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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8/02/11 21:25:46 |
Name | 메아리 |
Subject | 푸코의 자기 배려와 철학상담(4) |
4. 푸코의 자기 배려 연구 ‘자기 배려’라는 번역, 그러니까 불어로 souci de soi, 영어로 Care of the Self는 고대 헬라어 Epimeleia heautou(라틴어 cura sui)의 번역입니다. 그런데 이 ‘배려’라는 단어가 주는 뉘앙스 때문에 혼동이 옵니다. 우리가 누가 누군가를 배려한다는 의미, care한다는 의미는 그를 보살펴 주고 돌봐주고 지켜준다는 의미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자기 돌봄’, ‘자기 보살핌’ 등으로 이야기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실제 푸코의 논의를 따라 가다보면, 웬걸... 그런 의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자기를 아끼고 사랑하고 관대하게 굴고 애틋하게 느끼고... 이런 거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거꾸로 입니다. 푸코는 epimeleia라는 단어에 대해서 분석합니다. 이 말의 어원은 meletan, meletê, meletai 등입니다. 이 단어들은 ‘훈련하다’, ‘수련하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푸코는 이 단어들이 ‘일군의 실천’을 지시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실천의 의미는 ‘인식’에 대한 대척점으로서 그것입니다. 라틴어 cura는 care의 어원이 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cure의 어원이 되기도 합니다. 이쯤 되면, 도대체 ‘배려’라는 단어에다가 무슨 의미를 부여한 건지 모를 지경입니다. 적어도 우리가 이전에 알고 있던 그 배려가 아닌 건 확실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뭘 의미하는 걸까요? 배려 즉, ‘돌봄(care)’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합니다. 한 예로서 우리가 아이를 키울 때를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아이를 돌봅니다(care). 그런데 그 돌봄이라는 단어로 통칭되는 행위는 어떤 것들로 구성되어 있을까요? 아이를 아끼고 신경쓰는 ‘마음’으로 아이를 먹이고 제우고 입히고 씻기며, 훈육하고 가르치고 타이르는 ‘행동’도 합니다. 그리고 아이가 아프면 그 고통을 경감시키기 위해서 여러 치료적 수단도 동원합니다. 이러한 돌봄을 자신에게 수행하는 것이 자기 배려라 봐야 할 겁니다. 그래서 epimeleia는 다의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배려를 구성하는 이런 행위들 중에서 고대의 철학자들에게 의해 강조된 것은 ‘훈육하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한 구체적 실천으로서 파르헤시아와 아스케시스가 이야기됩니다. 그러나 이들에 대해서 살펴보기 전에 우선 알아야 하는 푸코의 개념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체화(subjectivation)’와 ‘영성(spiritualité)’, 그리고 ‘내재성’입니다. 푸코는 이 세 개념을 후기 사유에 있어서 중요한 토대로 삼고 있습니다. 1) 주체화, 영성, 내재성 (1) 주체화 주체는 데카르트 이래로 서양 근대 철학의 핵심 개념이었습니다. 근대철학의 기본 범주로서 이해되는 주체는, 인간의 모든 인식과 도덕적 실천의 토대로 기능하며 그보다 상위의 원리에 예속되지 않는 자율적인 존재자로서 간주 되었습니다. 그러나 구조주의 이후 주체는 더 이상 설명의 근본 원리가 아니라 오히려 설명의 대상으로 존재하게 됩니다. 즉 주체는 더 이상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가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조주의에서 설명하려는 것은 자율적 존재로서 주체가 어떻게 자신의 타자에 의해, 자기 바깥의 물질적, 상징적 존재 조건에 의해 자율적인 존재자로서 생산되고 재생산되는가 하는 점입니다. 푸코는 ‘주체화’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제안합니다. 이 단어는 주체를 고정된 존재로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변형되고 개선되는 노정에 있는 무언가로 상정하는 것입니다. 푸코는 플라톤이 자기를 찾기 위해 배려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 것이 ‘실체로서의 영혼(l’âme-substance)’이 아닌 ‘주체로서의 영혼(l’âme-shjet)’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이 나타내는 바는 주체화를 수행하는 주체는 실체로서 고정된 주체가 아닌 스스로에게 변형을 가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주체라는 것입니다. 