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te | 18/02/11 21:14:20 |
Name | 메아리 |
Subject | 푸코의 자기 배려와 철학상담(1) |
1년 반에 걸친 석사 논문 작업이 끝났습니다. 별 것도 아닌 글을 쓴답시고 푸닥거린 그 날들을 생각하면 부끄럽기 그지없네요. 제 논문의 토픽은 크게 두 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푸코의 자기 배려’와 ‘철학상담’입니다. 우선 이 둘의 각각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한 후에 제가 논문에서 주장한 바를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푸코는 자신이 죽기 불과 몇 년 전에 자신의 연구 주제를 획기적으로 전환합니다. 그는 전/중기 연구를 통해 가장 날카로운 서구 문명의 비판가로서 활동했습니다. 광기의 역사, 감시와 처벌, 지식의 고고학, 말과 사물 등 많은 저서를 통해 지식과 권력이 어떤 식으로 우리를 규정하고 훈육하는지 보여주었습니다. 여기까지가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푸코의 모습인데요, 일명 ‘구조주의자’로 불렸던 푸코입니다. (정작 푸코는 이 표현을 싫어했다고 합니다.) 이 시기에 푸코의 주된 공격 목표는 주체입니다. 그 주체는 데카르트에서부터 연원하는 주체인데요, 그 주체는 그의 ‘주체화’ 논의에서 규정 당하고 ‘존재 당하는’ 주체로 이야기 됩니다. 근대철학의 기본 범주로서 이해되는 주체는 인간의 모든 인식과 도덕적 실천의 토대로 기능하며 그보다 상위의 원리에 예속되지 않는 자율적인 존재자로서 간주되었습니다. 이에 맞서, 푸코는 새로운 주체에 대해서 이야기하려 합니다. 이것이 그가 후기연구를 통해 보여주려 한 바였습니다. 푸코는 자신의 마지막 연구 주제인 성(性)의 역사에 대해서 이미 6권까지 주제를 정해 놓은 상태였습니다. 그때는 아마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지 못했던 듯합니다. 그리고 1권 앎의 의지를 출판합니다. 76년인 걸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84년까지 2권을 출판하지 못합니다. 이른 바 침묵의 8년이 지난 후에 쾌락의 활용이 세상에 나온 겁니다. 그리고 곧바로 3권 자기에의 배려가 출판되고 며칠 뒤 푸코는 세상을 떠납니다. 다시 말해서 푸코는 자신의 후기 사상에 대한 책을 세상에 단 두 권만 남기고 떠난 겁니다. 그는 쾌락의 활용에 다시 서문을 쓰면서 이 작업이 이전의 작업과 궤를 달리한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이 쾌락의 활용 서문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푸코의 후기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서문에 대한 이해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 두 권의 후기 저서 때문에 푸코는 많은 오해에 휩싸입니다. 날카로운 반항아 이미지였던 그가 갑자기 꼰대로 변화되어 나타난 겁니다. 뜬금없는 이런 전환 때문에 푸코가 윤리학의 영역으로 도망갔다는 평까지 받게 됩니다. (그전까지 그의 철학은 주로 정치학으로 읽혔습니다.) 그러나 이미 죽어버린 그는 심지어 해명조차 할 수 없었는데요, 그에 대한 오해는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의 그의 강의가 책으로 출판된 이후에 점차 해소됩니다. 더불어 푸코의 후기 사상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도 시작됩니다. 첫 번째 강의록 주체의 해석학은 이미 한글로도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 강의록의 출판을 계기로 후기 푸코에 대한 새로운 연구들이 속속 출현합니다. 특히 그로(Gros)는 가장 활발한 푸코 연구자 중에 하나인데요, 후기 푸코에 대한 연구로 이름을 알립니다. 주체의 해석학은 81년의 강의록입니다. 다시 말해서 푸코가 자신의 연구 주제를 고대의 주체로 전환한 시점을 81년보다 약간 이전으로 볼 수 있는 겁니다. 이후 같은 주제로 아직 한국어로 번역되진 않은, 두 권의 강의록이 더 있습니다. 자기통치와 타자통치(82년), 그리고 진실에의 용기(83년)가 그것입니다. 이 83년 강의를 마지막으로 푸코는 세상을 떠납니다. 1. 자기 인식과 자기 배려 그렇다면 푸코가 후기연구의 주제로 잡은 바는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푸코는 진리와 주체의 관계에 대한 계보학적 탐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사라져버린 고대 그리스-로마의 전통, ‘자기 배려(suoci de soi)’에 대해서 말합니다. 