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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5/08/31 19:31:01
Name   王天君
File #1   american_ultra.jpg (426.2 KB), Download : 38
Subject   [스포] 아메리칸 울트라 보고 왔습니다.


장발에 체크무늬 남방, 말하는 폼새까지 누가 봐도 순도 100% nerd인 마이크는 편의점 알바로 생계를 꾸리는 별 볼일 없는 청년입니다. 함께 약에 취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눠주는 여자친구 피비는 마이크의 가장 소중한 존재죠. 그런 피비를 감동시키기 위해 이런 저런 이벤트를 구상하며 여느 밤과 다를 것 없이 계산대를 지키던 마이크 앞에 한 손님이 나타납니다. 알 수 없는 단어들만 지껄이던 손님은 계산대 위의 너구리 컵라면과 우유는 사지도 않은 채 한숨을 쉬며 가게를 나가버립니다. 괴짜들은 어디에나 있는 법, 가게 밖에서 라면을 후루룩거리던 마이크의 눈에 자신의 차를 만지작거리는 사람들이 들어옵니다. 사내들은 위협적으로 다가오지만  마이크의 육체는 신속, 정확하게 움직여 이 둘을 금새 시체로 만들어버립니다. 이 능숙한 살인 솜씨와 끔찍한 현장에 마이크와 피비는 벙쪄있다가 패닉에 빠지고, CIA는 마이크를 제거하려고 포위망을 좁혀오기 시작합니다.

아메리칸 울트라는 울트라 MK 사건을 기본 골격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영화는 미스테리에는 별로 흥미가 없습니다. 사건의 주체와 비밀은 극 초반부에 드러나고, 등장인물들이 진실에 접근하는 이야기로 흐르지도 않습니다. 가끔씩 총격전이나 맨몸격투에서 스릴을 줄 때도 있지만 대부분의 액션씬들은 그렇게 치밀하지도 , 정교하지도 않습니다. 그렇다고 유머의 쾌감이 높은 것도 아닙니다. 주인공인 마이크의 성장극이라고 보기도 어려워요. 여러 장르를 버무린 스파이물치고는 자극이 약한 게 사실입니다.

이 영화를 스파이물로 기대하고 본 다면 말도 안되는 부분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아무리 CIA가 절대적 기관이라 해도 한 마을을 폐쇄하고, 경찰을 포함한 일반인들을 학살하며, 드론까지 동원해 마을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려한다? 평화롭게 살고 있는 비밀 요원, 그것도 실험의 실패작을 처리하려고 저렇게 시끌벅적하게 일을 벌일 리가요. Laugher를 비롯한 공작원들의 나사 빠진 임무수행이나 예이츠 부장의 독단적인 임무 처리, 드론을 출발시켜놓고서도 인간적으로 구는 사무요원등 영화는 디테일에 아예 신경을 쓰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영화를 다른 스파이물처럼 사실성을 기대하고 봐서는 안된다는 거겠죠.

나중에 찾아보니 니마 누리자데 감독은 영화 프로젝트 X의 연출자더군요. 전작을 곱씹어보니 아메리칸 울트라의 헐렁한 분위기가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됩니다. 전작 프로젝트 X 를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찌질한 남고생 세명이서, 재미있는 생일파티를 즐기고 싶어 약간 일을 벌렸는데, 이게 점점 커져가며 마침내 사람들이 손도 대지 못할 만큼 파티가 커지고 난리법석이 일어난다, 그리고 이 안에서 주최자인 주인공들과 다른 사람들이 어쩌지도 못하고 혼란에 휩쓸리다. 애초에 아메리칸 울트라는 어떤 평범한 이가 특별한 능력을 깨우치고, 장애물들을 극복해낸 끝에, 무언가를 쟁취하고 승리를 거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영화의 초점은 “인간의 위기대처” 대신 “재해” 속에서 허둥지둥거리는데 맞춰져 있는 소동극인거죠. 마이크의 액션이나 이야기의 긴장이 다른 스파이물처럼 타이트해질 수록 이 영화의 몽롱한 분위기는 죽었을 겁니다. 이는 누리자데 감독이 의도적으로 표출한 개성입니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영화 속 사람들은 시덥잖은 다툼을 벌이며 시간을 허비합니다. 아마 어떤 사람들은 마이크의 행동이 답답하기도 했을 겁니다. CIA가 자기를 노리는데 피비와는 사랑 싸움을 하고 있고, 될 대로 되라면서 집으로 돌아가 대마초에 취해있는 둥, 마이크는 생존법칙에 위배되는 일을 벌이며 위험을 초래하니까요. 이 영화의 핵심은 바로 이렇게 중간 중간 늘어지는 부분들입니다. 마약상 로즈의 지하실 클럽에서 주인공 커플이 거울을 보는 씬이 대표적이죠.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추하면서도 뭔가 아름다운, 여태의 자기 자신과는 닮은 듯 다른 듯 거울 속 새파랗게 빛나는 얼굴을 응시하는 마이크의 장면은 인상적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차에 타서는 여태까지의 자기 자신이 진짜였는지 계속 곱씹고, 피비한테는 계속해서 칭얼거리고, 폭죽을 터트리며 백마 탄 기사님 노릇을 하는 장면들이야말로 이 영화의 본질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옆에서 뭐가 터지고 날아와도 멍때리고 싶을 때는 멍을 때리고, 엉망진창인 상태로도 폼을 잡으며 프로포즈를 하며, Nerd스럽게 영화는 폼을 잡는거죠. 이 영화는 액션보다도, 로맨스의 무게가 더 실려있다고도 볼 수 있을 겁니다.

아메리칸 울트라는 설렁설렁 되는 대로 넘어가는 이야기입니다. 그걸 인과관계나 거창한 필연으로 포장하고 있지 않을 뿐이죠. 그런 면에서 이 영화야말로 제대로 약을 빨고 만든 영화라 할 수 있을 겁니다. 말도 안되는 사건이 터지는데, 그게 어찌저찌 다 무마되고 지키고 싶었던 행복은 계속 쥐고 있으니까요. 약에 취한 이야기가 논리정연하게 펼쳐지는 게 더 이상하지 않겠어요? 스파이물에 루저 코메디를 끼얹은 게 아닙니다. 루저 코메디에 스파이물 공식을 슬쩍 끼워넣은 이야기죠. 한편으로는 예쁘고 착한 여자친구와 헤어진 찌질이가 혼자 대마를 피우며 몽상에 젖은 이야기 같기도 합니다. 자기 식대로 가오도 잡고, 이래저래 헤매면서 자신을 속인 여친을 원망도 하지만, 그래도 전부 용서하고 적의 손에서 그녀를 구해낸 후 반지를 건네며 아이러브유, 찌리리릿! 황당하지만 나름 귀엽지 않나요?

@ 존 레귀자모는 또 동네 규모 옆집 사는 범죄자로….

@ 음모론의 주체들은 축소시키고 마이크와 피비를 미스테리에서 떨어트렸다면 좀 더 좋았을수도 있습니다. 마이크가 사건의 전모를 모두 알고 있다는 게 제가 이 영화 전체가 마이크의 망상이라 의심하는 이유기도 합니다.

@ 케미컬 브라더스의 Snow는 훌륭한 선곡이었습니다.

@ 프로젝트 X를 생각한다면, 더 막나가주지 못한 게 아쉽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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