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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5/08/08 12:17:45
Name   마르코폴로
Subject   대통령 담화문과 소설 속 한국사회
국민 여러분, 지금 세계는 경제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급속히 재편되면서 각국의 생존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습니다. 앞으로 3~4년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결정할 분수령이 될 것입니다. 국내적으로 2017년부터 생산가능인구 감소가 예고되는 가운데, 방만한 공공부문과 경직된 노동시장, 비효율적인 교육시스템과 금융 보신주의 등으로 성장잠재력이 급속히 저하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미래를 책임질 성장엔진이 둔화되면서 저성장의 흐름이 고착화되고 있고, 경제의 고용창출력은 갈수록 약화되고 있습니다.
- 박근혜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문 중 -

대통령의 담화문을 읽었습니다. 동의할 만한 부분도 있었지만 경직된 노동시장 때문에 성장 잠재력이 저하되고 있다는 부분이 눈에 걸리더군요. 해고를 하기 위한 과정이 경직된 탓인지, 고용을 하는 과정이 경직된 탓인지, 그도 아님 둘 다 문제인지 적확하게 지시하진 않았지만 유추해 보건데 기업이 사람을 좀 더 싸고 쉽게 쓸 수 있어야 한다는 맥락으로 보여졌습니다. 적어도 제가 살고 있는 시대의 해결책으로 제시할 만한 대안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진부한 표현이긴 하나 소설은 시대상을 표현한다 라고 합니다. 그 맥락에서 저 담화문 속 한국사회와 요즘 소설 속의 한국사회는 서로 다른 사회라 할 정도의 괴리감을 보여줍니다. 그 괴리감은 소설가나 대통령 중 누군가 시대상을 잘못 이해하고 있거나, 그도 아니라면 누군가가 거짓말을 하고 있기 떄문에 생기는 것이겠죠. 요즘 읽은 소설들에서 표현한 한국사회가 생각이 나서 옮겨 적어봅니다.





가난은 피를 통해 유전될 뿐 아니라 전염병처럼 사방으로 펴져나가는게 분명했다. 할머니도 이모도 삼촌도 고모도 사촌들도 모두 가난했다. 명절에 만나면 그들은 밥상에 모여 앉아 누가 더 살기 힘든가, 누가 더 불행한가에 대해 오랫동안 입씨름했다. 네가 나한테 그러는 거 아니다. 돈 없으면 형도 아니야, 병원에 입원해서 누워 있는데 찾아와서 봉투 하나 건네는 사람이 없어요, 진짜 가족도 아니야. 저마다 소리 높여 원망했고 서운함을 드러내며 눈물범먹이 된 뒤에야 헤어졌다. 1년 중 가장 풍성하고 넉넉해야 할 명절은 을씨년스럽게 막을 내렸다. 사정이 그러니 먹고살 만한 친척들은 슬그머니 연락을 끊고 숨어 버렸다. 가난한 피붙이들까지 다 챙기다가는 자신들도 다시 가난의 구덩이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될 게 뻔했다. 소정도 가난한 친척들이라면 지긋지긋했다. 가난한 이모는 가난한 남자를 데려와서 이모부라고 부르라 했고 가난한 삼촌도 마찬가지였다.  (중략)  친척들과 함께 있을때, 가계도의 한복판에서 악몽 같은 명절을 보낼 때마다 소정은 자살에 대해 생각했다. 이 가난한 피의  흐름을 멈추고 발목에 매달린 쇠공을 없애려면  손목을 끊거나 발목을 자르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애초에 신도림행 막차를 탄 자신의 삶은 아무리 발버둥치고 애써도 그 너머의 목적지에 도달 할 수 없다는 걸 뼈저리게 예감했다.
그나마 마음을 열어 보일 수 있는 친구들은 소정과 처지가 비슷하거나 다른 방식으로 삶이 복잡하게 꼬였다.  (중략)  그 속에서 소정과 친구들은 가난이라는 교집합 때문에 가끔 서로를 돌아봤다. 월급이 100만 원인데 씀씀이가 150이라 카드 값에 허덕였고, 얼마 안되는 월급을 쪼개 쓰며 적금까지 붓느라 쪼달렸고, 백수라서 그마저도 못 벌고 집에 콕 박혀 지내는 패턴의 변주가 반복되었다. 그래도 만나면 미래에 대해 꿈꿨고 삶의 질 같은걸 고민했다. 이제 만 원짜리 구두는 못 신겠어. 월급은 세 배로 오르지 않았는데 3만 원짜리 구두를 신었고, 그런데도 마음속에는 23만 원짜리 구두를 품고 있어서 만족스럽지 않았다.

