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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26 23:29:49
Name   메아리
Subject   괴물이 되는데 걸리는 시간(3)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붉게 물들어갔다. 그녀에 따르면, 피가 파래지는 것은 인체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지 헤모글로빈이 변형되어 색만 파란색이 됐을 뿐이라는 것이다. 항원항체 반응이 일어나기에 피가 빨간 사람과 파란 사람이 서로 피를 교환할 수는 없지만, 그 외에 원래 혈액이 수행해야 하는 기능은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것이다. 단지 색깔만 변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색깔만.

  그녀는 내 피가 파랗게 될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말해주지 않았다. 말해주었던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을 테니. 기껏해야 일찌감치 절망에 빠져 운명을 원망하는 시간이 더 길어졌을 뿐이리라. 게다가 난 아마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 해도 어떻게 그것을 쉽게 믿을 수 있겠나. 언젠지는 모르지만 넌 괴물이 될 거야. 네 팔뚝의 그 선명하고 구불구불한 핏줄에 바다와 하늘을 닮은 푸른색의 피가 가득 찰 거라고. 그런 말을 듣고 정신이 온전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청혈증에 대한 보도를 통제하기 시작한 게 2년 전 무렵부터였다. 가장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한 점은 이 사실들이 거의 완벽하게 통제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것이 가능한 이유를 다들 이 사실을 믿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이라 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피가 파랗게 된다면 어떻게 하지라는 불안과 자신의 피가 파랗게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정부가 이 점을 이용했다는 것이다. 누구도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점. 다들 착실히 암묵적 동조자가 되었다. 어쩌다 알게 되어도 곧바로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생존 본능은 생각보다 쉽게 인지를 속이는 법이니까.

  혜경은 국제 청혈자 연맹만이 유일한 희망이라고 한다. 그들은 트리플 B를 일으켜 이 세상을 전복시키려 한다는 것이다. 관련 연구를 그 단체 연구소에서 비밀리에 진행 중이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만일 내 피가 파랗게 변하게 되면 연락하라고 말하고 그녀의 낯선 목소리가 끝났다.

  파란 피의 인간. 유사 이래, 아니 역사가 생기기도 전부터 인간은 빨간 피의 존재였다. 인간이 파란 피의 인간을 또 다른 인간 존재로 받아들일지, 아니면 절멸시킬지 아직 모른다. 다른 존재로 그들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닐 것이다. 어쩌면 식당 앞에 이런 안내판이 붙을지도 모른다. ‘개와 피가 파란 인간은 출입금지.’ 간신히 인간으로 남는다 해도 인간으로 취급해 줄지는 여전히 별개의 문제다. 흑인은 노예 상태에서 해방됐지만, 여전히 니그로였다. 그들이 그런 취급을 받는 이유도 단지 색깔, 색깔 때문인데.

  특수효과를 전공했던 후배에게서 크로마키 배경으로 왜 파란색이 사용되는지 설명 들었을 때 살짝 소름이 돋았다. 파란색은 인간의 신체에 존재하지 않는 색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제 파란색은 크로마키 배경으로 쓰일 수 없게 됐다. 가장 비인간적인 그 색이 인간에게 구현됐으니까. 하늘을 닮은, 바다를 닮은 완전한 허구가 핏줄 속에 그득하다. 하지만 그 덕에 세상과 나 사이에 건널 수 없는 틈이 생겨버렸다. 파란 잉크 같은 피가 흐르는 나는 여전히 인간일까.

  폰에는 통화는 불가능하고 데이터 통신만 가능한 선불 유심이 꽂혀 있었는데, 사용할 수 있는 데이터는 아직 충분히 남아 있었다. 사용하던 폰은 집을 떠나기 전에 이미 꺼둔 상태였다. 아쉬운 대로 당분간 쓸 만했다. 의지할 데라곤 하나도 없는 상태였기에, 메신저 주소록에 있는 길 잃은 고래에게 메시지를 보내봤다.

  - 이혜경씨 폰으로 연락합니다. 저는 박정오라고 합니다. 혜경씨에게 전달 부탁드립니다.

  바로 답이 오진 않았다. 메시지 옆의 ‘1’ 표시도 사라지지 않았다. 조수석에 던져 놓고 다시 펜션을 향해 차를 몰았다. 펜션은 두 시간 정도 더 가면 도착할 수 있다. 피를 닮은 하늘의 파란 기운이 어느새 잦아들기 시작하더니 점차 붉은 노을이 펼쳐졌다. 지금의 피색에서 예전의 피색으로, 하늘의 색이 변하고 있다. 붉게 변해가는 하늘이 부러웠다.

  땅거미가 다 지고 나서야 펜션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남부 유럽의 전원주택 형식을 베낀 기영의 펜션은 다섯 채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었다. 중앙에 있는 가장 큰 건물은 단체 손님용 이층집이었고, 그 왼쪽의 집은 기영이 사는 단층짜리 집이었다. 오른쪽에 있는 나머지 세 채는 앙증맞은 방갈로였다. 건물들은 제법 공들여 예쁘게 지었지만, 그동안 꽤 많은 해풍을 맞은 탓인지 이제는 군데군데 낡은 티가 역력했다. 내 차를 알고 있던 기영은 방에서 나와 맞아주었다. 바닷가답게 텁텁한 바람이 불어왔다.

  “웬일이야, 연락도 없이.”

  “, 가까운 곳에 출장을 왔다가 들렸어. 며칠 있을지도 몰라.”

  “며칠?”

  “좀 긴 출장이거든.”

