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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8/02/12 23:20:43 |
Name | 메아리 |
Subject | 푸코의 자기 배려와 철학상담(10) |
(2) 자기 배려의 순환과 철학상담의 해석학적 순환 타인에게 진실을 말하기 위해서 고행의 삶을 사는 것. 에픽테토스 이후의 스토아 철학자들이 수행한 자기 배려는 이런 모습이었습니다. 타인에게 진실을 말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철학적 고행의 한 종류였습니다. 자기 배려는 이러한 맥락에서 진리의 삶을 살기 위한 아스케시스와 파르헤시아의 순환적 실천이었습니다. 여기서 진리는 ‘자기’로 하여금 이 순환적 구조로 들어가게끔 하는 핵심적이고 중요한 조건이자 동기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진리가 아니라면 ‘자기’는 이 순환 구조에 굳이 들어갈 필요가 없다. 푸코가 말한 ‘자기’는 그래서 진리를 추구하려는, 정확히는 진리 놀이에 참여하려는 철학적 존재입니다. 아헨바흐가 주창하는 철학상담은 내담자로 하여금 그의 길을 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 문장의 의미를 나누어 생각해 보면, 첫 번째는 내담자에게 주어진 의미로서 자율성에 대한 강조라 할 수 있습니다. 내담자가 스스로 자신의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것으로 철학상담은 내담자에게 해결책을 제시해주지 않음을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상담자에게 주어진 의미인데, 상담자가 자신의 권위에 기대어 내담자의 길을 제시하지 않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아헨바흐에게 있어서 상담자의 역할이 동반자로 제한되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상담이 추구하는 것으로서 ‘그의 길’을 제시한다는 말에서 ‘그의 길’이란, 내담자가 진실된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진실된 자신의 삶’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신의 삶 속에서 진리를 만나는 가능성을 회복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헨바흐의 철학상담은 내담자로 하여금 진리와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을 되찾게 하려 합니다. 철학상담은 삶을 철학적으로 뒤바꿔 놓는 계기이자 자신의 삶 안에서 자신의 진리와 맞닥뜨리게 하는 작업입니다. 지금까지 진리라 알고 있는 것들을 의심케 하고 심지어 그 의심조차도 다시 의심케 하는 철학적 호전성으로 무장시키는 것이고, 이런 팽팽하지만 즐거운 진리 놀이의 참여자로 내담자를 초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철학상담에서 이러한 진리 추구, 푸코의 말을 빌리자면 진리 놀이는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걸까요? 노성숙에 따르면, 슬로터다이크와 아헨바흐의 대화에서 소크라테스는 삶의 ‘해석학’을 실천한 자로 이야기됩니다. 소크라테스가 바로 해석학적 이해를 최초로 실현한 철학상담자라는 것입니다. 철학상담자와 내담자 사이의 해석학적 사건은 상담자가 내담자의 텍스트를 ‘사태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그 사태가 모순적으로 보이도록 움직이며 스스로의 사유 활동을 통해 더 나아가도록 함께 대화하는 것, “즉 변증법적 사유 활동을 함께 하는 것”이라 합니다. 아헨바흐는 이것을 ‘해석학적 에로스(der hermeneutische Eros)’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지 사태 배후를 쫓는 설명이 아닌 “사태에 관여하고, 그 사태에서 자기해석에 대한 충동을 전달하려는” 것이라 합니다. 이 ‘해석학적 에로스’는 상담자와 내담자 사이의 협력적이고 참여적인 관계성, 관심어린 친밀함을 기반으로 합니다. 아헨바흐가 말한 ‘타원’은 이러한 상담자와 내담자의 대등한 관계성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중심에서 동일하게 떨어진 두 지점을 점유하듯이 항상 균등한 관계를 유지한다.” 진리를 주체화하는 방법으로서 자기 배려는 철학상담의 장면에서 이러한 해석학적 순환의 가능성을 열어줍니다. 