- 서유미,  끝의 시작 -



"내가 계약직 일거리 찾아다니면서 면접 볼 때 제일 많이 들었던 질문이 뭔지 알아? '여기 한 달에 며칠이나 밤을 새나요?' 랑 '월급은 안 밀리나요?'였어. 우리가 다니고 있는 이 회사, 되게 좋은 회사야. 정시 퇴근하고 월급 제때 나오잖아. 이런 IT회사 없어."
이때만 해도 종현은 그런가 보다 하고 웹 디자이너의 말을 흘려들었다. (중략)
어떤 포부를 품었고 어떤 개성이 있고 어떤 배경을 지녔건 간에, 한국 IT 생태계에서 잡부의 운명은 거의 정해져 있다. 이곳 저곳에서 품을 팔고, 밤샘과 임금 체불에 시달리며, '내가 내가 아닌 듯한 느낌'을 오래도록 맛보고, 마지막에는 다 때려치우고 치킨집이나 차릴까 고민하게 되는 운명 말이다. (중략)
IT회사들의 채용 공고에 나온 어마어마한 스펙조건이 실은 별거 아니라는 사실을 그즈음 터득했다. "JSP도 할 수 있고, PHP도 할 수 있다"고 거짓말을 하고 회사에 들어가서 책을 보며 공부한 적도 있었다. 다들 그러는 분위기였다. "너 왜 회사에서 책 읽어"라며 혼이 난 적도 있었지만, 경력 날조가 문제가 된 게 아니라 단순히 '일하는 시간에 책을 읽는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작은 회사들일수록 치사하게 구는 사장이나 관리자들이 있었다.
경력날조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던 또다른 이유는 자신을 고용한 회사의 다른 직원들과 볼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주로 파견 근로자로 일했다. 면접날 회사에 가보고, 즉석에서 채용된 뒤 그 다음 날부터 파견 근무처로 출근하는 경우도 잦았다. 무슨무슨 평가원. 무슨무슨 기술원 등의 공기업 산하기관이나 기업체 전산실에서 일했다. 그런 전산실에 가보면 종현 외에 다른 사람들도 다 파견 근로자였다. 전산실 직원이 저마다 다른 회사 출신인 경우도 흔했다.

- 장강명,  열광금지, 에바로드 -



그즈음, 나는 서울권 대학에 합격했다. 4년제 대학의 컴퓨터학과였다. 컴퓨터에 관해서라면 고작 자판 치는 것밖에 몰랐지만, 졸업하면 취직이 잘 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에서였다. 그즈음 내 친구들은 대부분 그렇게 대학에 갔다. 막연하게 국문과에 가고, 막연하게 사대에 가고, 막연한 열패감이나 우월감을 갖고 졸업을 하고 진학을 했다. '적성'이 아닌 '성적'에 맞춰 원서를 쓰는 일도 잦았지만, 대부분 잘 기획된 삶에 대해 무지했고, 자신이 뭘 하고 싶어 하는지 몰랐다. 나보다 두 살 많은 언니는 서울에 있는 전문대학에서  '치기공'을 배우고 있었다. 주로 치아 보철물의 제작 기술을 배우는 학과였다. 언니는 원서를 쓰기 바로 전날까지도, 자신이 평생 누군가의 이 모형을 만들며 살게 되리라 상상하지 못했다고 했다.  (중략)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어깨도 결리고, 눈이 아픈데다. 타자 치랴, 오탈자 확인하랴, 도표 갖다 붙이랴, 영어에, 한자 표기까지 정신이 없었다. 인쇄소에서는 오탈자가 날 경우 돈을 줄 수 없다고 했다. 그곳에선 정해진 시간에 결코 소화할 수 없는 양의 일을 주고, 아무렇지 않게 3일 안에 해달라고 했다.  (중략)  100년 전 사람들은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진보적인 기계 앞에서, 내 등은 네안데르탈인처럼 점점 굽어갔다.

- 김애란.  침이 고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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