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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8/04/22 22:02:41 |
Name | Danial Plainview |
Subject | 픽션은 사회를 어떻게 이끄는가 (2) |
5 : 제3변수 보통 우리가 사람의 행동을 예측할 때 생각하는 주요 변수는 개인의 특징과 사회적 환경이다. 그의 나이는 몇인가? 어떤 능력을 가졌는가? 어떤 것을 선호하는가? 어떤 자산을 보유했고 어느 직업에 종사하는가? 그가 마주한 환경은 어떤가? 계급이 존재하는가? 사회적 장벽이 있는가? 노동집약적인 사회인가 기술대체적인 사회인가? 사회를 분석할 때도 크게 다르지 않다. 현재 사회 구성원들의 평균적인 교육수준은 어느 정도인가? 경제 불평등도는 몇이고 소득의 평균과 중위수는 몇인가? 자산은 주로 어떻게 분포되어 있고 어느 섹터에서 주로 일하고 있는가? 국가의 가계부채는 어느 정도이며 어떤 환경에 처해 있고, 어떤 리스크가 있는가? 정부의 크기는 어느 정도이며, 시장에 개입하는 정도는 어떤가? 하지만 나는 이런 개인, 환경변수 외에도 추가해야 할 인자가 하나 더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대중들이 믿는 신화이다. 건국신화가 그 나라의 국민에게 끼치는 영향에서 보았듯이 국민 전체가 어떤 이야기를 믿고 있느냐는 그 사회의 방향을 예측함에 있어 중요하다. 노인들은 말한다. 요즘 젊은이들은 끈기가 없고 금방 포기해. 우리 때는 세 끼만 먹어도 족했고 단칸방에도 신혼을 시작했으며 적은 월급에도 애들을 위해 죽도록 일했다. 왜 요즘 청년들은 흰 쌀밥에 고기도 먹으면서, 대학도 나왔으면서 중소기업에라도 들어가 노력할 생각은 않고, 당장 돈이 없다는 이유로 결혼도 하지 않으며 애 키우는 게 힘들다는 이유로 낳지도 않니? 젊은이들은 대답한다. 요즘 결혼하려면 돈이 얼마나 필요한 지 아세요? 변변찮은 직업이라도 있어야죠. 그거라도 얻으려면 얼마나 노력해야 하는지 알아요? 다들 대학 졸업증 갖고 있고, 토익도 850점은 평균이라구요. 중소기업이요? 한 번 중소기업 들어가면 대기업은 꿈도 못 꿔요. 그렇다고 돈은 잘 주나요? 연봉도 낮고, 상승률은 더더욱 낮고, 들어간다고 회사가 성장하는 것도 아니고, 집값은 엄두도 못내고, 양육도 힘들다구요. 아빠! 이제는 시대가 달라졌다구요! 하지만 그렇지 않다. 시대는 확실히 더 좋아졌다. GDP기준으로도 증가했고, 물가상승률을 감안한 PPP로도 나아졌다. 더 이상 여자라는 이유로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는 일도 없고, 돈이 없어서 공부를 포기하는 일도 줄어들었다. 과거 빈민들은 너무 많아서 사회의 가장자리로 내몰렸지만 현재 사회는 빈민들을 도와줄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그런데 문제는 여전히 많아 보인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이것은 인식 = F(개인, 환경)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개인변수(영양상태, 경제적 상황)도 개선되었고, 환경변수도 개선되었지만 인식은 더 낮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제3의 인자, 신화가 필요하다. 현대 한국을 지배하고 있는 이야기는 "한강의 기적"에서 "기대 체감의 시대"로 바뀌고 있다. 사람들은 전체적으로 여전히 성장은 이어지고 있지만(F'(x)>0), 성장률은 둔화되고 있다(F"(x)<0)라고 믿는다. 점차 부모세대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란 기대는 줄어들고 있으며, 서울대를 가기보다는 의대를 가고, 언제 잘릴 지 모르는 회사에 취업하는 것보다는 공무원 시험에 매달린다. 부모 세대들처럼 성장의 시대에 올라타 계층상승을 노리는 삶보다는 안정적인 삶을 선호한다. 저성장은 경제지표에 대한 것이기도 하지만 기대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케인즈는 탁아조합의 예를 통해 어떻게 많은 사람들의 기대가 안 좋은 방향으로 우연히 겹치기만 하더라도 어떻게 경기침체가 일어날 수 있는지 설명했다.