아헨바흐가 말한 내담자와 상담자의 타원운동은 자기 배려에 의해 가능하게 되는 모습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해석학적 순환은 진실성이 담보된 내담자-상담자 사이에서 관계의 상호성에 의해서 일어날 수 있는데 자기 배려는 바로 그 진실성을 추구하는, 진리를 주체화하기 위한 실천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배려는 단지 자신만을 배려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배려함으로써 자신을 배려하는 구조이기 때문에, 이러한 관계의 상호성을 확보하는 적절한 방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이 진리를 주체화하기 위한 실천에는 타인과의 관계뿐 아니라 자기와의 관계까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순환’이 가능하다 할 수 있습니다. 상담자와 내담자 사이의 관계를 통한 변화에 의해서 상담자가 상담자 자신과 가지는 관계의 변화, 그리고 내담자가 내담자 자신과의 관계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그것이 다시 상담자와 내담자 사이의 관계에 변화를 일으키게 되는 연쇄 작용을 일으키게 돕니다. 해석학적 순환은 단지 해석이 아니라 삶에서의 실천이 됩니다. 단지 진리를 파악하고, 이해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삶에 적용하려 하고, 다시 그것을 기반으로 행동(대화)하려 합니다. 해석학적 순환에서 진리를 파악해 가는 과정은, 확정되고 고정된 진리를 우리의 삶에 상정하고 결론짓는 형태가 아니라 순환을 통해 계속적으로 당사자들이 스스로를 변형시키게끔 하는 구조입니다. 만일 철학상담의 장에서 자기 배려가 어떠한 역할을 하게 된다면, 상담자와 내담자 간에 이러한 해석학적 순환의 모습을 이끌어 낼 것입니다. 철학상담에서는 상담자의 자기개방이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것은 철학상담자의 ‘진실 말하기’, 즉 파르헤시아이기 때문입니다. 철학상담자의 진실성은 그 상담 관계에서 관계성과 상호성을 담보하고 있습니다. 에피쿠로스학파의 파르헤시아에 대한 푸코의 설명에 진실성의 의미가 나타나 있습니다. 에피쿠로스학파에서는 스승의 자유로운 말의 실천을 통해 제자들 역시 그럴 수 있는 가능성과 권리를 가지게 된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스승의 진실 말하기가 중심적인 위치를 가지지만, 나중에는 제자들 간의 진실 말하기가 더 중요해 진다는 것입니다. “타자의 영혼과 소통하는 자기 영혼의 개방에 해당하는 일정한 마음으로 화답”하는 것으로 파르헤시아가 작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타자에게 나의 구원에 도움이 되는 진실을 보여주고 타자에게서 진실을 이끌어 내는 것이고 그러한 방식으로 타자와 나의 구원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입니다. 상담자의 진실성은 철학상담에서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내담자로 하여금 자신이 이해받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하며, 그러한 확신은 상담의 상호성과 관계성을 담보해 줍니다. “철학상담에서 상담자와 내담자가 진정으로 모르고 있는 것을 서로 묻고 경청하고 답변하는 사유과정은 상호적인 개방성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 상호적인 개방성은 서로가 서로에게 진실성을 태도로 구현함으로써 도달할 수 있습니다. 아스케시스는 이러한 ‘해석학적 순환’이 계속 될 수 있게끔 하는 중요한 기제입니다. 그것은 철학적 숙고가 우리의 삶에서 자연스럽게 작용하고 나타날 수 있게 해주는 훈련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파르헤시아는 그 가능 조건으로 이러한 아스케시스를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아스케시스는 파르헤시아에 의해서 다시 근거 지워집니다. 파르헤시아와 아스케시스라는 진리를 대하는 태도는 철학상담의 장면에서 이렇게 ‘해석학적 순환’이 가능하게 해줍니다. 가다머(Gadamer)는 이러한 해석학적 순환이 결과적으로 ‘공유된 이해’를 가져온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모든 대화 참여자가 최초에 가졌던 입장들이 변형된 것입니다. 내담자는 이러한 해석학적 순환을 통해 애초에 자신이 지닌 개별적 문제를 전체적인 구도, 즉 세계 전체의 지평 속에서 들여다 볼 수 있게 되며 문제를 바라보는 자신의 시각과 이해를 달리 할 수 있는 계기를 갖게 됩니다. 이렇게 해석학적 순환을 통해서 내담자와 상담자의 지평이 융합되는 과정은 내담자로 하여금 문제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게 하는 아스케시스의 태도를 가지게 하며, 제한된 자신의 지평을 벗어나는 계기를 가질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모습이 철학상담에서 자기 배려의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6. 