  어두워 잘 보이지 않긴 했지만 되도록이면 기영의 얼굴을 보지 않고 이야기하려 했다. 기영의 안내를 받아 늘 묵던 방갈로로 향했다. 밥은 어떻게 할 거냐는 질문에 알아서 하겠다고 얼버무리고는 서둘러 문을 닫았다. 방갈로의 문이 완전히 닫힐 때까지 기영은 나에게서 시선을 놓지 않았다. 바닷가가 바로 보이는 창이 있는 이 방은, 혼자 왔을 때 주로 머물렀다. 작은 침대 하나와 작은 소파, TV와 바다를 향한 창 쪽에 있는 책상이 있는 작은 방이었다. 화장실과 작은 주방도 있다. 하늘과 맞닿은 다른 채도의 파란색은 온종일 바라봐도 질리지 않았었는데.

  방에 들어와서는 우선 뉴스부터 켰다. 세상엔 여전히 별일 없었다. 나는 쫓기고 있지만, 뉴스는 여전히 어려운 경제 상황과 음주운전 차량에 의한 어떤 젊은이의 죽음과 어린이집 보육교사의 아동 학대에 대해서 나오고 있었다. 내 피의 색은 아직 세상의 특별한 관심사가 아닌 게 분명했다. 안심되면서 한편으로 뭔가 모르게 허탈했다. 스마트폰를 확인해 봤지만, 아직 아무도 메시지를 보지 않았다. 이걸 누가 확인하기는 하는 걸까?

  - 하루도 안 지났는데 생각보다 힘들군요.

  나는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피가 파랗게 변한 이들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치료하면 되지 왜 쓸데없이 목숨을 버리냐고 끌끌 대던 내가 떠올랐다. 이 지경이 되어서야 그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올드보이에 나온 대사 중에 사람은 상상력이 있어서 비겁해진다는 말이 기억난다. 지금의 나를 괴롭히는 것도 상상력이었다. 그것은 비겁하게 만들 뿐 아니라 절망에 빠지게도 한다.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면서 겪어야 하는 수많은 일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죽음을 결심할 만큼 고통스러웠다.

  휴게소에서 먹은 빵 쪼가리와 커피가 오늘 먹고 마신 전부였다. 무언가 필요했다. 조금 나가면 상점이 있긴 하다. 아직 문을 닫았을 거 같진 않았다. 옷을 차려입고 스마트폰을 챙겼다.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 돈이 들어있는 가방을 챙겼다. 방에 놓고 다니기엔 너무 거액이었다.

  걸어서 10분쯤 거리에 있는 상점에서 물과 소주와 주전부리와 라면을 샀다. 며칠 있을지 몰라서 조금 많이 샀기에 두 손에 무겁게 들고 돌아오던 중이었다. 펜션에 거의 다 이르러서 방 입구의 자동점멸등이 깜박거리는 걸 봤다. 어두운 그림자 두엇이 방 근처를 배회하고 있었다. 시커먼 마스크를 뒤집어쓴 꼴을 보니 빌어먹을 보건 경찰이 확실하다. 숨이 턱 막히더니 다리가 얼어붙었다. 어떻게 알았지. 기영이 신고할 걸까. 여기까지 오면서 만났던 수많은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우선 근처에 있는 창고 안으로 숨었다. 다행히 창고의 작은 창으로 내가 나온 방 쪽을 살펴볼 수 있었다.

  - 보건 경찰이 찾아왔어요. 이제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창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늦여름이어서인지 아직 바닥이 그렇게 차진 않았다. 내가 방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도망갔다고 판단해서 그냥 갈지도 모른다. 그때 기회를 봐서 차를 타고 도망가던가, 그도 안 되면 그냥 내빼야겠다. 방에 남긴 짐이야 옷가지나 잡동사니가 대부분이니 크게 상관없었다. 좀 거북하긴 했지만, 돈이 들어있는 가방을 가지고 나온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배가 고파서 산 것 중에서 토마토 주스를 꺼냈다. 빨갛고 빨간 주스. 이걸 마시고 피가 다시 빨갛게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피가 다시 빨개지면 무엇부터 해야 하나. 어제 마치지 못한 하반기 브랜드 마케팅 전략안이 떠올랐다. 신규 서비스 런칭과 함께 대대적인 프로모션을 진행하는 게 좋겠다. 쿠폰도 마구 뿌리고 추첨 행사도 늘려야겠지. 신규로 기획 중인 새벽 배송 서비스는 경쟁사의 서비스를 죽이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니, 그만큼 화력을 집중해서 쏟아부어 단기간에 승부를 봐야 한다. 아예 배송비 무료를 한 3개월 정도 하는 건 어떨까? 어쭙잖게 찔끔찔끔 뿌려서는 턱도 없는 일이니까. 문제는 고객의 충성도 확보다. 이벤트가 끝난 다음 어느 정도나 남아 있을지가 관건이었다.

  시시때때로 스마트폰을 살펴봤지만, 아직 아무도 메시지를 확인하지 않았다. 저 노란색 작은 1자가 나를 이렇게 괴롭힐 줄 누가 알았으랴. 저 기능을 만든 놈들도 미처 몰랐을 거다.

  - 왜 닉이 길 잃은 고래인가요?

  이 꼴이 돼도 목이 마르고 배가 고프고, 외로워지고 절망도 느끼는구나. 나는 사람이 아닌 줄 알았지. 사람이 아니게 되는 줄 알았지. 퍼런 건 괴물들이니까, 비인간성의 총체니까. 까닭 없이 눈에서 물이 나왔다. 눈물까지 파래지진 않았겠지? 손으로 문질러보니 파란색은 묻어나오지 않았다. 안심하고 다시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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