*5 정책결정에 있어 이러한 신화는 상대적으로 고려되지 않는다. 예컨대 학생부종합전형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최하층이 명문대에 진학하는 것이 유리해졌음을 이야기하고 정시제도가 더 낫다는 사람들은 학생부종합전형 하에서 최상류층이 얼마나 쉽게 명문대에 진학하는지를 이야기한다. 둘 모두 사실이지만, 동시에 둘 모두 사실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 우리가 쉽게 간과하고 있는 부분은 실제 제도와 상관없이 어떤 신화가 전파되고 있느냐라는 부분이다. 학생부종합전형의 확대는 실제 결과와 상관없이 계층이동성이 고착화된다는 신화를 자리잡는데 일조한다. 몇몇 최상류층에 의해 벌어지는 입시부정 사례는 그런 인식을 더욱 확대시킨다. 하지만 정책을 설정함에 있어 실제 데이터와 상관없이 이런 신화에 대해 더 고려하지 않는다면 사회를 더 나은 방식으로 만들 수 없다. 정치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에서 정치는 맞고 틀린 것에 대한 것도, 옳고 그름의 문제도 아니다. 한국의 정치 대결은 논리와 당위의 대결이 아닌 신화를 유포하기 위한 투쟁에 가깝다. 미국 신보수주의Neo-conservative를 묘사한 글의 한 자락이 이를 잘 소개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정치라는 건 일종의 국가를 무대로 한 종교 전쟁이다. 각자 믿는 교리가 있고, 죽음으로써 신이 되어버린 초대 교주가 있으며, 어떤 이벤트가 일어날 때마다 자신의 종교가 맞음을 증거하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지하철에서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사람들처럼 상대방의 전도에 나선 적극지지층이 있는가 하면, 초코파이와 햄버거 중 하나를 고르는 군인처럼 그때그때 이득이 되는 쪽으로 가는 사람들도 있으며, 종교 그 자체를 불신하는 무당파들도 존재한다. 물론 믿음이 세계를 구성하는 핵심 툴은 아니다. 때로 자기확신적으로 돌아가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세계는 각자 구성하는 논리에 의해 돌아간다. 신화는 우리가 바라보는 방식을 규정한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현실은 신화와 별개로 자신만의 현실로 숨가쁘게 돌아가고 있다. 6 : 사실 좋고 싫음과 옳고 그름, 맞고 틀림을 구분하는 것은 중요하다. 우리는 정치가 옳고 그름과 맞고 틀림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경험적 관찰에 기반할 때 정치는 좋고 싫음에 가깝다. 우리는 때때로 좋고 싫음에 몰입하여 사회가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동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회가 움직이는 건 맞고 틀림의 문제에 훨씬 가깝다. 우리의 몸을 사용한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다. 자연에는 당이 드문데, 이 당은 바로 에너지로 쓸 수 있는 영양 성분이기 때문에 우리 두뇌는 당을 맛있게 느끼고, 더 많은 당을 원하도록 진화했다. 한편 우리의 몸은 에너지를 쓰고도 당이 남을 때 그걸 글리코겐의 형태로 저장하도록 되어 있다. 그 사이 인류는 자연계에 드문 당을 정제하고 제당하는 기술을 발전시키고, 음식에 설탕을 원하는 대로 넣을 수 있게 된다. 우리의 뇌의 선호에 따라 당을 첨가한 음식이 많이 팔리고, 판매량이 올라가자 더 많이 팔린다. 그 결과 우리 몸은 기대했던 것보다 과다한 당을 항상 섭취하게 되며, 과잉 탄수화물은 더 많은 지방으로 돌아온다. 한편 비만이 자기관리의 실패이며 추함의 한 형태라고 생각하는 인식이 확산되며 군살 없는 근육질의 체형을 아름답다라고 생각하는 선호가 생겨난다. 그 결과 헬스 산업이 발전하고, 다이어트 요법이 퍼져나가며, 혹자는 지방 흡입을 시행하기도 한다. 