화하는 시스템이 되어버린다. (p.94-95)

어 이것도 완전 제 얘기. 제가 (그나마) 공부에 능력이 있는데도 흥미가 없는 이유(=핑계)가 이걸지도 몰라요. 친족 중에 학벌이 높은 사람도, 딱히 공부로 잘 나가는 사람도 없거든요. 가계 상황도 아주 좋거나 아주 나쁘거나 하지 않아 상승 욕구를 자극하지 못함. 어쨌든 사회 전반적으로 보았을 때 학벌 및 부가 계승되는 이유가 투자 자체 때문이 아니라 문화자본 때문이라는 진리를 다시 한 번 캐치.


리스크 헤지(※위험 제거 전략)는 ‘살아남기’를 목표로 집단이 합의한 계획에 따라서 행동하는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혜택이다. 그러므로 개인이 리스크 헤지를 하고, 발생한 리스크에 개인이 대처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말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 개인이 리스크 헤지를 한다는 것은 원리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리스크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이들은 ‘살아남는 것을 집단의 목표로 내걸고 상부상조하는 집단에 속한 사람들’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리스크 사회를 살아간다’는 의미는 항간에서 이야기하듯 ‘자기가 결정하고 그 결과도 혼자서 책임진다’는 원리로 사는 게 결코 아니다. 자기가 결정하고 결과도 자신이 책임지라는 말은 리스크 사회가 약자에게 강요하는 삶의 방식 (또는 죽음의 방식)이다. (p.108)

자기결정 ·자기책임이라는 삶의 방식을 관철할 수 있는 사람은 강자밖에 없다. 하지만 리스크 사회에서 강자들을 살펴보면 다들 상부상조 · 상호지원 네트워크에 속해 있으며, 그 덕분에 리스크 헤지가 가능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논리적으로 말하면, 리스크 사회에서 자기결정·자기책임을 관철할 수 있는 강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p.113)

그래서 저자가 제시하는 전략은 공동체와 상부상조 원리에의 회귀입니다. 아니 사실 회귀라기엔 원래 부유층/강자들은 원래 자기들만의 네트워크에 의해 돌아가고 있었고, '내 인생은 내 거' '모든 건 내가 책임짐'이라며 연대와 간섭을 꺼리는 약자들의 삶은 극도로 파편화되고 있다는 거죠. 상부상조가 그래 하자 해서 될 수 있는 것인지와는 별개로 현상의 분석은 아하!하고 무릎을 치게 되는.


1979년에는 “자기 능력이 높다고 생각하는 학생일수록 통계적으로(5 퍼센트 수준) 학교 외의 장소에서도 공부하는 시간이 길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라고 보고한다. 자신감이 있는 학생일수록 공부를 더 했다. 또는 공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자신감을 보강하는 구조였다. 그런데 이것이 1997년부터는 달라진다. 자기 능력에 관한 자신감과 학습시간의 관련성이 사라진 것이다. 자신감이 있다는 것과 공부 시간 간의 관계가 사라진 것은 다시 말해 공부를 전혀 하지 않아도 자신만만하다는, 지금까지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유형의 학생들이 출현했다는 말이다. (...) 
‘자기존중은 교육에서 다루기 어려운 개념이다. 자신에 대해 좋은 감정 갖기는 미국에서 오랫동안 주창해온 교육 이념의 하나다. 아이들의 자신감을 높이는 일은 교육상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게 있다. 아이들이 자신감을 갖는 경우는 그들이 속하는 사회집단에서 지배적인 가치관에 동조될 때다. (...)
그가 속한 사회집단의 가치관과 행동준칙에 맞추지 못하면 자신감을 갖기 어렵다. 그리고 미국처럼 소수민족 그룹이나 사회 계층에 따라 집단별로 가치관과 행동 준칙에 확연한 차이가 있는 사회에서 자신감을 갖고 싶어 하는 아이들은 자기가 속한 집단의 이데올로기에 지나치게 순응할 가능성이 높다. (p.116-118)

