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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3/01/08 19:08:56
Name   Profit(Profit)
Subject   더 퍼스트 슬램덩크 조금 아쉽게 본 감상 (슬램덩크, H2, 러프 스포유)
일단 하나를 먼저 말씀드리면, 저는 슬램덩크 산왕전 에피소드는 역대 일본 만화를 통틀어 최고의 에피소드라고 생각합니다. 이 외에도

-드래곤볼 프리더 편
-원피스 알라바스타 편
-원피스 하늘섬 편
-헌헌 개미 편
-킹덤 합종군 편

등 몇 가지 에피소드들이 초인기작들의 최전성기 에피소드들을 차지하고 있지만, 슬램덩크 산왕전을 따라올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를 몇 가지만 말해보겠습니다.


1. 뻔하지 않은 엔딩.

만화라는 것은 가공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최종 결말에서 주인공이 승리하는 것도 필연적인 작가의 의도입니다. 심지어 패배를 그린다고 해도 그것은 작가가 정해 놓은 결과입니다. 즉 공이 손을 떠나기 전까지 정해져 있지 않은 사실이 아닌, 필연적으로 이루어지는 결과라는 뜻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스포츠 만화는 결과적으로 마지막 에피소드로 갈 수록 재미가 떨어진다는 한계를 갖고 있습니다. 중간에는 오히려 역경을 겪을 수도 있지만, 마지막은 승리할 거라는 것을 독자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다치의 H2를 예로 들면 히로와 히데오는 중간에 서로 패배를 경험하지만, 마지막 순간 경기의 승패는 히로가 무슨 구질을 선택하고, 히데오의 핸드-아이 코디네이션(Hand-Eye Coordination)이 어떤지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답은 그들의 마음에 있게 되지요. 스포츠 만화의 마지막 경기의 승패를 감정선으로 대체하는 아다치의 솜씨가 돋보이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러프>로 가게 되면 아예 승패 따위가 중요하지 않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여주는 남주에게 경기 전에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여 녹음해 두지요.

그나마 잘 해결한 게 H2 정도이고, <쿠로코의 농구>, <아이실드21>등의 다른 스포츠 만화를 보면 오히려 마지막 경기는 가장 극한으로 치달은  열정과 감정의 대립이 돋보일 뿐 승패는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사실 무슨 위기를 겪든 간에 긴장조차 되지 않아요.

제 생각에 <슬램덩크>는 이런 작위성에 불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북산의 전국대회 우승으로 완결이 날 거라면, 애초에 중간 단계, 중간보스들의 경기에서 벌어지는 위기라는 건 결국 작위적인 위기, 작위적인 해결에 불과하다는 것이죠. 어차피 명정, 지학은 산왕을 만나기 위한 징검다리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의미없는 위기와 해결을 모두 치워 버리고 바로 최종보스를 전국대회 2차전에 배치하고 주인공은 우승은커녕 3차전에서 탈락시키는 놀라운 선택을 합니다. 스포츠 만화의 어떤 한계점을 도치를 이용해 돌파해낸 것이죠.


2. 경기 내용과 조응하는 캐릭터의 서사.

두 번째로 슬램덩크 산왕전은 강력한 상대 전력 열세를 그 동안 쌓아 온 캐릭터들의 성장을 통해 필연성(즉 다른 말로 하면 가공된 서사, 작위성)을 나름의 개연성으로 풀어냅니다. 즉 실제로 10번 붙어서 9번 정도는 질 테지만, 1경기에 대해서라면 가능할 수도 있다는 식으로 성장들을 붙여서 IF도르를 만들어 내죠. 여기서 20권 가까이 쌓아 온 빌드업이 폭발하는 캐릭터는 정대만, 서태웅, 강백호입니다.

정대만은 그 동안 농구를 소홀히 한 것에 대한 대가를 치루지만 팀원들의 헌신으로 3점슛을 폭발시키고, 서태웅은 독불장군에서 패스 플레이를 가미하여 객관적으로 정우성에게 밀리는 실력차이를 극복해 냅니다. 마지막으로 강백호. 강백호는 [바스켓볼 선수가 되어 멋있게 덩크슛을 꽂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익힌 미들슛을 던지는 선수가 됩니다] 채치수의 위기도 물론 중요하게 다뤄지지만 그 동안 쌓아온 빌드업은 적은 편이었죠. 이 세 가지의 성장이 맞물려 10번 붙었다면 9번 정도 졌을 산왕전을 이기게 되지요.