여기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설탕에 대한 우리의 좋고 싫음과 비만에 대한 좋고 싫음은 각각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선호에 불과하지만, 이는 제당 기술의 발전, 인슐린에 의한 글리코겐 저장의 매커니즘이라는 사실에 의해 연결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 사실을 무시하고 선호에만 집중한다고 양 선호를 모두 달성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게임의 규칙이기 때문이다. 게임 안에서 바람직한 결과를 추구하는 것은 상관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위가 바위를 이긴다고 하면 곤란하다. 정리하면, 우리는 설탕과 비만에 대한 동시에 달성할 수 없는 선호가 있다. 우리는 이 둘을 동시에 달성하고 싶지만, 우리가 그걸 얼마나 원하는가와 상관없이 둘은 동시에 달성 불가능하다. 이 둘을 동시에 달성하고자 한다면 게임의 규칙을, 즉 사실을 바꿔야만 한다. 예컨대 아스파탐으로 설탕을 대체함으로써 단맛에 대한 선호를 달성하면서 인슐린에는 자극을 주지 않는다거나, 주사를 통해 피하지방을 분해하는 해결책이 그것이다. 왜 운동은 불가능하고 아스파탐은 가능한가? 그것은 우리의 운동에 대한 믿음과 제로콜라에 대한 믿음과 아무 상관없다. 둘의 차이는 오로지 사실에 관여하는가 아닌가의 여부뿐이다. 우리 사회엔 동시에 달성 불가능한 여럿 선호들이 있다. 노동시장에 대한 것도 그렇다. 청년실업을 낮추면서 동시에 기존 직업들의 안정성을 높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신규 일자리는 기존 일자리를 청산할 때 생겨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최저임금을 올렸을 때 실업률이 줄어드는 경우는 매우 제한적인 상황에서만이 보고되었다. 데이터는 최저임금이 올랐을 때 비숙련 노동자가 가장 먼저 피해를 받을 것을 보여준다. 이것이 게임의 규칙이다. 이런 일이 왜 일어나는가?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일자리의 수와 사람이 먹고 살기 위해 필요한 일자리의 수는 전혀 연관이 없기 때문이다. 매우 극단적으로 100가구가 사는 마을에서 1명의 초인적인 개인이 무인공장 시스템으로 모든 재화를 생산할 수 있다고 하자. 이 개인의 생산성은 매우 우수해서 나머지 99가구의 사람들이 재화를 생산하는 비용보다 훨씬 낮은 가격으로 모든 재화를 공급할 수 있다고 하자. 이런 상황이라면 99가구는 어디에서 돈을 벌 수 있는가? 그들에게 남은 해결책은 무인공장에 쳐들어가 그걸 부수는 수밖에 없다. 이건 노동의 종말 같은 달콤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건 재앙이다. 단기적으로 적은 노동생산성으로 사람이 먹고 살 만큼 임금을 주기 위해서는 우리는 임금의 고평가를 할 수밖에 없지만, 동시에 임금의 상승은 그 노동자를 기술로 대체할 유인incentive을 크게 한다. 기술혁신은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일자리의 숫자를 계속 단축시키고 있다. 생산성 향상은 성장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합쳐져 좋은 것으로 여겨지지만, 생산성 향상은 곧 적은 일자리와 동의어이다. 우리는 1차 농업, 2차 공업, 3차 서비스업의 구분을 제시하며 서비스업은 계속해서 새로운 일자리를 환상을 만들어 냈지만 현실을 보자. PC방, 노래방, 편의점, 주유소는 자동판매기, 코인노래방, 무인편의점, 무인주유소로 대체되었다. 그 사이 새로 생긴 직업은 무엇이 있는가? 인터넷 방송 BJ?*6 우리가 임금을 x축으로, 사람 숫자를 y축으로 하는 그래프를 그린다고 했을 때, 우리가 일반적으로 예측하는 그래프는 왼쪽이 잘린 종 모양의 그래프일 것이다(최저임금이 있으므로). 하지만 중소기업-대기업 섹터에서는 대체로 쌍봉 형태의 그래프가 형성된다. 이유는 간단하다. 대기업의 노동경직성 강화에 따라 고임금 정규직이 형성되었는데, 그에 상응하는 비용의 절감은 이뤄지지 않다 보니 그 절감을 하청업체에 전가했기 때문이다. 대기업의 노동경직성이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의 디커플링decoupling을 만들어 대기업의 생산성을 고평가하고, 중소기업의 생산성은 저평가한 셈이다. 