푸코의 ‘자기 배려’ 논의에서의 주체화란, 주체가 수행해야 하는 특정한 실천으로서 행동양식입니다. 그것은 자기가 자신을 주체로 만들어가는 작업이며 그것을 통해 스스로가 주체임을 밝히는 작업입니다. 이것은 인식의 주체가 아닌 실천(정확하게는 인식을 포함하는 실천)의 주체가 되어 가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의 주체는 완료된 어떤 것이 아닌 계속 진행 중인 과정상의 어떤 것입니다. 푸코는 결과로서의 주체보다 ‘자기’가 자신을 주체로 만들어 가는 과정에 주목합니다. 진리는 인식을 포함하는 실천을 통해서야 주체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실천은 주체를 만들어가는 실천입니다. 푸코에게 있어서 ‘주체화’라는 개념이 가지는 중요성은 그것이 고정된 근대적 인식의 주체를 상정하지 않고 변형을 기본적으로 전제한 고대의 실천적 주체를 말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는 이 ‘주체화’라는 단어를 통해서 두 가지 근대적 태도를 극복하려 합니다. 하나는 주체라는 고정된 실체를 상정하는 태도이고, 다른 하나는 그 고정된 실체를 바탕으로 진리와의 관계에 있어서 인식이 우선이라 여기는 태도입니다. 이러한 태도의 극복을 통해 주체는 고정되지 않고 변형되어야 하는 것으로, 인식은 그것을 포함한 실천으로 대체됩니다. 푸코는 이 조어(造語)를 이용하여 자기 배려 연구를 통해 극복하고자 하는 대상을 명확히 하려 한 것입니다. (2) 영성 ‘주체화’에서 주체가 자기 자신에게 필요한 변형을 가하는 탐구, 실천, 경험 전반을 푸코는 ‘영성’이라고 합니다. (푸코가 말한 영성은 종교적 개념의 영성과 구분됩니다. 푸코의 영성은 ‘철학’에서의 ‘영성’으로서 이 ‘철학’은 ‘주체가 진실에 접근하는 조건들과 한계에 대해서 사유하는 것'을 말합니다. 푸코는 고대 전반에 걸쳐 철학적 질문과 영적 실천이 “전혀 분리되지 않았었다”고 주장합니다.) 영성은 푸코에게 있어서 단지 정신적인 활동을 나타내는 개념이 아니라 실천을 포함한 행동과 경험 전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푸코에 따르면 서구에 등장하는 이러한 영성의 특징은, 그것이 충만한 진리의 권리로서 주체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진리는 주체의 존재 자체를 내기에 거는 대가로만 주체에게 부여됩니다.” 영성은 주체에게 이미 주어진 어떤 것이 아니며, 주체가 진리를 위해서 자신의 존재까지도 지불할 의지가 있어야 지닐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신의 존재를 지불한다’는 말의 의미는 주체가 자기를 변형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리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주체가 자기를 변형시키는 작업, 즉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공들이는 작업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자기 수련, 아스케시스입니다. 이것은 장기간의 노력 속에서 자신이 책임을 지는 자기에 의한 자신의 점진적 변환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영성은 고정된 존재로서의 주체에게가 아니라 변형 가능한 실존으로서 주체에게 부여될 수 있는 어떤 것입니다. 여기서 인식은 그 자체만으로 결코 진리에 접근할 수 없다고 합니다. 주체가 진리에게 접근하는 방법으로서 인식은 그 자체만으로는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이죠. 영성은 진리와의 관계에 있어서 자기 인식과 자기 배려 사이의 결정적인 간극을 나타냅니다. 영성은 진리와의 관계에서 인식만으로 그 관계가 가능한가, 혹은 인식을 포함한 실천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근대철학에는 실천을 포함하는 이 영성에 대한 추구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주체와 진리와의 관계로서 자기 인식에서 인식이 담당하는 역할을, 자기 배려에서는 영성이 담당합니다. 그렇다면 영성과 철학을 서로 이어주는 이 ‘진리와의 관계’가 주체에게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푸코에 따르면 진리와의 관계는 개인을 절제하는 삶을 영위하는 주체로 세우기 위한 구조적, 도구적, 존재론적 조건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진리와의 관계가 아니라면 인간에게 절제란 자기의 존재를 변형시켜가면서 추구해야 할 무엇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진리와의 관계는, 주체가 자기를 변형시켜 가기 위한 필요조건인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변형이, 그것이 고행이라고 불릴 만큼 힘들고 고된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수행되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진리와 관계 맺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영성은 이러한 구체적인 실천으로서 철학의 방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3) 내재성 내재성이란, “초월적 가치에 의해서 지탱되지도 않고 사회적 규범들과 같은 외부에 의해 조건화되지도 않는” 이라는 의미입니다. 