(56분 51초부터)

그런데 이 성장 역시 사실은 작위적인 스토리텔링입니다. 경기 중에 성장해서 간신히 2점 차로 이기는 것 역시 스토리에 경기 내용을 억지로 맞추는 것이지요. 배성재가 출현한 침착맨 슬램덩크 명장면 월드컵을 보면 중간에 이런 말을 합니다. 안감독이 서태웅한테 [그냥 패스좀 해 새꺄] 하면 될 걸 왜 폼을 잡으면서 [자네는 아직 윤대협을 이길 수 없네] 같은 말을 하냐는 거죠. 그냥 경기 전부터 서태웅이 성장했으면 차라리 더 나은 거 아닐까요? 이것 역시 하나의 작위성입니다. 사실과 만화의 차이인 겁니다.

그럼에도 내가 아니라 팀이 경기하는 것, 나는 지지만 동료들을 믿는 팀이라는 메세지는 분명히 감동적이고, 그래서 작중에서 수도 없이 변주됩니다. 코트 밖에 있는 안경선배가 [코트 위에서는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 우리라도 도와야지.]같은 대사나, 채치수의 [나는 신현철에게 이길 수 없다. 하지만 북산은 지지 않는다] 같은 메세지는 모두 매치업에서 밀리거나 체력의 한계에 도달한 서태웅-채치수-정대만 등을 서로 휘감으면서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 되지요. 그 메세지는 팀 전체를 묶어서 북산이 존 프레싱이나 정우성의 공격에도 팀으로 버텨내는 원동력이 됩니다.


3. 농구를 사랑하게 된, 강백호.

그럼에도 이 뿐이었다면 슬램덩크는 위에서 언급한 다른 에피소드들을 이길 수 없었을 것입니다. 모든 매치업에서 열세지만 팀으로는 시너지를 내서 이긴다, 그뿐입니다. 더 파이팅에서 마모루가 브라이언 호크를 이길 때 등 뒤에서 압천 관장과 일보의 투명한 손이 나타나는 것보다 세련되지만 다를 건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마지막으로 특별한 지점이 등장하는 부분이 바로 강백호입니다.

곱씹어 보면 슬램덩크는 농구에 대한 만화가 아닙니다. 그것은 한 사람이 어떤 대상과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는 그 대상이 농구일 뿐이죠.

처음 강백호는 농구를 좋아하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여자를 꼬시기 위해 농구를 좋아하는 척 했던 양아치였습니다. 농구 시합에서도 자신이 중요했을 뿐, 농구의 규칙 같은 건 완전 무시하는 캐릭터로 그려집니다. 천재라고 스스로를 포장하지만, 독자들은 전부 알고 있습니다. 백호의 유치함을요.

하지만 농구부에 들어가 있는 동안 백호는 농구를 점점 더 좋아하게 됩니다. 힘든 연습도 견뎌내고, 처음으로 레이업을 실전에서 성공했을 때의 환호성을 기억하고, 골밑슛을 성공시키며 성장의 기쁨을 찾고, 그러면서 2만 번이나 되는 슛을 연습하게 되죠.

그 길을 먼저 간 게 서태웅이고요. 그래서 작중에서 강백호는 2만 번이나 되는 슛을 한 뒤에야 깨닫게 됩니다. 서태웅의 슛이 자기가 그리던 그 완벽한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고. 즉, 여기서 나와 있지는 않지만 서태웅 역시 천재과는 아닙니다. 서태웅은 강백호보다 먼저 농구에 빠진 사람일 뿐인 거죠.

보통 마지막 승부와 슬램덩크를 농구 열풍을 불러일으킨 두 작품처럼 소개하지만 사실 둘은 사람들을 농구에 빠져들게 했다는 점에서 레벨이 다릅니다. 슬램덩크를 본 사람들은 백호의 마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백호와 같이 농구와 사랑에 빠지게 돼죠. 강백호는 그렇게 바스켓볼 선수가 되어 예전과 다르게 파울을 당했음에도 참게 되고, 기꺼이 볼을 획득하기 위해 라인 밖으로 나가는 공을 향해 몸을 날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정말 좋아합니다, 이번엔 거짓이 아니라구요.