결론 : 삶을 바꾸기 위한 철학적 훈련으로서 자기 배려 푸코는 ‘철학적 훈련’이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생각하고, 사람들이 보는 것과 다르게 보는 것, 그리고 이미 알고 있는 것에 어떻게, 얼마만큼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 가능할지를 알려고 하는 것이라 말합니다. 자기 배려는 고대 그리스·로마에서 행해진 이러한 철학적 훈련이었습니다. 푸코는 고대인이 수행했던 철학의 방법을 통해 다시금 철학이 어떻게 시도되어야 하는가를 말하려 합니다. 푸코에게 있어서 자기 배려 연구는 그가 철학을 어떤 것이라 생각했는지 드러내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자기 배려는 철학을 학문으로서가 아니라, 삶을 대하는 구체적인 태도와 실천으로서 받아들이고자 합니다. 푸코는 쾌락의 활용 서문을 통해 철학의 역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오늘날 철학은―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철학적 활동인데―무엇인가? 그것은 사고에 대한 사고의 비판작업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대신에 어떻게, 그리고 어느 만큼까지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 가능할지를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철학적 담론이 밖으로부터 타인들을 지배하고 그들에게 그들의 진리가 어디에 있으며 그것을 어떻게 찾는가를 말해주고자 할 때, 혹은 순수하게 실증적으로 그들의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있다고 자부할 때, 그 철학적 담론은 얼마간은 터무니없는 것이다. 그보다 바로 그 철학적 사고 속에서 철학과는 무관한 지식의 훈련에 의해 변화될 수 있을 것을 탐구하는 것이 철학의 권리인 것이다. ‘시도’―이것은 의사소통의 목적에 맞게 타인을 단순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진실의 작용 속에서 자기 자신을 변형시키려는 시험으로 이해되어야 하는데―는 철학의 살아있는 본체이다. 적어도 철학이라는 것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예전과 같은 것이라면, 다시 말해 그것이 사고에서의 ‘고행(ascèse)’, 자기의 훈련이라면 말이다.(쾌락의 활용 서문에서) 푸코에게 철학은 ‘자기의 훈련’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자기의 훈련이 ‘자기’만으로 이루어지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 훈련은 타인과의 관계를 필요로 합니다. 그 이유는 이 ‘자기의 훈련’이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서야 비로소 진실성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배려는 그저 자기 단독의 훈련이 아니라, ‘타인을 매개로 한 자기의 훈련’인 것입니다. 푸코는 철학이 쓸모없다는 세간의 의견을 일축합니다. 우려스러운 점은 이러한 모습이 일견 엘리트주의적 모습으로 비추어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고대 그리스에서 자기 배려가 엘리트의 덕목으로 취급되었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자기 배려에서는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가 아니라, 진리에 대해서 어떠한 태도를 가지고 있는가가 더 중요하게 고려되고 있습니다. 이것을 결정하는 것은 얼마나 많은 지식을 가졌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많이 그리고 깊이, 사유와 자기 변형을 시도했는가라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지식[로고스]을 가졌다 하더라도 그것을 에토스로 변형시킬 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철학을 제대로 삶으로 데려오지 못한 것이라 할 것입니다. 로고스를 에토스로 어떻게 변형할 것인가가 푸코의 근원적 질문이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자기 배려는 오히려 엘리트주의적이 아니라 말할 수 있습니다. 자기 배려에 있어서 교육을 통한 풍부한 지식의 축적은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사항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앎을 어떻게 삶으로 옮길 것 인가에서는 사실 실천이 핵심입니다. (계속)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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