자기와 자기 간에도 당연히 내재성의 관계가 성립되는데, 이 말은 초월성 없는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관계를 맺는 자기는 이 관계 자체와 다르지 않고, […] 요컨대 그것은 내재성이며 더 나아가 자기와 관계의 존재론적 일치이다.” 그로는 푸코의 이러한 말이 진정한 초월성은 내재적이고 긴장된 자기완성에 있음을 나타낸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은 내재와 초월 사이에서 결국은 초월에 더 비중을 두는 것으로 보입니다. ‘내재’는 그저 방식에 머물러 있고 목표는 여전히 ‘초월’에 있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푸코가 내재성이란 단어를, 초월성에 반하는 자기 변형과 실천을 단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사용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로의 이러한 표현이 푸코의 의도를 제대로 표현했는지는 의문으로 남습니다. 한병철은 들뢰즈(Deleuze)의 말을 빌려 내재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 그것은 그 무엇에도 예속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그 스스로 자족적이다. 삶의 이러한 내재적 차원에서는 어떤 지배 질서도 수립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내재성은 외부를 거부하는 것으로서 성립되는 내재성이 아닙니다. 여기서의 내재성은 외부의 것을 어떻게 받아 들이냐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진경은 내재성을 초월성과 대비되는 개념이라 말하고, 내재성의 사유는 어떤 초월자도 상정하지 않고 사유하는 것이라 말합니다. “초월자 없이, 모든 것을 구체적인 관계 속에서, 서로 규정하고 규정받는 관계 속에서 사유하는 것이고, 그러한 조건이나 관계의 변화에 따라 항상 변화하는 것으로 사유하는 것이다.” 내재성은 불변의 본성 같은 것이 아닌, 외부에 따라 그것이 달라진다는 점에서 ‘외부에 의한 사유’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체에게 있어서 내재성의 필요조건은 성찰인데, 그 성찰은 외부의 것을 내부로 받아들이는 작업으로서 성찰입니다. 더불어 자기 배려의 차원에서 그 성찰은 단지 인식차원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반드시 실천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파르헤시아와 아스케시스는 이러한 실천의 구체적 방법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할 수 있습니다. 특히 파르헤시아는 외부와의 능동적 접점이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일면입니다. 즉 주체가 진리와 관계 맺을 때 타인이라는 존재는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진리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더 잘 드러나고, 드러날 수 있으며 그것을 통해야 비로소 ‘자기’를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리와의 관계 맺음에 있어서 대화는 명상만큼, 혹은 더 중요하다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내재성이란 외부의 것에 대립되는 것으로서 내재성이 아닌 외부의 것에 의한 내재, 외부를 가져오는 방식으로서의 내재성입니다. 내재성은 이렇게 진리의 주체화와 맞물려 의미를 가집니다. 푸코에게 있어서 자기 배려는 주체 단독으로 수행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는 타인의 개입이 필요하다는 것을 계속하여 강조합니다. 진리를 주체화하는 작업으로서 자기 배려는 고독하고 외로운 작업이 아닙니다. ‘외부에 대한 사유’로서 내재성을 바탕으로 한 그 작업은 항상 타인과 함께 해야 합니다. “자신을 주체로 구축하는 데 필요한 타자의 행위는 무엇일까요? 어떻게 이 타자의 행동은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자기 배려에 편입될 수 있을까요?” 자기 배려에 있어서 타인에 대한 푸코의 논의는 이렇게 파르헤시아, ‘진실 말하기’와 연결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올려야 겠네요. 굿밤입니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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