여기서 인위적으로 중소기업에 연봉보조를 한다고 했을 때, 그것이 대기업-중소기업간 하청이라는 사실관계에 영향을 줄 수 있을까? 이런 식의 논의는 끝이 없다. 선행학습 금지법 시행은 학부모들이 갖고 있는 자식들이 뒤쳐지는 것에 대한 공포심이 해결되지 않는 한 사교육에서만 선행학습이 실시되고 공교육에서만 금지하게 되어 도리어 격차만 크게 만드는 상황을 만들 것이며, 정치 후원금을 엄격하게 단속하고 제한하는 것은 결국 정치 홍보 선거에는 돈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해소하지 못하는 한 오히려 처음부터 돈을 가진 채 시작한 금권계급이 중요한 정치적 의사결정을 장악하도록 만들 것이다. 항상 바람직해 보이는 것에 대한 선호가 바람직한 결과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이런 우리의 신화와 사실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변화가 일어난다. 7 : 기대와 실제가 차이날 때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세 가지 방법 셍떽쥐페리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당신이 배를 만들고 싶다면, 사람들에게 목재를 가져오게 하고 일을 지시하고 일감을 나눠주는 일을 하지 말라. 대신 그들에게 저 넓고 끝없는 바다에 대한 동경심을 키워줘라." 이 말은 우리의 욕망과 행동 사이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황제의 지시로 만리장성을 만들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는 좀 더 멋진 몸이라는 신화를 위해 기꺼이 피트니스 클럽에 가서 노동한다. 욕망은 사회의 움직임을 만들고, 그 욕망은 신화로 인해 구성된다. 이를 하라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신화는 욕망에 관여한다. 조선시대에 살았던 평민 갑돌이는 일어나서 고봉밥을 먹고, 밭에 나가 온종일 일하다가 을순이가 가져다 준 새참을 먹고 다시 일한 다음 초가집으로 돌아와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을순이와 놓고 살았다. 그는 평생 노동하면서 살았지만, 자신이 양반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양반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괴로워하지도 않았다. 반면 현대 한국을 살아가는 김철수씨는 아침에 일어나 삼각김밥을 먹고 막노동 현장에서 일한 다음 함바식당에서 점심을 해결한 후, 단칸방으로 돌아와 연예인들이 호호깔깔 웃는 TV를 보며 잠든다. 그는 아파트 광고를 보며 자신이 갖지 못한 집과, 결혼을 생각할 수 없는 현실에 화를 내고 싶지만 개인주의 아래서 가난은 사회의 탓이 아닌 개인의 책임이다. 분풀이할 곳이 없는 김철수씨는 소주로 화를 삭이며 잠에 든다. 갑돌이와 김철수씨 중 누가 더 불행한가. 갑돌이의 초가집은 김철수씨의 단칸방에 비해서 더 작다. 김철수씨는 갑돌이가 잔치 때나 먹을 수 있는 고기를 퇴근길에 사올 수 있고 아플 때는 동네 한약방이 아닌 병원에서 의료보험의 적용을 받을 수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왕 정도나 누릴 수 있었던 예술적 체험을 고작 1만원에 즐길 수 있지만 갑돌이보다 더 불행할지도 모른다. 왜? 우리의 욕망이란 본질적으로 신화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갑돌이는 본인이 생각하는 것을 이뤘지만 김철수씨는 그렇지 못했다. 부에 대한 신화가 그렇다. 본질적으로 사회 전체의 부는 기술의 발전과 사회가 그것을 어떻게 분배하느냐에 달려있다. 그러나 만약 사회가 그것을 분배할 때 지속적인 불만이 쌓인다면, 그 사회는 붕괴할 것이다. 문제는 불만이란 욕망의 기대에 비해 우리가 달성하는 정도에 비례한다는 것이다. 