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8/02/23 00:57:43
Name   하얀
File #1   20150512_214841.jpg (325.2 KB), Download : 9
Subject   마그리트 '빛의 제국'


때로는 그림을 보러 가는 여행도 있다.
단지 그 목적 하나로. 나머지 꾸밈말은 거짓이다.

이탈리아 여행의 마지막 종착지는 베네치아였다.
내가 베네치아에서 보고자 한 것은 리알토다리도 산 마르코광장도 아니였다.

나는 그림을 보러 왔다.
마그리트, '빛의 제국'

그 그림이 베네치아 구겐하임 미술관에 있는 것은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왜 하필 그 때였을까.
지금은 알지만 그 때는 몰랐다. 내가 그 때, 그 그림을 봐야했던 이유를.
그 때는 그림을 보는 것이 그저 여행의 한 부분이라 생각했지만 지금은 안다.
그 그림이 그 여행의 클라이막스이며 모든 것이였음을.

정말로 하얀 뭉게그림이 그림과 같던 8월의 하루, 드디어 구겐하임 미술관을 가는 날이었다.
오전에 일어나 여유로운 식사 후 수상버스를 타고 미술관으로 갔다.
그렇게 꼭 가야한다고 생각한 미술관이었지만 입장료를 듣고는 멈칫 할 수밖에 없었다.
유럽의 유명 미술관과 유적지를 꽤나 가봤지만 순간 이 그림을 꼭 봐야하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비쌌다. 하지만 그 것은 내가 오로지 그림 하나만 보러 갔기 때문이고 들어가 보니 전혀 비싼
금액이 아니였다. 몬드리안, 샤갈, 미로 등의 전시 컬렉션이 매우 훌륭해 그 값어치가 있었다.

그림 하나 보러 간 것치곤 맛있는 부분을 아껴먹는 것처럼 여유있게 천천히
제 1전시실부터 모든 그림을 보며 순서대로 돌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림 앞에 섰다.
마그리트는 이 주제를 20여점이 넘게 그렸다. 벨기에에도 뉴욕에도 ‘빛의 제국’ 시리즈가 있다.
베네치아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 작품은 1953년에서  1954년 사이에 그려진 것으로
너비 131.2cm 높이 195.4 cm 로 큰 사이즈의 작품이다.
즉, 1:1로 대면하기에 딱 좋은 사이즈랄까.

드디어 나는 혼자 이 그림 앞에 서서 그저 바라봤다. 이윽고 가슴이 조여들 듯 아파왔다.

세상은 저렇게 밝은데 저 집은 저렇게 어둠에 잠겨있다. 마치 웅크린 짐승같은 집이다.
하지만 2층에 켜진 불을 보면 사람이 살고 있다. 그리고 문이 있다. 문...그렇다. 문이 있다.

세상이 저렇게 밝고 화창해 한 발자국만 나오면 그 빛이 쏟아질텐데 나올 수가 없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 문만 열면 되는데 그럴 수가 없어서
갇힌 줄도 모르고 감내하며 살고 있을까.
자신을 학대하는 부모를 자기가 잘못해서라고 변명하는 아이처럼,
자기를 아프게 하는 사람을 부정할 수 없어서.

그 때 멈추지 않던 눈물이 현실에 갇혀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어린 아이들을 위해서라고 생각했는데, 그 아이는 바로 나였다.
아프고 아프고 아픈데 스스로 얼마나 아픈 줄도 몰라서...

나는 마침내 문을 열고 나왔다. 그리고 일상을 화초를 가꾸듯 조심스레 영위해 나갔다.
다시 계속 이 그림이, 그 화창한 8월의 날씨가, 이 그림 앞에서 소리도 없이 오래 울던 내가 생각난다.




11
  • 안녕하세요
  • 좋아하는 그림입니다. 부럽네요. 글도 좋아요. 행복하시길.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7813 문화/예술왜 일본 만화 속 학교엔 특활부 이야기만 가득한가 - 토마스 라마르 30 기아트윈스 18/07/09 6022 22
7732 문화/예술[강철의 연금술사] 소년만화가 육체를 바라보는 관점(스압) 2 자일리톨 18/06/23 7573 14
7547 문화/예술[이가전] 라파엘 로자노-해머 개인전, Decision Forest 3 은우 18/05/18 4263 1
7507 문화/예술Weather : 오늘 당신의 날씨는 어떤가요? 7 하드코어 18/05/10 5141 2
7501 문화/예술때늦은 <라이프 오브 파이> 리뷰 12 자일리톨 18/05/10 5403 14
7482 문화/예술북유럽 신화 한토막 - 블랙기업 아스갈드 편 9 제로스 18/05/04 4000 10
7370 문화/예술아오바 5 알료사 18/04/11 4760 2
7230 문화/예술[웹툰후기] 어떤 글의 세계 2 하얀 18/03/12 4656 7
7147 문화/예술마그리트 '빛의 제국' 4 하얀 18/02/23 4839 11
7082 문화/예술우효(OOHYO) 단독 공연 후기 4 나단 18/02/10 4549 5
7055 문화/예술사라진 세계, 우아한 유령(Vanished World, Graceful Ghost) 7 하얀 18/02/06 4311 14
7012 문화/예술프사 그려드립니다. 71 1일3똥 18/01/28 8282 24
6917 문화/예술뮤지컬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후기 4 化神 18/01/08 5876 1
6626 문화/예술칸딘스키의 초창기 작품들 8 나단 17/11/20 8280 6
6614 문화/예술남자. 꿈. 노오력. 10 알료사 17/11/18 5792 20
6537 문화/예술친구놈이 헬로윈 파티 사진을 보내왔다. 4 tannenbaum 17/11/05 4092 3
6494 문화/예술가을방학 콘서트 후기 22 나단 17/10/31 5960 4
6383 문화/예술가을 인디공연 세종문화회관뒤뜰 2 naru 17/10/07 3612 3
6354 문화/예술밴드 음악 하나 듣고 가세요. 1 한달살이 17/09/28 4116 1
6283 문화/예술사비나앤드론즈 공연소식 6 naru 17/09/15 3928 3
6244 문화/예술(스포)수명을 팔았다. 1년당, 1만엔에. 3 콩자반콩자반 17/09/07 7286 0
6227 문화/예술[스포/파고 시즌3 7화까지 감상] 3 콩자반콩자반 17/09/04 8341 0
6207 문화/예술마법진 구루구루 리메이크 추억돋아서 한번봤는데 8 콩자반콩자반 17/08/31 6674 0
6191 문화/예술이번달에 간 공연들 감상 5 naru 17/08/28 3651 3
6188 문화/예술[스포/왕좌의 게임 시즌7] 시즌7도 끝났군요 16 콩자반콩자반 17/08/28 5827 0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