거칠게 말해 [애들 사이에서 반항하고 공부 안하고도 좋은 성적 받고 그런게 쿨한 거라는 생각이 퍼지니까 개나소나 휩쓸리는 거 아냐]라는 얘기네요. 뭐 그럴지도 모릅니다. 저도 공부 하는 놈 놀리는 게 재밌었으니까요. 근데 거기다 이데올로기의 순응이라는 거창한 말을 붙이는 건 역시 와닿지 않습니다. 저 말고는 저런 인간을 한 명도 보지 못했거든요. 물론 일본이 한국보다 자유도가 높아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죠. 근데 그래봐야 동아시아 국가 아닌가. 가장 거대한 이데올로기는 바깥에 있는데 왜 이상한 데서 문제를 찾는지 모르겠습니다. 저자는 일관적으로 '어줍잖은 자유론의 만연이 별볼일 없는 사회 구성원들을 더욱 파편화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정신이 이 시대에서 유독 돋보이게 된 원인은 말하지 않고 있네요.


3. 노동으로부터 도피하기


임금이 낮다는 말은 곧 일이 적절하게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일본의 평가 시스템을 바라보는 상사와 부하의 시각 차이도 관련이 있다. 일본의 인사고과 시스템은 유능하다고 평가받은 부하에게 그 즉시 임금을 올려주는 형태가 아니라 더 어려운 일, 더 중요한 알을 맡기는 식으로 우회해서 평가해왔다. 그러나 지금의 젊은이들은 동료보다 더 어려운 일을 맡으면 자신의 능력에 대한 평가 과정이 아니라 부당한 처사로 받아들인다. 같은 임금이면서 더 많은 일을 시킨다고 싫어한다. 업무에 대한 평가가 서로 엇갈리는 것이다. 이처럼 엇갈리는 이유 중 하나는 젊은 직장인들이 ‘신속하면서 적절한 평가’를 바라는데 반해 평가의 반응 속도는 늦다는 데 있다. 평가에 대한 조급증은 이직을 반복하는 사람들에게서 자주 발견된다. (p.138)
소비 행동은 본질적으로 무시간적인 행위이다. 우리는 대가의 제시와 상품 교부 사이에 시간자가 있는 것을 잘 참지 못한다. 돈을 지불했는데 상품을 받지 못하면 매우 불안해한다. (p.140)

예를 들어 요즘 대학에는 실러버스 syllabus라는 게 있다. 예전의 수업개요나 학습요강 같은 것으로, 이를 더 구체화한 것이다. 이 과목의 목적은 무엇이고 교육방법은 어떠하며, 몇 월 며칠에는 어떤 주제로 어떤 학술 정보를 제공한다고 적혀 있다. 어째서 이런 게 필요한 것일까? 실러버스는 말하자면 직무기술서이다. 이것은 대학이 학생과 맺은 계약 내용을 담고 있다. 몇 월 며칠 이런저런 것을 강의하겠다고 실러버스에 나와 있고, 만약 교수가 그대로 가르치지 않을 경우 학생들은 계약위반으로 대학에 클레임을 걸 수 있다. 
나는 이것이 고등교육 자살의 한 징후라고 생각한다. 학생이 앞으로 무엇을 배울 것인가에 대해 미리 알고 있을 것을 전제로 해서는 배움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댜 배움이란 자기가 배운 것의 의미와 가치를 이해할 수 있는 주체를 구축해가는 과정이다. 공부를 끝낼 시점이 되어야 비로소 무엇을 배웠는지를 이해하는 수준에 도달한다. (p.152)