에피멜레이아 히오우토(ἐπιμέλεια ἑαυτοῦ). 사실 자기 배려는 이 단어에 대한 적절한 번역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이 번역으로 인하여 푸코의 후기 사상이 오해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번역이 틀린 건 아닙니다. 다만 중의적 단어이기 때문에 생기는 오해입니다.) 여기서 뜬금없기는 합니다. 진리와 주체의 관계에 대해서 연구한다고 해놓고 갑자기 자기 배려라니... 그것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인식’입니다. 푸코가 주목한 것은 고대 그리스-로마에서 연원하는 자기 배려의 전통이 왜 사라졌는가 입니다. 그는 이것을 의도적 배척이라 말합니다. 바로 자기 인식에 의해서 자기 배려의 전통은 사라졌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자기 배려를 배척해버린 자기 인식은 무엇일까요? 이를 설명하는 단적인 말은 바로 “너 자신을 알라!”입니다. 그노시 세아우톤(γνωθι σεαυτóν), 이 말은 소크라테스가 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델피신전의 경구입니다. 푸코는 고대 이후로 자기 인식이 자기 배려를 의도적으로 배척하고 대체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의 자기 인식은 무엇일까요? 자기 배려와 어떤 관계인 걸까요? 왜 자기 인식은 자기 배려를 의도적으로 배척하고 도태시켰을까요? 자기 인식은 진리에 대하여 인식론적 개념에 입각하여 파악한 것이라 합니다. 여기서의 ‘자기’는 외부의 진리에 대해서 그것을 인식할 수 있도록 정립된 주체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식의 주체’를 말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푸코는 자기 인식을 배격하고 자기 배려를 다시 세우는 것인가? 아닙니다. 푸코는 고대에 자기 인식이 자기 배려의 한 부분이었다는 걸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기 배려는 과연 어떤 것일까요? 진리와의 대면 지점에서 개인이 해야 할 바와 연관된 행동 양식이 바로 자기 배려입니다. 근대적인 ‘자기 인식’에서는 자신에 대한 앎이 자기해석의 차원에서 제기되지만, 고대인들에게 있어서 ‘자기 배려’는 자기변형의 차원에서 제기됩니다. 자기 인식과의 비교해 보면 자기 배려는 행동과 변형과 실천이 더 강조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자기 인식과 자기 배려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설명을 위해서 푸코는 진리와의 관계 양상으로서 세 가지 모델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각각 플라톤주의적 모델, 헬레니즘 모델, 기독교 모델입니다. 플라톤주의적 모델에서 중요한 것은 진리와의 관계에서 그것을 상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상기는 바로 인식인데요, 여기서 진리는 역시 주체 외부에 실재하는 진리입니다. 기독교 모델에서 진리는 곧 신입니다. 기독교 모델의 핵심은 진리가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고수해서는 그것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즉 기독교 모델에서 자기 포기는 진리와의 관계를 위한 중요한 전제입니다. 기독교에서 ‘자기’는 또 다른 차원의 현실에 가까이 가기 위해 기꺼이 포기해야 하는 현실의 일부분이라는 겁니다. 이에 반해 헬레니즘 모델에서 자기 배려는 자기 인식과의 관계에서 그것에 함몰되지 않고 독자성을 유지하려 합니다. 헬레니즘 모델은 결국 ‘자기’를 도달해야 하는 목적으로 구축하려 한다는 점이 다른 두 모델과의 차별 지점입니다. 위 두 모델과의 비교를 통해 보면, 주체와 진리의 관계에서 진리가 어느 지점에 있는가가 차이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플라톤주의와 기독교 모델에서 진리는 주체의 외부에 위치해 있고, 그것에 접근하기 위해 인식이 중요한 방법으로 제시되고 있는 반면에, 헬레니즘 모델의 경우 진리가 주체 안에 있으며 그것에 접든하기 위해서는 주체의 변형, 실천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이 헬레니즘 모델에 푸코가 특별히 주목했던 이유는 까다롭고 제한적이며 엄격한 도덕이 바로 이 모델 안에서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푸코의 의문은 헬레니즘 모델에서 왜 그렇게 철저한 도덕 모델이 발달했는가 였습니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토록 까다롭고 엄격한 도덕을 실천하도록 했을까요? 