기대가 낮은 상태에서는, 그 불평등의 정도가 크더라도 그 체제는 안정적일 수 있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한 번 욕구를 갈망하게 되면, 우리는 되돌아갈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새로운 것을 알게 된 아담과 이브는 그들의 등 뒤에 불타버린 다리가 무너져 내리는 것을 바라본다. 우리가 욕망에 대해 결핍을 느낀다면 고려해 볼 만한 해결책이 세 가지가 있다. 효율적으로 자원을 얻을 방법을 찾거나. 욕망을 얻는데 필요한 비용을 줄이거나. 욕망 자체가 행복을 위한 해결책이 아님을 알고 그것을 포기하거나. 돈은 너무 간단하니 다른 예시를 들어 보자. 과거 우리는 결혼을 집안과 집안 사이의 결합으로 이해하고, 가문을 보존하고 계승하기 위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았다. 아들을 낳는 것은 가문을 이어 나간다는 점에서 중요했으며, 동네의 노총각/노처녀는 공동체에서 다 같이 해결해 줘야 할 문제였다. 그러나 이제 성적 자유주의의 득세와 함께, 결혼은 집안보다는 개인의 문제로 받아들여지게 되었으며, 연애는 더더욱 개인의 영역으로 자리잡았다. 누군가에게 연애 조언을 구하거나, 주선을 부탁할 수는 있겠지만 그와 그녀 사이의 문제는 개개인이 해결할 문제이며, 다른 누구도 개입할 수 없다. 성적 자유주의는 우리를 전통에서 해방시켰지만 동시에 불행하게 만들었다. 연애 자유경쟁 시장에서 우리는 더 잘난 누군가에게 밀려 자신이 좋아하는 누군가를 놓친다. 자유경쟁 시장은 기회가 평등함을 말하는 것일 뿐 우리는 본질적으로 능력에서 평등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상위 10%를 좋아함과 동시에 그들이 하위 50%인 나를 좋아하기 바란다. 물론 경제학은 그것이 헛된 생각임을 말해준다. 우리는 애초에 그녀가 나를 만날 수도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과거와 별반 다르지 않은 현실을 괜히 괴롭게 받아들이고 있다. 당신이 이걸 해결하기 원한다면, 다른 쪽의 강점을 개발하는 방법이 있다. 교회에 가서 신실한 기독교인이 되거나 홍대에서 기타를 치기 시작해라. 기독교를 믿는 걸 최우선으로 고려해주는 이성이나, 당신이 기타치는 모습에 꽂힐 이성이 있을 줄 누가 아는가? 아니면 욕망을 얻는데 필요한 비용을 줄일 수 있다. 모두가 욕망을 만족하기 위해선 자원을 무한히 생산해야 하고 때로는 인간이 아닌 것의 애정을 끌어오기도 한다. 성적 자유주의의 득세와 애완동물 문화의 확산은 연관되어 있다. 가상현실은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충분한 발전이 있다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까지는 강아지와 같은 유사-가족만이 애정을 채울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이다. 마지막으로 욕망 자체가 헛된 것임을 인지하고 진정한 행복을 위해서는 아지랑이처럼 잡자마자 사라지는 욕망을 쫓는 게 아닌 다른 길이 있다고 주장하는 방법이 있다. 2500년 전 붓다가 바로 그것보다 더한 급진적인 주장을 했다. 그는 쾌감을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인간 고통의 근원이라고 가르쳤던 것이다. 그런 감각들은 순간적으로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무의미한 동요이다. 쾌감을 느낀다고 우리가 만족할까? 우리는 더 많은 쾌감을 갈구할 것이다. 행복하거나 흥분된 감각을 느끼는 것은 잠시 뿐, 우리는 쉬지 않고 감각을 뒤쫓는다. 쾌감을 갈구하면 할수록 만족은 지속되지 않으므로 진정한 행복을 위해서는 쾌락을 앞지르는 것이 아니라 놓아주는 것이 필요하다. 붓다는 마음수련을 통해 감각들이 끊임없이 일어나다 사라지는 것을 관조하며, 그 감각들이 덧없고 무의미한 동요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세 번째 해결책은 매력적이지만, 욕망을 제외했을 때 남겨놓을 만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남긴다. 행복은 가장 쉬운 답이다. 그러나 행복이 어디에서부터 오는가에 대한 답은 저마다 다르다. 욕망이라고 대답한다면 다시 원래의 답으로 돌아온다. 욕망이 아니라면, 무엇이 행복을 만드는가? 보다 근본적인 질문이라면, 무엇이 의미를 만드는가? 