...? 이건 '아니~~ 좀 참다보면 당연히 알아줄 것인데~~ 고새를 못참고~~ 요오즘 것들이란~~ ㅉㅉ' 하는 꼰대논리잖아요? 완전히 바보취급 당한 느낌이 드네요. 물론 터무니 없는 생각은 아닙니다. 지금의 젊은이들은 즉각적으로 대가와 평가를 받아내는 데 익숙하며 모든 문제를 이해타산적으로 사고한다는 주장은 생각해볼만 하죠. 그런데 이 모든 문제들의 원인을 '저런 애들이 나타나게 한 우리가 교육을 잘못해서 그래'라고 퉁치기엔 부족해도 한없이 부족합니다. 사회변화란 것이 고작 그런 식의 원인으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었던가요? 저자는 원인이라 생각한 것도 사실 결과일 수 있음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밑의 대학교육 단락도 그렇습니다. 교수가 강의 정보를 필요 이상으로 노출하고 마치 합리적인 소비자에게 판매하듯이 홍보하고 전시하는 것이 '올바르지 않은 모습이다'라고는 말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것이 고등교육 자살의 '원인'일까요? 제 생각엔 이것도 결과 같은 데 말이죠. 왜 학생들이 교수를, 사원이 기업을 믿지 못할까요. 그만큼 사회의 신뢰 프로세스가 무너졌고, 순순히 착취당하지 않을 만큼 경험이 여러 경로를 거쳐 전수되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문제라고 제시한 것 이전에 더 큰 구조가 있는 것은 보지 못하고, 그에 대한 대안이 '믿으라 그러면 복이 오나니' 같은 시대착오적인 말인 것은 실망을 금치 못하는 부분이었습니다.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은 노동을 포장하기 위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노동의 본질이다. 오늘날의 니트 문제에 대해 정부와 미디어가 유포하는 말에 내가 설득당하지 못하는 까닭은 니트의 발생이 노동의 본질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 누구도 지적하지 않기 때문이다. 니트 문제에 대해 전문가들은 여러 가지 대응책을 정책으로 제언하고 있다. 이를테면 '역연금' 제도를 도입해 젊은 니트들에게 연금을 주어 생활을 지원하자든가, 직업훈련의 기회를 제공하자든가, 맞춤 상담과 적성검사를 하자든가 하는 매우 다채로운 대안들이 나오고 있으나 애석하게도 나는 그 어떤 정책도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본다. 니트족은 '노동하는 것' 그 자체에 불합리함을 느껴 노동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므로, 왜 그들이 불합리함을 느끼는지 근본 문제를 간과하는 한 어떤 정책도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오히려 악화를 불러올 수 밖에 없다. (...)
니트 문제의 최대 난관은, 니트족이 어렸을 때부터 쭉 경제적 합리성을 가지고 가치판단을 해왔고 그 결과 스스로 무직자의 길을 선택했다는 그들 나름의 수미일관성을 경제적 합리성이라는 논거로 깨뜨릴 수 없다는 데 있다. (p.146-147)

어쨌든 저자는 이로써 앞서 계속 얘기했던 '효율성'의 원리가 니트를 탄생시킨 본질이라는 통찰에 다다릅니다. 그들은 돌연변이나 정신이상자가 아니라 현대 정신을 아주 독창적으로, 또 극단적으로 재해석한 인물들인 거죠. 니트는 인간이라기보다는 어쩌면 컴퓨터의 알고리즘에 가까운 존재일지 모릅니다. 인풋과 아웃풋이 분명해야만 움직인다는 점에서요. 또한 그들은 내적인 완결성에 다다랐습니다. 자기 안에서 모든 결론은 이미 내려졌고, 아웅다웅하고 사는 바보들을 보며 쾌감까지 느낍니다. 이제 저 위의 니트 청년의 표정이 이해되는군요. 네, [니트는 무적입니다. 니트는 승리했습니다.] 그들은 배움의 기쁨도, 노동의 기쁨도, 커뮤니케이션의 기쁨도 모르고, 그 완성된 정신에는 더이상 변화와 발전의 여지가 없지만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그들을 혼내거나 얼러대며 사회에 복귀시키려는 모든 시도는 다 헛짓거리입니다. 오래 살지 못하고 비참하게 죽고 싶냐는 협박은 '먼 훗날에 태양이 팽창하면 지구가 삼켜진대' 쯤으로 들리고, 세상에 나오면 좋은 게 많다는 유혹도 이미 '좋은 것'을 찾아낸 니트들에겐 효과적인 유인이 못되는 것입니다.
저자에게 니트는 도덕적으로 비난해야될 대상이 아닌 효율성에 병든 현대 사회가 낳은 당연한 산물입니다. 본질을 망각한 채 그저 무의미하고 얄팍한 질문만이 부유하는 사회, 배움이 당연한 것이란 관념이 소멸되어 '왜 배워야 하나요?' 같은 질문이 난무하고, 아무도 명쾌한 대답 따위는 줄 수 없으니 교육의 가치도 당연히 수치적인 것으로 전락해버리는데, 그렇다고 수치 이외의 모든 것이 정말로 사라진 것은 아니라 문화자본이 튼튼한 강자들에 의해 사회적 계층화가 심화되는 사회. 이것이 본서에서 진단하는 21세기의 일본 사회입니다.