라는 대사는 오해가 불가능합니다. 슬램덩크 전 권을 다 본 사람들은 알게 되는 사랑의 마음이 어디를 향해 있는지.

어떤 대상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 그 과정을 이렇게 20권이 넘는 분량 동안 착실하게 보여준 작품은 슬램덩크 외에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 과정이 너무나도 아름답기 때문에 우리는 왜 백호가 마지막에 공을 위해 자신의 몸을 날렸는지, 왜 등 부상에도 불구하고 출전을 강행하는지 너무나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바스켓볼 플레이어니까.

작품 초반의 강백호는 산왕전 마지막 순간에 슬램덩크를 할 선수였지만, 이제 농구선수가 된 백호는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미들슛을 던지게 됩니다.


4. 백호의 마지막 슛.



-마이클 조던, 유타와의 파이널 6차전 마지막 슛.

스포츠 만화, 만화이기 때문에 구현된 작위성. 작위는 결코 현실을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스포츠 경기는 그 자체로 사실이기 때문에 현실이 만화를 뛰어넘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신화성을 획득합니다. 매니 파퀴아오가 8체급을 제패하는 건 마모루의 6체급 제패와 다르고, 커리가 12개의 3점슛을 성공시킨 게 정대만이나 신준섭과 다른 것처럼...

다시 말해 만화는 어쩔 수 없이 작가가 일어날 일을 일어나게 만들기 때문에 6체급을 제패하든 3점슛을 100개 연속으로 넣든 결코 사실성을 획득하기가 힘듭니다. 슛의 성공과 실패가 만화가의 펜에 달려있는 이상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강백호의 마지막 슛이 [필연]이 되기 위해 이노우에는 온갖 연출을 넣습니다. 2만 번의 연습, 시합 전의 되새김 등. 하지만 이것은 그저 개연성에 불과합니다.

실제로 이노우에가 그린 필연을 사실로 납득시키는 건 강백호의 눈빛입니다. 성공과 실패, 승리와 패배를 결정짓는 마지막 버저비터 속에서도 그 모든 부담을 던져버리고 골대와 나만 존재하는 눈빛. 마이클 조던이 더 샷에서 보여주는 그런 초연함이죠. 강백호의 얼굴을 그렇게 그린 그 순간 슬램덩크는 명작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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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노우에 다케히코가 언제부터 그것을 깨달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조던이 슛을 쏘는 것을 보면서 깨달았는지 모르겠군요. 슈팅 전 조던의 표정을 보면 무념무상입니다. 이 슛이 실패하게 되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이 슛이 성공하면 경기를 이긴다는 욕심조차 없는 순백의 상태. 그저 골대가 있고, 그 동안 했던 몸의 기억만을 믿고 무의식의 상태에서 쏘는 슛. 하지만 마지막 백호의 얼굴을 그렇게 그린 순간 그 공은 지면을 넘어 실제와도 같은 사실성을 획득합니다.

너무 과대평가 아니냐구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노우에 다케히코는 이 마지막 백호의 얼굴을 주제로 삼아 <배가본드>라는 작품을 그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칼싸움을 하다가 농사를 지으면서 연재 중단이 된 그 작품은, 천하무적이라는 말에 집착하는 순간 칼질이 개판이 된다는 한 가지 주제로 30권을 넘게 그렸습니다.

작중 미야모토 무사시는 수도 없이 스스로를 단련하고 또 단련합니다. 어떤 상대든 이길 수 있는 자가 되기 위해서요. 천하무적이 되기 위해. 그러나 한 25권쯤 도달해서 깨닫게 됩니다. 그 말들이 자신을 뒤덮은 족쇄가 되었다는 것을. 그런 의미에서 저는 사실 배가본드를 슬램덩크 강백호의 마지막 표정의 주해(註解)쯤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

그래서 영화판이 뭐가 아쉬웠는지 꼽아 보겠습니다.

1. 송태섭 스토리가 전체 산왕전 위기와 너무 조응이 안 됨.

작중 송태섭의 이야기는 꽤 슬픈 내용입니다만, 사실 산왕전의 스토리와 크게 조응이 되느냐 하면 잘 모르겠습니다. 분명히 형의 그림자를 넘어서는 장면과, 형의 가르침으로 드리블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장면이 존 프레싱을 돌파하는 장면으로 연결되긴 하지만 그것 뿐입니다. 존 프레싱 돌파는 영화에서 결정적인 변곡점이 되지 않습니다. 실제로도 송태섭이 올코트 프레싱을 돌파하고도 북산이 첫 득점을 하기까지는 강백호의 교체 투입이라는 사건 이후에 벌어지기 때문이죠.