근대로 들어서며 우리는 힘을 얻은 대신 의미를 잃었다. 과학은 세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려주지만, 인간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지는 않는다. 과학이 우리에게 말해준 건, 우주는 계획도 목적도 없는 과정으로, 아무 의미 없는 소음과 광기로 가득하며, 우리는 우주 속의 작은 점에 불과한 어느 행성에 잠깐 머물다 가는 동안 활개치고 안달하다 사라져버릴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한다. 우리가 우리이기 때문에 해야만 할 당위나 역할은 없다. 우주라는 극장에서 인간은 아무런 역할이 없다. 우리는 더 많은 음식, 더 빠른 자동차, 더 나은 의학을 누린다. 허나 이런 전능함 발밑에는 완전한 무의 심연이 입을 벌리고 있다. 이로 인해 끊임없이 의미를 잃어버리는 과정에서 우리는 인간의 주관적인 감정을 따라감으로써 어떤 의미를 얻어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우리는 가짜 의미와 가짜 욕망 사이에서, 가짜를 진짜로 만드는 우리의 힘을 가지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고 있다. 보론 *5 케인즈가 예시로 든 탁아조합은 다음과 같다. 아이를 서로 맡아주기로 약속한 부부 10쌍이 있다고 하자. 이들은 각자 쿠폰 몇 개를 들고 시작한다. 부부가 외출할 때 아이를 맡길 일이 있다면 쿠폰 하나를 사용하고 쿠폰과 함께 아이를 맡길 부부에게 준다. 만약 쿠폰이 부족하다면 다른 부부가 자신에게 아이를 맡길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런데 이 중 다수의 부부들이 우연히 나중에 쿠폰을 쓸 일이 많다고 생각하며 사소한 일에 대해서는 쿠폰을 쓰는 것을 꺼린다고 하자. 이들이 나중에 쿠폰을 쓰겠다고 결심하기 위해서는 쿠폰이 충분한 숫자 이상이어야 하는데, 동시에 부부들의 생각이 일치할 경우 누구도 쿠폰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쿠폰을 충분히 확보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마찬가지로 사회에서 많은 가계들이 동시에 지금은 소비보다는 저축을 할 때라고 생각하며 소비를 줄인다고 할 때, 그로 인해 공장의 매출은 줄어들고 다시 그 공장에서 일하는 가계의 소득은 줄어든다. 따라서 소비를 줄이는 경향성은 계속해서 강화된다. 케인즈는 이 현상을 경기침체라고 보았고, 따라서 이 교착상태에 빠진 탁아조합의 해결책은 단순히 쿠폰을 더 찍어서 부부들에게 나눠 줌으로써 해결할 수 있으며, 마찬가지로 경기침체에 빠졌을 때는 통화량을 증가시킴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 사례는 어떻게 사람들의 인식이 모여 자기확신적으로 사회의 현상으로 발전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6 이와 관련한 논의로 숙련편향적 기술진보(SBTC, Skill Biased Technological Change)를 참고할 수 있다. 숙련편향적 기술진보란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고숙련(skilled) 노동자의 수요를 늘리는 반면 공급은 이를 따르지 못해 고숙련 노동자에 대한 임금 프리미엄이 높아지는 현상을 말한다. SBTC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기술진보는 제조업과 노무직의 고용을 줄이고 전문직과 저임금 서비스직의 고용을 늘린다. 기계와 컴퓨터의 발전에 따라 일상적이고 표준화가 용이한 반복업무는 대체되지만 사회 서비스와 같은 사람과 자주 마주하는 직업들은 기계나 컴퓨터로 대체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제조업 생산직은 감소하는 한편 고임금 관리/전문직과 저임금 서비스직을 중심으로 고용이 창출됨으로써 일자리가 양극화되는 현상이 발생한다.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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