교육의 '입구'에서도 '출구'에서도 시장원리가 깊숙이 파고들고 있다. 그 때문에 아이들도, 졸업생을 맞이하는 사회도 배움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있다. (p.161)


4. 이들을 어떻게 도울까


예전에는 선생님은 훌륭한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말은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옛날의 선생님이 지금 초등학교에 오면 지도력 부족으로 아마도 그 반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선생이 이상적인 교사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그런 사제관계의 역학이 1920넌대까지는 제대로 기능을 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개인의 역량문제가 아니라 제도로서 기능했다는 말입니다. (...)
그렇다면 요즘엔 무엇이 변한 것일까요? 교사의 기량을 계량 가능한 능력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교과 내용에 통달하고 교육 기술이 탁월하면 교사로서 가능하지만, 그런 능력이 없으면 교육할 수 없다는 식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이렇게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습니다. (p.184)
교육을 재구축하는 일은 사제관계의 역동성, 개방성을 회복하는 데서 시작해야 합니다. 이것은 마인드만 바꾸면 될 뿐 비용이 따로 들지 않는 일입니다. (p.186)

노령에 이른 니트를 향해 '모두 자기책임이니까 당신들 맘대로 굶든지 죽든지 하라'는 논리를 정론으로 인정하게 되면 우리 사회는 앞으로도 계속 무수한 니트들을 양산하게 됩니다. (...)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날 그냥 내버려둬'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가져올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방법은 '미안하지만 내버려두지 못하겠어'라고 말하는, 이른바 '참견'밖에 없습니다.(...)
더 이상 니트들이 늘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도움을 청하고 도움을 받으면서 이 사회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니 우리는 너희들이 굶어죽게 할 수 없다. 옛날부터 그래왔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라'는 메시지를 전해야 합니다. 이 메시지가 '니트 예비군'에게 전해진다면 그들의 니트화를 막을 수 있을 겁니다. (p.207)