우리가 까다롭고 철저한 도덕을 가졌다고 알고 있는 기독교는, 오히려 종교로서 그 자체로 도덕이 없었고, 그래서 헬레니즘 모델을 도덕의 틀로 받아들이게 된다고 푸코는 말합니다. 우리가 지금 기독교 도덕이라 알고 있는 그 엄격하고 까다로운 도덕적 모델의 원형은 사실 헬레니즘 모델이라는 겁니다. 서구의 문화사 내에서 이 헬레니즘 모델은 역사적으로 다소 과소 평가받았는데, 그 이유는 바로 플라톤주의적 모델과 기독교 모델의 헤게모니 하에서의 의도적인 축소였다는 것입니다. 푸코는 이 “자기와의 관계의 자목적화와 자기로의 회귀를 중심으로 하는” 헬레니즘 모델의 복권을 위해서 자기 배려에 집중합니다. 앞서 말했듯이, 헬레니즘 모델은 진리와의 관계에서 상기나 해석이 아닌 ‘변형’으로 자신을 구축해가는 도덕 모델입니다. 이것은 헬레니즘 모델에서 파악하는 진리가 초월적인 것이 아닌 내재적 것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즉 에토스(ethos)가 어떻게 구축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있어서, 플라톤이나 기독교 모델 모두의 특징은 진리가 초월적인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이 모델들 안에서 진리(aletheia)와 에토스 간의 관계는 별개 차원의 것입니다. 그러나 헬레니즘 모델에서 진리는 내재적인 것, 자기를 변형시켜 자기에게 에토스로 구축되어야 하는 것이고 그래서 자신에게로 돌아가려 합니다. 헬레니즘 모델에서 진리와 자기는 별개의 문제가 아닙니다. 진리의 위상에 대한 이러한 다름은 심각한 차이점을 보여주게 되는데요, 그것은 ‘자기’가 어떠한 가치로 정립되는가와 관계되어 있습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파르헤시아와 스토아 철학을 말하며 진행하기로 하겠습니다. 이러던 진리와의 관계 양상이 근대에 접어들면서 또 한 번 변화를 맞이합니다. 푸코는 그것을 ‘데카르트의 순간’이라고 부릅니다. 데카르트는 자기 인식을 ‘너 자신을 알라’라는 진리로 접근하는 근본적인 통로로 만듭니다. 진리에의 접근이 영성(spiritualité)이 아니라 인식에 의해서 가능해집니다. 진리의 역사에서 근대는 오직 인식만으로도 진리로의 접근이 허용되는 시기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철학자는 자신의 변형을 요구받지 않으면서도 진리로 접근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진리는 그 자체로서 주체를 구원할 능력을 상실하는데, 그것은 인식으로 접근 가능한 진리는 주체를 변형시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근대라는 시대의 진리란 과학과 사실에 대한 진리였으며, 그 시점에 에토스로 변형 가능한 진리와 결별한 것입니다. 근대의 진리는 어떻게든 개인의 에토스와 연결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삶과 진리 사이의 괴리를 만들었습니다. 근대 이후로 진리란 삶에 있어서 반드시 연관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무엇이 아니라, 삶과 유리되어 전문가 집단이라는 별개의 세계에서 의미 있는 체계로 구축되어 전승되어 가는 무엇이 되어 버렸습니다. 삶과 진리가 멀어지게 된 순간, 즉 삶에서 더 이상 진리를 찾게 되지 않은 때에 진리는 우리를 구원할 능력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자기 배려는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에 진리(aletheia)를 삶에서의 태도(ethos)로 구현하는 구체적인 생활양식이었습니다. 이러한 자기 배려 연구를 살펴본다는 것은, 진리와 삶의 연관성이 상실된 이 시대에 왜 진리와 삶의 연관성이 회복되어야 하는지를,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알아보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11
이 게시판에 등록된 메아리님의 최근 게시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