또한 송태섭은 사실 원작에서 큰 성장형 서사가 돋보이는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안선생님은 존 프레싱에서도 송태섭에게 팀원들을 믿고 달리라는 조언 대신, 그건 우리 북산의 돌격대장이... 같은 무책임한 말이나 내뱉죠. 결국 혼자서 극복한 건데, 이 부분에 대한 보충을 위해 다른 주제들이 너무 많이 희생당한 것이 조금 안타깝습니다.

작중 정대만, 채치수, 서태웅은 팀을 믿으면서 한 단계 발전하는데 송태섭 혼자 가족의 어두운 기억으로 산왕전을 어렵게 끌고 있기 때문에 영화는 원작의 성장서사와 송태섭의 개인 트라우마 극복 서사의 두 가지 이야기가 따로 놀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주인공을 송태섭으로 한 게 너무 에러였다는 생각이 드네요.


2. 산왕이 얼마나 강력한 팀인지가 체감이 안 됨.

작중 산왕은 PG, C, SF가 전국 최강급인 팀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경기 전부터 산왕의 명성과 비디오에 북산 선수들은 압박감을 느끼죠. 갑자기 전국대회 2차전부터 산왕과 붙으면서 작중 독자들은 뭐야, 이거 진짜 지는거야? 이런 생각마저 들게 됩니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그런 압박감이 너무 적게 표현되었습니다. 특히 전반전은 정대만의 맹활약으로 생각보다 해 볼 만한 팀같은 이미지마저 주게 됩니다.

영화 <어벤져스:인피니티 워>와 비교하면 명확한데, (어벤져스는 투입된 자본은 많지만, 반대 급부로 작법의 수준은 안전빵으로 평이한 수준으로 달리고 있는 작품으로 봅니다) 작중 주인공 일당이 느끼는 절망감은 그만큼 타노스에 대한 빌드업이 잘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 초반부터 (어벤져스의 최종병기인) 헐크를 개털어버리는 타노스의 모습이 있기에 주인공들이 느끼는 위협이 관객에게도 그대로 전해지는 거죠. 하지만 슬램덩크는 작중 타노스급인 산왕공업을 불러와 놓고도 몇몇 장면에서 암시만 할 뿐 그들이 왜 강한지 잘 납득시키지 못했다고 봅니다.


3. 강백호의 변화나 마지막 순간이 너무 빠르게 지나갔음.

그나마 중꺾마, 팀플레이 같은 건 조금이라도 건졌지, 원작을 마스터피스로 만들었던 3, 4번은 송태섭 서사에 밀려 종말 수준입니다. 백호가 농구를 좋아하게 된 과정, 그리고 마지막 순간 수도 없이 반복된 연습 끝에 얻은 초연함은 영화에서 아예 삭제가 되었습니다. 백호는 작중에서 공격에 활로를 불어넣는 선수가 되었지, 그 전에 농구를 그저 소연이를 향한 어필 이상으로도 좋아하지 않던 모습들은 없어졌습니다. 결국 남는 건 허슬 뿐이었어요.

마지막 1분 째깍째깍 장면에서는 관객에서 조금의 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집중도 높은 장면이었습니다만, 마지막 슛이라도 확실히 보여주었다면 어땠을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진짜 그 마지막 순간만 재현했더라도 이렇게 불만족스럽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

기타 산왕전의 중간 해설자를 맡았던 캐릭터들 (경태 누나, 이정환, 남진모, 마성지, 명정공업 감독 등)의 퇴장, 영화라고는 믿기지 않는 빈약한 사운드 같은 것도 아쉬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생각나는 건 위 세가지 정도네요. 

만화판에서 너무 큰 충격을 받아서 이후 영화에서도 비슷한 내용을 기대했던 것인데, 배가본드를 그렸던 만화가의 다른 작품이라고는 믿기지 않게 너무 소품 같은 영화가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모션 애니메이션 재현도도 좋아서 더 아쉽네요.





2
  • 글의 몰입력이 대단하네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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