저자는 이미 완벽한 내적 논리를 구축하고 효율성과 자율성의 이데올로기에 병들어버린 이 세대를 되돌리기엔 너무 늦었다고 말합니다. 그의 생각에 이들이 그러한 이데올로기에 노출된 것은 인지능력이 갓 형성된 유아기 때부터입니다. 노동주체가 아니라 소비주체로서 먼저 자기를 형성한 이들은 첫 단추부터 잘못 꿰어진 존재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들에 대한 관심을 놓자는말은 아닙니다. 그들은 우리가 어떻게 하더라도 정상적인 사고방식으로 돌아오기 힘들테지만, 그 '위험군'에 속해있는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입니다. 기존에 사람들은 니트를 보면 혀를 차고 죽으라는 악담을 하고 아이들에게 저렇게 살면 안된다고 손가락질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태도는 니트를 늘리는 데 오히려 일조하는 것입니다. 그런 분풀이는 사회의 파편화를 가속화할 뿐이니까요. 그래서 사실은 정반대로 생각해야합니다. 끊임없이 관심을 기울이고, 제멋대로 살게 내버려두지 않고, 원하지 않더라도 도움을 계속 주어 공동체가 개인 뒤에 존재하고 있음을 알려야 합니다. 저자의 생각에 따르면 인간은 그렇게 하도록 되어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상호부조로 살아갔던 과거의 공동체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 원리를 되살리는 데는 큰 노력이 필요치 않습니다. 단지 생각만 바꾸면 되는 일이라고, 저자는 그렇게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게 정말 생각만 바꾸면 되는 일일까요? 100년도 더 전에, 사회진화론이 판을 치던 제국주의 시절에 이같이 인간의 본성인 상호부조의 원리와 공동체 정신을 회복하자는 주장을 펼친 사람이 있었습니다. <상호부조론>을 저술한 러시아의 아나키스트 사상가 크로포트킨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저 생각을 바꾸면 된다고 쉽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개인의 고립화는 자본주의와 함께 짠 하고 등장한 것이 아니라(자본주의 체제에서 특히 급격하게 진행된 것은 사실이지만) 원시에서 고대로,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른바 '문명화' 과정에서 발생한 유서 깊은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즉 [구성원 전체가 전체를 신경쓸 수 있어 깊은 유대감을 공유하는 (소)공동체주의와 대립하는 것은 고도로 체계화된 국가 시스템입니다.] 21세기에도 국가에 시큰둥하고 출신 부족이 훨씬 중요한 아프리카의 모습은 근대 국가 출현 이전의 사회를 현대에 보여주고 있죠.
본서의 서문을 다시보면 국민국가는 100년 대계를 바라보고 건강한 시민정신을 함양한 어른을 길러내려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가요? 국가는 근대 국민국가 형성 이전에도 그랬지만 그 이후에는 더욱, 국가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구성원을 만들어내는 것이 그 목적이었습니다. 공동체 정신이나 도덕 같은 것은 그에 종속되는 것이구요. 서구 선진국이나 북한 같은 독재국가나 불만 없이 재생산에 몰두할 국민을 원하는 것은 같습니다. 따라서 정량화, 수치화된 교육에 대한 문제의식과는 별개로 과거 형태의, 도제식이고 소공동체적인 교육으로 돌아가자는 건 그 해답이 될 수 없습니다. [옛날에 그럴 수 있었던 건 단지 지금에 비해 국가 행정 체계가 훨씬 느슨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돌아가는 것 자체도 불가능하죠. 정도는 달라도 부모 세대 역시 근대의 산물인 것을요. 그러나 저자는 이 점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5. 마치며

