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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8/04/28 12:50:52 |
Name | 메아리 |
Subject | 저항으로서 장자 |
음헤헤 요새 티타임의 철학/종교 카테고리를 도배하고 있는 메아리입니다. 논문 끝내고 나서 한가한 덕이네요. 지금까지 올린 두편은 너무 문어체로 써놔서... 이번엔 조금이라도 구어체로 풀어 보겠습니다. 이번 주제는 동양의 장자인데요, 운둔과 회피의 대명사로 알려진 장자를 저항으로 읽어 보려합니다. 1. 장자의 현실 인식 선진(先秦)시대의 사상은 현실을 '상호 적대적 세력 간의 제어체계'라고 파악하고 그 적대적 세력의 통치에서 벗어남을 목적으로 합니다. 장자 역시 거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장자는 이러한 현실을 아주 부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단지 적대적 세력의 통치에서 벗어남이 목표가 아니라 그러한 현실 체계에서 벗어남을 목표로 합니다. 장자는 단적으로, 全生을 얻기 위해서 遊의 태도로 삶을 대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장자가 말하는 全生을 어떤 것일까요? 그것을 가장 잘 드러내 주는 예는 양생주 편의 庖丁解牛입니다. 포정은 바로 소 잡는 백정, 즉 기술자인데요, 여기에서 장자는 포정을 道를 얻은 사람으로, 全生을 실현한 모델로 말하고 있습니다. 또 소요유편에 있는 至人無己, 神人無功, 聖人無名이란 말 역시 全生을 이룬 사람들을 나타내는 데, 至人은 기술자, 神人은 군인, 聖人은 정치가를 뜻합니다. 장자가 全生에 관한 충고를 하는 대상은 이렇듯 기술자, 군인, 정치가 등이며 기술자를 특별히 예로 삼기도 합니다. 大宗師 편을 보면 [지인의 마음 씀은 마치 거울과도 같다. 보내지도 맞이하지도 않으며 사물에 대응하지만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물에 대해 언제나 제어자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다치지 않는다 -- 虧生(휴생)하는 법이 없다.] 라고 하여 全生을 이룬 至人의 心, 즉 마음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마치 거울처럼 사물에 대응하면서도 마음에 그것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마음속에 축적된 것이 없다는 뜻인데, 다시 말하자면 자의식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즉 장자의 全生이 가지는 가장 큰 특징은 바로 그것이 자의식에서 벗어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자의식에 관한 문제는 뒤에서 좀 더 다루기로 하겠습니다.) 이 지점에서 장자의 사상이 개체 대 개체의 문제 해결을 위한 학문, 즉 수양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장자는 전쟁이라는 현실에서 그 주재자가 되는 것을 거부합니다. 대신에 그 전쟁의 장에서 살아남는 방법으로 자신을 어떻게 변형시키는가에 집중한 겁니다. 2. 無何有之鄕(무하유지향) 장자는 遊를 최고의 경지로 이야기하면서 그것을 얻기 위해 수양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소요유 편에 혜자가 가죽 나무를 장자의 말에 비유해서, 크지만 쓸모가 없기에 사람들이 듣지 않는다는 말로 장자를 비판하는 고사가 나옵니다. 이에 대한 장자의 반박을 살펴보면 [지금 당신이 큰 나무를 가지고 그 쓸모없음을 걱정하는데 어째서 그것을 무하유지향이란 넓은 들판에 심고, 그 곁을 하는 일없이 방황하거나 그 아래 누워 자면서 노닐지 않는가. 도끼에 일찍 쓰러지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를 입지 않으니 그 쓰일 곳이 없음이 어찌 괴로움의 원인인가?] 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장자의 遊가 뜻하는 바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無何有之鄕, 즉 어떤 소유도 없는 곳에서 노니는 것입니다. 여기서 有는 단지 ‘있음’이 아니라 ‘소유’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無何有之鄕은 단순히 이상향이라고 이야기해도 되겠지만 이 다섯 글자엔 장자 철학의 요체가 담겨져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무소유의 세상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소유라는 것은 바로 제어 체계의 다른 말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떤 물건을 가진다는 것은 그 물건을 제어할 수 있다는 의미인데요, 다시 말하면 無何有之鄕 이란 바로 상호 적대적 세력 간의 제어체계라는 현실을 벗어난 곳을 말합니다. 즉 장자의 수양은 이 적대적 세력 간의 제어체계라는 현실에서 그 현실을 주재하는 자로서 마음가짐을 잡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현실에서 벗어남으로써 그 현실에 저항하려는 실천이었습니다. 그래서 장자의 이상향은 그 현실과 대척점에 위치해 있는 겁니다. 3. 좌망과 심제 대종사 편에 있는 [팔다리와 몸을 떨어뜨리고 총명함을 내쫓으며 형체를 떠나고 지혜를 버려서 크게 대통에 같아지는 것, 이것을 일러 좌망이라 한다.] 이라고 한 座亡과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듣고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로 들어라. 듣는 것은 귀에 그치고 마음은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을 듣는다. 기는 비어있으면서 사물, 타자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도는 단지 허에 모이는데 비우는 것이 심제이다.] 라는 心齋는 바로 遊에 이르기 위한 방법입니다. 좌망과 심제는 사물들 간의 상대적인 지식 체계 때문에 막힌 개체들 사이의 의사소통을 이루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예술의 한부문인 미술의 예를 들어 설명을 해볼까 합니다. 사실 쓰임과 효용의 관점에서 미술은 이해될 수 없습니다. 풍경화가 가지는 효용적인 가치는 사진술이 발명된 근래 들어 더욱더 낮아졌는데요, 미술은 사물의 모습을 마치 사진처럼 그대로 캔버스에 옮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미술은 화가가 자신이 본 것에 대해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신에게 어떻게 보여 졌는지를, 그 보여 진 것이 자신에게 어떻게 스스로를 드러냈는지를 표현하는 예술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회화는 그리는 사물과 화가와의 의사소통의 매개체입니다. 그것들이 단지 흰 종이나 천위에 있는 물감 자국들이 아닌 예술 작품인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좌망에서 말한 대통은 미술이 가지는 이런 의미와 연결될 수 있습니다. 좌망과 심재에서 말한 자의식의 버림은 사물, 타자에 대한 태도의 변화를 일으키게 됩니다. 이렇게 자의식의 버림이 장자에게 문제시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의식이라는 것은 자신이 가진 지식, 감정 등뿐만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상호 적대적 세력 간의 제어체계라는 현실의 근거가 되는 부분으로 자신에 대한 인식은 곧 자기 이외, 즉 타자의 있음을 인식하는 것으로 나아가게 되고 자신이 타자에 대해 우월한 위치에 서려는, 즉 대립과 상호 제어하려는 욕구의 기반이 되기 때문입니다. 자의식의 버림이란 이렇게 사물과 나, 타자와 나 간의 대립 체계에 대한 끊음이고 넘어감입니다. 이러한 모습에서 단지 소극적이고 관념적으로 보이던 장자의 사상이 사실은 현실 인식에 대한 근본적이고 적극적인 반작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장자의 遊는 상호 적대적 세력 간의 제어체계라는 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반동의 움직임이었습니다. 어떠한 방법으로도 남에게 다스려지지 않고 또 남을 다스리려고도 하지 않는 벗어남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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