일련의 흐름을 형성하는 저자의 관점에 대해, 저는 '끼워맞추기'라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우선 저자는 일본 학생의 기초학력 저하 현상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으로 글을 시작하는데, 동시에 비판하는 '진정한 자기를 찾고 싶어 이리저리 방황하는 젊은이들'은 허영이 깃들어있다고 할수 있을지언정 기초적인 단어도 모르는 것에 개의치 않는 것과는 분명 거리가 있거든요. 옳고 그름을 떠나, 좀 똘똘하긴 한데 따로 논다싶은 애들이 저러지 별 생각 없이 친구랑 까르르댈 뿐인 애들이 저러지 않으니까요.
니트에 대한 분석도 너무 단정적입니다. 저자의 표현만 보면 거의 이들은 '신인류'나 마찬가지입니다. 기존의 사회와는 아주 낮은 단계의 소통조차 불가능한 식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인간은 그리 간단한 존재가 아닌 것을요.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부류로 '히키코모리'가 있습니다. 이들의 생활 패턴은 니트와 비슷하죠. 돈을 쓰지 않고, 대체로 무직이거나 한정된 일만 겨우 하며, 사회적 관계망과 단절된 상태라는 점에서요. 양자가 갈리는 지점은 심리 상태입니다. 니트와 다르게 히키는 세상에 녹아들고 싶고, 그러나 능력과 의지가 부족한 탓에 자기와 세상에 대하여 적대적입니다. 히키를 지배하는 감정은 두려움과 부끄러움이죠.
그런데, 일단 이건 분류가 그렇다는 거고, 비슷한 생활을 하고 비슷하게 단절된 저들을 실생활에서 엄격하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다시 말해서, 니트는 세상에 녹아들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을 것이고, 히키라고 정신승리할 문장을 찾지 않을까요? 무조건 그럴거라고는 못해도, 적어도 니트와 히키가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책에서 그런 면은 전혀 언급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니트의 탄생 배경을 자기 이론에 끼워 맞추느라 어쨌든 자기 생활이 있는프리터와 습관적 이직자까지 니트와 같은 구도로 설명하려는 무리수를 둡니다. 전혀 일리가 없는 생각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게 그렇게 뭉뚱그려질 수 있는 건가 싶고, '쓸데없는 짓 말고 안전한 사회 속에서 살아라'라고 하는 듯한 꼰대 마인드가 엿보여 살짝 불쾌해질 정도로요.
가장 비판하고 싶은 지점은 이 같은 탈주 현상들을 '주변인과 미디어의 영향 때문'이라고 호도하는 부분입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여행을 가면 답을 찾을 수 있을 거라든지, 회사나 가족 등을 뿌리치고 하고싶은 대로 사는 것이 우월하다든지, 이런 식으로 깨달은 체하며 떠벌리는 사람들을 저도 좋아하지 않으니까요. 확실히 21세기의 언더그라운드 문화는 주류/자본주의의 다른 일면인 부분이 큽니다. 그러나, 개인이 아무리 병들고 허세를 부려봤자, 사회의 병듦에는 당연히 훨씬 못 미치는 것 아닐까요? 다시 말해 사회에 문제가 있으니까 탈주하는 개인이 생기는 것이지, 개인이 자꾸 이상한 짓을 해서 사회가 병드는 것은 아니지 않냐는 것입니다. 본서는 '교육을 회복하고 사회를 안정화하자'고 주창하지만, 사회 자체에 대한 문제의식은 인문학자가 맞나 싶을 정도로 도무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왜 멋대로 사회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걸 전제하는 거죠?'라고 질문하고 싶습니다. 그걸 들은 저자는 역정을 내겠지만,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겠죠. '사회적으로 사는 것'은 앞서의 '배움에 대한 경건한 태도'와는 윤리적으로 비교할 수조차 없는 데도요.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가 왜 위대한 작품이겠어요.

하지만 이렇게 동의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본서는 분명히 가치가 있습니다. '하류를 지향하는' 의식이 실존하며, 또 니트가 승리자의 마음을 갖고 있다는 건 외부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통찰이 아닙니다. 그리고 철학적/심리적 영역에서의 비판은 별개로 국가적으로, 또 사회 전반적으로 니트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하며 또 여지껏 아예 잘못된 방법으로 접근하고 있었다는 위기의식을 환기하고 있죠. 특히 머지 않아 니트-히키 문제가 일본을 따라갈 확률이 높지만 어떤 자체적인 담론은 커녕 가끔 공포영화처럼 구경거리나 될 뿐 실질적인 문제의식은 전혀 형성되지 않은 한국의 현실을 보면 더욱요. 저자가 지적한 대로, 그 현상은 '왜 (공부해야 하지>취업해야 하지, 결혼해야 하지>살아야 하지)?'로 등장할 것입니다. 이미 어느 부분에서는 진행되고 있기도 하지요. 그러나 저는 반동주의적인 저자와 다르게 개인의 파편화는ㅡ고도 행정/자본주의 체제를 뒤엎지 않는 한ㅡ막을 수 없는 흐름임을 인정하고, 사회가 어떻게 꼰대가 아닌 얼굴을 하고서, 외로운 모든 우리 개인에게 과하지도 전혀 무관심하지도 않은 느슨한 연대를 제공할 수 있을 지가 화두가 되어야 할 것이라 봅니다. 그래도 오랜만에 동의하지 않는 글을 재밌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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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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